이미테이션 게임

“킹스맨”을 먼저 보려다가, 아무래도 우리동네에는 오래 걸려있을 것 같지 않아서 “이미테이션 게임”을 먼저 보고 왔다. “사랑에 관한 모든 것”도 보고 싶었는데 그게 걸려있을 당시에 건강 상태가 엉망이어서 볼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는 임신하고 나서 처음으로 영화관에 가서 본 영화가 된 셈이다.

수학과과 컴퓨터과를 둘 다 졸업한 사람에게 앨런 튜링이라는 이름은 안타까움과 안쓰러움과 이산수학 시간의 튜링머신으로 남는다. (……뭔가 이상한게 하나 들어 있는 것 같군) 여기다가 개인적으로는 레이디 디텍티브를 쓸 때의 설정으로, 6권 후기에서 성장한 마이크로프트 찰스 도지슨과 함께 이끄는 것으로 설정했던 비밀정보국 디오게네스 클럽이 사실은 암호학을 연구해서 적의 군사비밀을 해독하는 수학자들의 모임으로 튜링이 그 마지막 수장이었다, 뭐 그런 설정을 갖고 있을 만큼은 튜링에게 관심이 있었다.

앨런 튜링 역은 성격 나쁘고 외로움 타는 천재 이공계 역할로는 이제 도가 트고도 남았을 성 싶은 베네딕트 컴버배치. 어째서인지 포스터에 베네딕트 컴버배치와 함께 키이라 나이틀리가 걸려 있어서 개봉 전에는 무척 걱정을 했었다. 앨런 튜링의 여러 정체성중 하나인 “동성애자”라는 부분이 그냥 무시되지 않을까, 로맨스로 흘러가는 게 아닌가 – 그럴게 아니라면 왜 저 미인 배우를 굳이 캐스팅해서 투탑으로 놓았겠는가 – 싶어서. 결론만 말하면 기우였다.

시작부터, 수상쩍은 기계를 만들고 경찰들을 집에서 내쫓으려 하는 케임브리지의 수학교수 앨런 튜링의 집에 “훔쳐간 물건이 없는 절도 사건”이 발생하고, 튜링은 집에서 청산가리를 치우는 모습을 보여준다. 훔쳐간 물건은 없지만 집안을 다 두들겨 부수어 놓은 이 상황이야말로 치정사건이라는 느낌을 주는 가운데, 형사는 그가 케임브리지 스파이 같은, 외국의 스파이라고 의심하고 그를 추적한다. 그의, “동성애자”라는, 당시로서는 무시무시한 비밀을 천천히 보여주기에 더할 나위 없이 쓸만한 백그라운드였다. 이 이야기를 액자삼아, 영화는 2차 세계대전 중 블레츨리의 라디오 공장을 빙자한 암호 연구소를 배경으로 한 본 내용을, 그리고 회상을 통해 튜링의 소년시절을 보여준다.

당시로서는 최고의 암호였던 독일군의 에니그마. 체스챔피언과 암호학자, 언어학자 등이 모였지만 이 암호를 깨는 것은 무리다. 24시간마다 암호화 키가 바뀌니까. 다른 멤버들은 기존의 방식으로 하나하나 대입하여 암호를 풀려 하지만 튜링은 혼자서 에니그마와 맞설 기계를 만들기 시작한다. 성격이 모난 괴짜 과학자인 그는 동료들에게서 배척받지만 크로스워드 퍼즐에 도가 튼 데다 수학을 전공한 조안 클라크가 합류하고 그녀의 도움을 받아 동료들에게 다가서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이때 하필이면 동료들에게 사과를 나눠주는 것이 보는 사람 마음을 안타깝게 만든다) 튜링은 잠시였지만 조안과 약혼 관계를 유지하고, 동료들은 튜링이 쫓겨날 위기에 처하자 함께 나서 변호할 만큼 서로 신뢰하는 관계가 되지만, 튜링에게는 동성애자라는 비밀이 있었고, 동료 중 한 명은 러시아의 이중첩자인데다 튜링이 동성애자라는 비밀을 쥐고 있었으며, MI6의 감시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튜링은 조안과의 약혼을 깬다. 에니그마는 결국 암호를 풀어내지만, 이 사실이 독일에 바로 알려져서는 곤란했기 때문에 해군으로 복무하고 있던 동료의 형을 구할 수는 없었다. 튜링과 동료들은 독일군의 암호를 해독하는 한편으로 어떤 암호를 전략에 반영하고 어떤 것은 무시할지(그리고 관계된 사람들을 죽게 내버려둘지)를 확률을 통해 결정한다. 연합군은 승리하지만, 시작부터 극비였던 그들의 연구는 정부의 명령에 의해 소각된다.

이런 이야기를 형사에게 고백한 뒤, 튜링은 성범죄자로서(그를 조사하던 가운데 그가 남창과 관계를 맺었던 사실이 밝혀진다) 수감 혹은 호르몬 치료를 선택하게 되고, 자신의 학생 시절 친구 이름을 붙인 디지털 컴퓨터 크리스토프를 지키기 위해 호르몬 치료를 받던 튜링 앞에 조안이 나타난다. 조안은 언젠가 크리스토프가 튜링에게, 튜링이 조안에게 해 주었던, “가끔은 생각지도 못한 누군가가 생각지도 못한 일을 해낸다”는 말을 되돌려준다.

실존인물을 주인공으로 다룬 휴먼드라마라는 점에서 이 영화는 충분히 좋았다. 보는 내내, 2시간이 넘도록 몰입해서 볼 수 있었고. 물론 영국에서 에니그마를 깨기 전에 이미 1차 대전 당시 폴란드에서 에니그마의 초기 모델을 깨기 위한 연구가 선행되었다는 점이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거나. (뭐 이런 것이야 이야기의 극적 진행을 위한 장치였다고 한다면 할 말은 없지.) “여성” 수학자로서 당시에는 비서만도 못한 주급을 받으며 일했지만 세계대전 이후에도 정부의 정보통신기관에서 암호 연구 쪽을 했었다는 조안 클라크가 그저 튜링의 약혼자이자 이해자이며 다른 동료들과의 가교 역할 위주로만 나왔다거나. (이 역시 유감스럽지만 이 영화는 고독한 천재이자 그 자신도 비밀을 품고 있었던 튜링에게만 집요하게 포커스를 맞추고 있으니 다른 역할들이 축소될 수도 있긴 있지.) 분명 초반에도 부분적으로나마 해독된 암호에서 매일 아침 날씨와 하일 히틀러 소리가 나왔고, 이미 엘리자베스 1세 시절에도 2차원 암호가 나와 있으니 이 시점에서는 이미 단순 반복되는 문자열의 빈도보다는 키값의 중요성이 알려져 있는 게 당연한데도 일부 반복되는 문자열을 통해 키값을 빠르게 해독한다는 아이디어가 완전 후반부에야 나온다거나. (그러나 이 역시, 그런 “유레카!”하는 장면이 있어야 관객들이 여기가 클라이막스구나 하고 알아채 주긴 하겠지.) 그런 사소한 문제점들이 보이긴 했지만. 이런 영화를 찍어놓고도 하필이면 자신이 예전에 했던 스티븐 호킹 역을 한 에디 레드메인에게 남우주연상을 털리다니 베네딕트 컴버배치도 참 그 연기력에 비해 상복은 지지리도 없는 배우로구나 하고 새삼 생각했다.

디테일로는 튜링이 자살했다는 이야기는 자막으로만 나왔음에도 청산가리와 사과가 극중에 한번씩 등장했다는 점, 그리고 원래는 팀의 리더였고 처음에는 티격태격했던 휴 알렉산더와 가까워진 뒤에, 에니그마의 키값이 풀린 직후 다른 동료들과는 어색하나마 서로서로 포옹을 하던 튜링이 휴와는 포옹하지 않는 것으로 볼 때 튜링이 휴를 좋아했다는 설정인가보다 하고 짐작할 수 있었다는 점이 괜찮았다. 형사에게 튜링 테스트를 설명하고, 나는 인간인가 기계인가, 하고 묻는 장면은 그 심정적인 갈등이 엿보인건 좋았는데 한편으로는 “경찰아저씨한테 나쁜짓 하지 마 이 바보 수학 교수!!!!”같은 생각이 좀 들었(……)다.

한편으로 조안 클라크는 그럼 여기서 무슨 역할인가, 수학자로서의 역할이 아니라 임시 약혼녀로서의 역할이 더 강조되어 있었는데, 하고 투덜거리며 집에 와서 영화를 복기해보니 조안의 역할이 보이긴 보였다. “외부자”로서의 또 다른 인간형. 튜링은 처음에는 휴 알렉산더가 이끄는 팀의 유일한 “외부자”였다. 남들이 다들 노가다급 암호풀이에 매달려 있을 때 혼자서 컴퓨터를 조립하겠다며 나서는. 한편으로 다들 이성애자 남자인 그 팀에서 튜링은 “동성애자” 남자였고 이런 점에서도 그는 외부자가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런 튜링이 “여성”이자, 비공식적으로는 같은 팀이지만 공식적인 소속으로는 이 팀의 일원이 아닌 또 다른 “외부자”를 만났을 때 변화하는 모습을 자체가 굉장히 드라마틱했다. 튜링의 학생시절 친구였던 크리스토프 역시 결핵으로 시한부 삶을 살고 있어 다른 학생들과 쉽게 어울릴 수 없었던 “외부자”였고, 결국 외부자였던 그들이 서로가 서로를 세상으로 이끌어내는 촉매 역할을 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크리스토프와 조안의 극중 역할이 결정된게 아닌가 싶었다. 여자여서, 입구에서도 “비서 시험은 여기가 아니라”며 쫓겨날 뻔 했던 조안을 그가 불러들였던 것도, 같은 “외부자”로서 서로를 알아보았다는 것이 아닐까 싶어서.

DVD가 나오면 구입할 예정. 배우가 미남은 아닌 관계로 해상도에 그렇게 목숨 걸 일은 없다보니. (……음?!) 솔직히 베니보다 극중 튜링이 끌고 다니던 자전거와 들고 다니던 납작한 브리프케이스가 더 예뻤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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