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일을 기다리지 않는다

나는 내일을 기다리지 않는다 – 강수진, 인플루엔셜

어차피 이런 류의 책을 유명인 본인이 썼을 거라고 기대하면 잘못하는 거다. 일단, 평생 한국말 쓰며 이 땅에서 살아오며 “내 인생을 글로 쓰면 책 한권이야. 그러니까 네가 좀 듣고 써 볼래? 아, 인세는 반땅하자.”고 덤벼드는 수많은 무모한 분들도 결국 자서전 한 권은 고사하고 노트 한 권 분량만큼이라도 직접 쓰시면 대단한 마당에, 거의 평생을 외국에서 살아온 유명인사라면 정말 쉽지 않은 일이지. 글을 읽고 쓰는 게 직업인 사람이라면 모를까.

표지 타이포도 굉장히 성의가 없었다. 요새같으면 저렇게 “손글씨풍 폰트”를 쓰느니 캘리그래피를 쓰는게 대세가 아닌가? 강수진 정도의 저자를 섭외해 놓고 만들어놓은 표지 치고는 굉장히 미묘한 느낌이었는데, 결정적으로 여기 붙은 추천사가.

하필 다른 책도 아니고 “지성으로 영성으로”의 저자로 소개된 이어령 전 장관.
그리고 김난도 교수와, 푸르덴셜 생명의 손병옥 대표.

뭐지.

여튼, 발레리나 강수진씨의 인터뷰라든가, 그녀의 발 사진이라든가, 그런 것들에는 관심도 있었고 때때로 아, 대단한 분이다, 그렇게 느끼기도 했지만. 뭐랄까, 이 책을 읽는 내내 웃음이 났다. 전형적인 “고스트라이터가 쓴 자서전”의 와꾸(…..)에다가 인터뷰나 일화가 굉장히 애매하게 들어가 있어서. 그리고 대체, “사랑 받는 여성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라든가, 무려 한 챕터를 차지하고 있는 “5개 국어를 하는 여자”나, 한 챕터를 차지한 것도 모자라 독일어 부제까지 붙어 있는 “다이어트 비법”이라든가. 삶에 대한 열정을 이야기하면서 술자리 원샷 대결이라든가. (웃음)

그야말로 이건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고스트라이터가 유명인들의 자서전을 쓰는 것 자체에 대해서는 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은 인터뷰어와 인터뷰이로 만나서 대담 형태로 만들어지는 쪽이 좋다고 생각하지만, 그 자서전이라는 게 당장 지방선거부터 시작해서 수요가 많은 영역이고, 또 기획도서를 주로 내는 출판사라면 유명인을 섭외하여 자서전을 내는 것으로 회심의 한방을 노리기도 하니까. 그런데 이왕이면, 인터뷰를 하고 대충 정해져 있는 교훈에다가 에피소드를 끼워맞춰 자서전을 만든다고 해도, 적어도 그 유명인에게 “딱 맞는” 와꾸에다가 만들어야 하는게 아닌지.

이건 영감들이 여자애들에게 설교하고 싶어하는 내용이잖아. ㅋㅋㅋㅋㅋㅋㅋ 살빼라, 영어 해라, 강수진같은 여자도 사랑받기 위해 노력하는데 왜 자연스럽고 지적이면서 남편을 배려하고 뭐 그러지 못하느냐 등등. 그런데다가 곳곳에서 튀어나오는 김치, 한국의 훌륭함, 뭐 그런 것까지. 처음에는 그 와꾸들을 보고 기가 막혀 웃으며 보다가, 두번째에는 와꾸를 빼고 인터뷰에 해당하는 부분만 보고, 정해져 있는 교훈 따위 엿이나 먹으라고 스킵하고, 세번째로는 이 감상을 적기 위해 빠르게 한번 더 보고 있다. 그랬다는 말이다. 이 책에서 제일 좋았던 것은 아름다운 도판인데, 단행본 사이즈 보통 책에 들어가는 도판이니만큼 그렇게 해상도가 좋은 것도 아니어서 잘라서 영감의 벽에 붙여놓고 싶은 마음도 별로 들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굉장히 아쉬웠다. 음, 굉장히. 쓸데없는 교훈들 제거하고 인터뷰만 봤을 때, 이전에 잡지 인터뷰 등에서 짧게나마 언급된 내용들도 많았지만 이 내용들을 베이스로도 얼마든지 더, 좋은 자서전을 만들 수 있었을 텐데. 대체 어째서. 아니, 솔직히…… 그거야 고스트라이터보다는 기획의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한국출신, 세계 최정상급 발레리나에 대해 조금의 존경심과 예우가 있었어도 이렇게 목차를 짜진 않았을 거라고 감히 생각하는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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