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펼치자마자 이 문장이 눈에 들어와서 바로 침몰했다. 아니 이런 미친.
일단은 스스로에게 좀 놀랐습니다. 게을러 터졌네, 재능이 없네 자학했던 것치고는 그동안 만화를 꽤 많이 그렸더라고요. 그리고 또 한 번 놀랐죠. 이 경력에 이 나이에 여전히 두렵고 무식하고 길 잃은 병아리처럼 불안해서요. 어린 만화가 지망생일 땐 지금의 저만큼 늙은 경력직 작가는 후배들에게 그럴듯한 명언이나 쏟아내며 확신에 찬 나날을 보낼 줄 알았거든요.
올해들어 유난히 만사가 싱숭생숭하고 뒤숭숭해지는 것은, 내가 작가가 되기 위해 안정적인 직장에 다녀야겠다고 생각해서 이 회사에 들어온지 20년이 되었기 때문이고, 안정적인 직업을 구했으니 작가가 되겠다고 생각해서 작가가 된 지 꼭 19년이 되었기 때문이지. 나이는 40대 후반에 경력은 19~20년이면 나름 경력도 있고 나이도 있고, 분명 이 일을 시작하기 전 내가 보았던 이데아는 침착하고 어른스러운 말투와 깊은 통찰력과 단정한 손끝을 지닌 우아한 성인이었는데 그때의 이데아와 같은 나이가 되어버린 나는……. 한국만화박물관 꼭대기에 올라가서 “ㅅㅂ 내가 성공한 덕후다!”하고 외칠 미친 오타쿠 상태로 나이만 먹은게 아닌가……. 이 경력에 이 나이에 여전히 이 지경이어도 되는가 자괴감이 좀 느껴지던 상태였는데, 그 상태로 저 문장을 접하니 문자 그대로 격침.
어디가서 선생님 소릴 들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나이가 됐는데 불안한 건 마찬가지라니, 거 너무한 거 아니오?
아닙니다, 작가님. 저는 어디가서 선생님이 아니라 선배나 언니 소리도 들을 깜냥이 못 된다고요. 선생님 소리 들어도 이상하지 않다고 스스로 자각하실 정도면 작가님은 잘 살아가신게 맞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 그렇지만 이런 글을 읽고 보니 어쩐지 지극한 공감성 수치가 느껴짐과 동시에 안심은 된다. 세상에 나이 헛먹고 있다고 삽질하는 작가가 나만 있는 게 아니었구나! 싶어서.
저를 정확히 겨누고 악의를 쏟아내는 댓글을 보면 저로서는 상상도 못 할 적극적인 무례함에 미치도록 화가 치밉니다. 아니 상식적으로 독자를 우습게 봐서 자기 만화를 망치는 정신 나간 작가가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능력이 부족해서 그런 거지.
구절마다 구구절절 얻어맞고 있는 느낌인데, 이 대목에서는 들개이빨 작가님을 폭행죄로 고발하고 싶어질 정도였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창작자란 원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관심종자인데 말입니다. 아무도 물어보지 않았는데 자기 가치관과 망상과 실제 경험 따위를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니는 족속이지 않습니까. 하지만 관종 성향과 얼굴 노출은 별개의 문제죠. 내 몸뚱이가 주목받길 원했다면 연예인을 하지.
이 책을 읽기 며칠 전에 모 작가님이 인터뷰 있는데 사진 찍히기 싫다고 투덜거리시는 것을 보면서 저도 싫어요 그래도 일이니까 가서 예쁘게 찍고 오세요 토닥토닥 했던 적이 있는데 ㅋㅋㅋㅋㅋ 아, 그렇죠. 우리 모두는 신도림 역 안에서 스트립쇼를 할 기세로 자기 자아의 내면을 글로 써서 세상에 내다 거는 사람들이건만 그것과 별개로 이건 또 다르지 ㅋㅋㅋㅋㅋㅋㅋ
아무리 생각해도 제 목소리를 손쉽게 전파할 수단을 모두가 쥐고 있는 지금은 작가들의 지긋지긋한 넋두리를, 독자들의 가시 돋친 비아냥을, 서로 너무 가까이서 듣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러게요. 작가들의 넋두리는 작가들끼리 들으면 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한데. 아, 근데 그건 또 친목질이 되겠구나……. 하지만 사실 SNS를 통해서 자기 넋두리 하는 것을 가장 즐기는 인간들이 또 작가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기는 들었음. 왜? 애초에 이 사람들은 자기 자아의 내면을 글로 써서(이하생략) 그런;;;;; 인간들이 작가가 되는 것이니까. 음. ㅋㅋㅋㅋㅋㅋ 아, 정말. 매 줄마다 읽으면서 수치심을 느끼다니. 완전히 졌다는 느낌. 그건 그렇고 들개이빨 작가님이 들깨이빨과 늑대치아로 필명 3개 돌려가며 세배로 일해주시면 좋겠다. 하아…….. (갈려나가는 작가를 고려하지 않는 독자의 이기적 자아)
유통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몸뚱이로 언제까지 만화를 그려 먹고 살 수 있을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그나마 저는 그림체가 단순하고 일도 별로 많지 않아서 비교적 몸이 성한 편이었는데, 대형 플랫폼의 웹툰 스케줄에 저를 억지로 끼워 맞추니 바로 여기저기가 망가져버렸단 말이죠. 도대체 이 바닥 사람들은 어떻게 그 미친 노동량을 감당하고 사는 건지 궁금했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 별로 잘 감당하지 못하고들 계셨습니다. 활동중인 만화가의 SNS 계정을 살피다 보면 심심찮게 비보를 접한단 말이죠. 발병 고백, 정신과 치료 일기, 장기 휴재 공지, 그리고 간혹…… 사망 소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