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다섯 시에 영하 13도라고 하더니. 새벽에 잠깐 잠들었다가 집이 서늘해서 깼다. 식구들 자는 것 다시 다 꽁꽁 싸매 놓고서 컴퓨터 켜고 앉았는데. 생각이 많다.
어제 인도 문학기행 웨비나 행사도 나름 나쁘지 않게 했고, 주최측에도 통역사 선생님께도 도와주셔서 감사하다고 메일 썼고, 작년 연말이었나, 그쪽 요청을 받아서 바리공주 일러스트를 위해서 가이드를 만들었는데, 그 결과물이 아주 예쁘게 나왔다. 마침 그 감사 인사는 직접 하고 싶어서 영어로 짧게 준비했는데, 채팅방에 일러스트레이터님도 들어와 계셨다고 한다. 그 감사 인사만은 직접 말씀드리길 잘한 것 같다. 영어공부는 더 해야 하지만 이만하면 매너있게 이것저것 잘 준비해 간 거겠지. 스피크이지 선생님께 다시 연락 드리거나, 아니면 조경숙 작가님이 말씀하신 영어 선생님께 연락 드려봐야 할 것 같다.
작가가 성공하고 실패하고, 그런 것은 말로 따질 수 있는 분야가 아니긴 한데. 그래도 다른 사람들(특히 경력이 적은) 앞에서 “나는 실패했다, 완전 망했다” 소리를 하면 곤란한 선은 분명히 있을 것 같다. 내 경우도 연간 책이 이만큼 나오고 국내외 행사도 이것저것 하고 있으니까, 이제 농담으로도 나보다 경력이 적은 작가 앞에서 “망했다” 소리를 하면 안 되는 레벨까진 온 것 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가에서는 내가 “취미생활을 거하게 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고 있다……. 지난 추석에도 명절 다가온다고 안부 전화 걸었다가 “넌 아직도 그 취미생활 하고 있냐, 나이가 몇이냐.” 라든가, 명예퇴직이 가능한 만큼의 연차가 쌓였다고 했더니 “헛소리 말고 정년까지 다녀라, 취미생활이 밥벌이가 되겠냐” 같은 소리들을 들었으니까 뭐. 가끔은 그 취미생활 소리를 듣고도 전화를 바로 끊어버리지 않고, 사무적으로나마 명절 안부 마저 전한 뒤 끊는 내가 좀 보살인것 같기도 한데 (자기가 스스로를 보살이라고 부르면 일단 보살 범주에는 안 들어갈 것 같지만) 내가 잘났다는 게 아니라, 그래도 이정도 성취를 하고 있는데도 “취미생활”이면, 대체 취미가 아닌 레벨의 기준이 어디 붙어 있는 거냐고.
어쨌든 그런 관계로, 나는 내 글쓰는 “재능” 이 친가에서 오지 않은 것이기를 늘 바랐다. 피와 살로 이루어진 부분이야 어쩔 수 없다고 쳐도. 내가 무엇보다도 소중히 여기는 것, 평생을 걸겠다고 다짐한 이것만은 그쪽에서 오지 않은 것이기를. 차라리 돌연변이처럼, 그 부분만은 누구의 딸도 아닌 것처럼 그렇게 뚝 떨어져 있기를. 문학을 하신다는, 실제로는 뵙지 못한 먼 친척 어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혹시 이것도 그 집안 유전자 풀 안에 들어 있었던 기능인가 생각하다가, 때로는 이런 데서 영영 벗어날 수는 없으리라는 사실이 너무 차갑고 외로워서 치를 떨다가, 분해 하다가, 지금 내 안에서 활활 잘 타고 있는 불을 생각한다. 때로는 말같지도 않은 화력을 자랑하는 이 불은 결코 유전자 풀 따위에서 오지 않았다는 것을, 내가 어릴 때 부터 갈망하던 이야기의 숲에서, 누군가가 지펴 준 불씨에서 온 것이라는 것을. 나는 내 안에 타는 불을 생의 등불로 삼아, 이를 평생 지켜나가며 온전히 다 태우며 살아가리라는 것을. 그런 것은, 유전자와도, 그런 전씨네 사정들과도 아무 상관 없을 것이다. 없어야 하고.
우리들 하나하나를 총알 하나로 정말로 완전히 세상에서 없애버릴 수도 있다면, 이런저런 이야기를 쓴다는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으리라. – 민음사판 “데미안” 서문 중.
여튼 어젯밤에도, 지난 목금토 사흘 내내 준비한 행사가 하나 마무리가 되고, 그렇지 않아도 긴장이 풀렸다가 그 생각이 떠올라서 또 짓눌릴 뻔 했다. 사실은 뭔가 크고작은 성공의 순간에 본가에서 서운한 일들이 가장 아프게 떠오르는 법이다. 하지만 다행히 혼자가 아니었고, 그분이 내가 사로잡힌 것이 아상이라는 것을 확인해 주셨다. 나는 눈물 몇 방울을 떨어뜨리며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그것은 나와 상관없음을 확인하고, 자정이 넘어 컴퓨터를 끄고 앉아 십수 쪽에 걸쳐 낙서를 하며 내가 가진 불은 총알 하나로 세상에서 완전히 없애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기도 하고, 설령 총구를 들이댄다고 해도 내 손으로 꺼버릴 수도 없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기쁘고 괴로운 마음이 마치 종이 모서리에 살이 베이는 듯하던, 피가 쏟아지진 않아도 뭉근한 아픔이 계속 이어지는 밤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