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한국 만화가 이룩했던 그 모든 성취에 대해 “그분들은 불세출의 천재셨고 너희는 아님” 같은 식으로 넘어가면 그만임? 근데 의외로 정말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말함. 그 천재들이 어떻게 뭘 했는지 분석해서, 다음 세대는 가능하면 그 데이터와 지식을 갖추고 해외 진출용 스킬까지 손에 넣게 해 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수치심도 자존심도 없냐고. 과거의 천재들과는, 경쟁 안 할 거냐고?
“천재를 만나면 먼저 보내줘라, 정면승부 하지 말라”고 하신 분이 계십니다. 이현세 선생님이셨죠. (……) 그분은 “천재를 먼저 보내놓고 10년이든 20년이든 꾸준히 하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말을 한 사람이 역시 거장인 이현세 선생님이고, 20년씩 꾸준히 하라고 하신 건 기억 안 하지. 생각해 보라고. 그 20년이, 싸워나갈 용기도 없이 그냥 어영부영 떠내려가는 20년이겠느냐고. 과거의 천재들과 현재의 경쟁자들을 바라보며 죽도록 싸운 20년이겠지.

저기 제가 장난삼아 10년 전쯤에 만든, “지금 잠이 옵니까” 라고 부르는 표, 저거 보면서 무슨 생각이 들어요. 김혜린 선생님은 스물 한살에 북해의 별을 쓰셨네, 강경옥 선생님은 스물 두 살에 별빛속에를 쓰셨나보네, 역시 천재네, 우리는 다시 태어나는 게 빠르겠네 하고 열패감만 듭니까? “저분들은 천재니까 우리는 못 따라가고”같은 패배주의적인 말에 다같이 목을 매고 있었으면, 스물 다섯 살에 죽은 존 키츠의 시는 왜 연구를 하고, 스무 살에 죽은 갈루아의 수학은 왜 연구를 하겠으며, 김연아 키즈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았을 거라는 건 자명한데, 유독 이쪽에선 그런 식으로 그 말을 핑계로 삼는 비겁해 빠진 사람들만 잔뜩, 아주 잔뜩 봤었고.
나는 그게 정말 꼴같지도 않을 뿐.
(그런 말들에 계속 목을 매고 살 거면 산뜻하게 그냥 목을 매시든가.)
그래요, 얼마 전에도 “SF, 또는 텍스트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순정만화의 아이”라고 스스로를 설명해 온 나는 지금도 때때로 저 표를 들여다보면서, 스물 여섯 살의 권교정과 스물 일곱 살의 유시진과 서른 두 살의 김진을, 또는 서른 살의 권교정과 서른 세 살의 유시진과, 서른 일곱 살의 김진을 생각합니다. 대체 그 사람들은 그 때 무슨 꿈을 꾸고 무엇을 시작했을까. 어디까지를 바라보았던 것일까. 그래, 뭐 남들 보기에 나는 가망도 없겠지, Impossible Dream이겠지. 내가 이들을 이정표로 삼는다 해도, 내가 도착할 곳은 또 다른 곳이겠지. 근데 잡을 수 없는 별일지라도 힘껏 팔을 뻗을 게 아니면 대체 왜 여기 있겠어요. 응?
PS) 근데 다른 장르는 그렇지 않으냐, 고 하면 그것도 아님. 만화쪽에서보다야 덜 들었지만, 나는 몇년 전 김보영 작가님의 어떤 소설을 보면서 “내 감성으로 쓸 수 있는 분야는 아니긴 한데 좋았다, 언젠가 그런거 한번 써보고 싶네” 하고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하는데 그때도 다른 분이 “아니, 그분은 격이 다른 천재고.”소리를 해서 “어, 그래? 그럼 평생 저분은 천재고 난 아니니까 계속 여기만 있을까?” 하고 웃으면서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런 것 보면 되게 그 팬심, 에서 오는 패배주의가 따로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만화가 유난히 그게 더 눈에 띄는 걸 수도 있을 것 같지만, “오타쿠 장르” 전반의 문제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 생각도 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