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에 특별히 관심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을, 명문가 출신에 퍼블릭 스쿨을 졸업하고 정계에 입문한 하원의원인 벤자민 노엘은, 어느날 총리 헬렌 포츠의 부름을 받고 4대 부처 장관과 원내총무 등 쟁쟁한 사람들은 물론 하원 최연소 노동당수인 토마스 카디날까지 와 있는 자리에 동석한다. 헬렌 포츠는 노엘에게 젊고 아름다운 노동당수 토마스 카디날을 소개하고, 남녀 가리지 않고 수많은 사람들과,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잡지 않으며 섹스 파트너들을 갈아치웠던 노엘은 카디날과 함께 한 잔 하러 갔다가 다음날 아침 카디날의 집 침대에서 눈을 뜬다. 다음 날 아침 카디날이 아침을 준비하는 동안 신문을 가지러 나갔다가 일군의 기자 떼와 마주친다. 너무나 당황스러운 순간, 단 한컷의 굴욕 짤도 없다는 소문이 있을 만큼 완벽한 피사체인 카디날은 노엘을 품에 안아 얼굴을 가리며 집 안으로 끌어들이고, 이 장면은 전 영국을 뒤흔들어 놓는다. 인지도가 바닥에 가깝던 노엘은 이 사진과 함께 인지도가 급상승해 총리 자리를 노릴 만한 상황이 되고, 역시 노동당수로서 이 상황을 어떻게든 이용할 필요가 있었던 카디날은 “영국의 총리가 된 뒤 나와 공개적으로 연인이 되자.”고 제안한다.
한국 순정만화에서 정치를 다루는 작가는 드문데, 전작 “소녀교육헌장”에서(이 만화는 노무현 취임 직전에 연재되기 시작하여……) 주인공 원아미의 아빠를 젊고 유능한 원호찬 대통령으로 설정했던 임주연 작가는 이번에는 영국 정치를 소재로 BL을 쓰고 말았다……. 이지만 사실 이 만화가 나오기 전에도 트위터 등에서 피터 만델슨(우리에게는 멜라민 우유 파동 때 중국에 가서 보란듯이 우유를 마셨다가 신장결석으로 실려간 것으로 유명한 사람)과 고든 브라운 총리의 관계성 등에 열광하는 영(국정)치덕후들이 있었으니, 이 만화의 폭풍처럼 몰아치는 첫 화를 보고도 “난생 처음 보는 것이 온다”기보다는 뭔가 “올 것이 왔구나”하는 느낌이 들었다.
(사실 이 만화가 나오기 전에 나는 “리베르떼”의 콘티를 끝까지 미리 짜 놓은 상태에서 한국정치 배경의 미중년 개그물 기획안을 이슈에 가져갔는데 고소당한다고 바로 거절당했음. 근데 그때도 “어디서 정치가 유행인지” 물어보신 것을 보면, 아마도 대프미가 먼저 기획이 들어가 있었을 것이다.)
동성애가 금기시되고, 커밍아웃한 사람을 보는 일이 극히 드물었던 2, 30년 전에 순정만화와 BL이 결정적으로 차별화되던 지점 중 하나는, 동성간의 사랑이 받아들여지지 않던 시대에, BL이 “불가능을 넘어서는 사랑 이야기”를 다루었던 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시대가 바뀌어 “동성간의 사랑”이라는 것만으로는 다소 험난하긴 해도 불가능한 상황 까지는 아니게 되었다. 오히려 지금은 “아무리 조건이 좋더라도 우파 남성과 사귈 수 없다”는 것과 같은, 사상의 차이, 정치 성향의 차이가 더욱 불가능한 상황에 가까워졌다. 임주연은 정치적인 입장의 차이, 즉 양보할 수 없는 사상의 차이 정도를 넘어, 아예 그 정치적인 입장을 각각 대표하고, 성장 배경도 정치 데뷔 과정도 아주 다른 사람들- 토리 총리와 노동당수 -이 불가항력적인 (육체적) 이끌림으로 시작해서 계약연애와 험난한 정치적인 상황들을 넘어 불가능해보이는 사랑에 빠지고 결합하는 과정을 다룬다. 헬렌 포츠의 지명을 받은 “후계자”로 총리가 된 노엘과 달리, 아직 성년이 되기도 전인 소년시절, 학교를 그만두고 도망쳐 도달한 마을에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일을 조율하고 서로 도울 방법을 찾으며, 그야말로 풀뿌리 민주주의를 체화하며, 노동당에 사람들의 민의를 전하기 위해 출마하고, 노동당 의원이 되고, 삼십대 중반에 노동당수가 된 토마스 카디날에게 있어 총리의 자리는 언젠가 도달해, 자신과 노동당을 지지해 준 사람들의 이상을 관철하기 위한 통로다. 이 과정에서 다우닝가 10번지의 대문과 그 안의 침대는, 불안정하고 불가능해보이는 두 사람의 관계이자 카디날의 정치가 도달해야 할 목표로서 기능한다. 이야기 전반에서 불가능한 사랑을 넘어서고자 하는 의지와 영문학 고전에서 온 모티브들이 여기저기 엿보이는 이 이야기는 기본적으로는 노엘과 카디날을 중심으로 하고 있지만, 보수당 총리 헬렌 포츠와 자유롭고 악명높던 저널리스트 에린 카디날의 관계, 헬렌의 측근인 베아트릭스, 노엘의 비서인 류 등등 여러 강하고 지적이며 대립할 것 같으면서도 서로 친구가 될 수 있었던 여성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언제나 무섭도록 총명하고 눈부시고 강인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써 오던 작가의 스타일 그대로다.
그리고 마지막에, 6년 뒤 총리가 된 토마스 카디날의 모습이 나오는데…… 앞머리숱이 약간 줄고 노안경을 썼지만 1권보다 더욱 잘생겨졌다. 세상에.
PS) 어쨌든 배우자와 대프미 완결났다는 이야기를 하던 중에 우리집 어린이가 “대체 무슨 이야기야?”하고 물었을 때 나는 한참 고민하다가 “그러니까……. 예를 들자면 이재명하고 한동훈이 사귀는 이야기야.”라고 대답해 버리긴 했는데. (먼산)
PS2) 연재가 시작될 무렵에는 토리 총리와 노동당수의 사랑이라니 무슨 김무성 문재인 사귀는 소리냐는 말이 나오던 이 만화는, 연재가 막바지에 접어들던 지난 11월 말, 엡스타인의 메일에서 트럼프가 빌 클린턴과 부적절한 관계를 가졌고 그 증거 사진을 푸틴이 갖고 있다는 내용이 나왔다는 소식과 함께 다시 한번 현실 정치를 예언했느냐는 말을 들었지만……. 다만 작가님도 이런 상황까지는 원하지 않으셨을 것 같다. 대체 누가 트럼프와 빌 클린턴의 부적절한 관계 따위를 원하겠는가. (먼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