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건 싫건, 나의 시대 : 조지 오웰의 에세이와 리뷰 – 조지 오웰, 안병률, 북인더갭

나쁜 책을 좋은 책으로 둔갑시키는 원죄에 한번 발을 들여놓으면 빠져 나갈 길이 없다. 하지만 생계를 위한 서평을 쓰려면 그런 죄를 지어야만 한다.

조지 오웰의 에세이와 리뷰 중 한국에 소개되지 않았거나 지금은 찾기 힘든, 그리고 지금 시대에 읽어도 손색이 없는 글을 편역해 모은 책인데, 그 바로 두 번째 글에서 이런 대목을 발견했다. 물론 이 책에 소개된 서평들은 이런 기준에 걸리지 않을, 지금 읽어도 대부분은 납득할 만한 책에 붙은 것이었고, 주례사처럼 칭찬만 열거하는 서평도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이건 뭐지, “영국식 농담” 같은 건가, 하고 좀 낄낄거릴 만 한 대목이 아니었나 싶다. 사실 초반에 웃느라 집중 못 한 대목은 하나 더 있다.

‘왓슨 박사의 연애 생활’같은 외국 비평으로 미루어 볼 때 외국 문학의 완벽한 이해난 거의 불가능함을 알 수 있다.

주석에 의하면 이 왓슨 박사는 우리가 아는 그 존 H. 왓슨이 맞다. 번역가는 “작품의 조연에 불과한 인물의 연애까지 캐내는 과한 비평을 풍자적으로 언급한 것”이라고 주석을 달았지만, 21세기의 덕후인 내 눈에는 “20세기에도 덕후들은 자기 최애에 대해 이렇게 행간에 지나가는 연애사까지 캐내며 심도있는 덕질을 했구나!!!!”로 보이는 것이다. 이런 해석을 조지 오웰이 봤다면 뒷목을 잡고 넘어가겠지.

도서관에 갔다가 이 책을 바로 빌려 나온 이유 중 하나는 이서영 작가다. 얼마 전 결혼한 이서영 작가는 카탈루냐에 가서 조지 오웰 광장을 찾아 헤매고, 남의 나라에 가서도 집회에 가고, 그 와중에 “카탈루냐 안티 파시스타!!!” 같은 구호도 외쳤다면서 신혼여행 썰을 풀어 주었는데, 여기 이어 블로그에 “이건 돈 내고 읽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의 자세하고 신나는 신혼여행기도 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카탈루냐에 갔다는 말에 “카탈로니아 찬가”를 떠올렸고, 다시 조지 오웰을 읽어야 할 것 같았고, 그런데 도서관에 갔더니 이 책이 신간 코너에 딱 있네…… 뭐 그런 생각의 흐름 끝에 읽었다는 것.

예이츠에 대해서는 “이니스프리 호수섬” 정도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런 대목이 나와서 잠깐 멈춰서 생각을 했다.

정치적 용어로 옮기자면 예이츠의 경향은 파시스트다. 대부분의 생애 동안, 그리고 파시즘이라는 말이 떠돌기 훨씬 전부터 예이츠는 귀족적인 길을 따라서 파시즘에 도달한 사람들의 세계관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는 민주주의, 현대 세계, 과학, 기계, 진보의 개녀므, 무엇보다 인간 평등 같은 개념을 아주 싫어했다.

“이니스프리 호수섬”은 고향을 그리워하는 정서나 안빈낙도 같은 것을 말한다고 생각했는데, 이거 혹시 마리 앙투아네트의 쁘띠 트리아농 같은 거였냐고. (……) 그런 것을 오웰은 “서구 문명에 대한 혐오와 청동기시대 또는 중세시대로 돌아가려는 열망”이자 “무지를 찬양”하는 것이고, “원시적이고 좀 더 위계적인 시대에 대한 열망”이라 설명한다. 여기에 더해 “시인 예이츠는 파시즘이 불의임을 단번에 알아보았고 바로 그런 이유로 파시즘을 칭송한다”며 예이츠 본인의 글이 인용된다.

가장 완벽한 형태의 귀족 문명, 모든 삶의 세부에 적용되는 위계, 위대한 인물의 문앞에 새벽부터 모야드는 탄원자들, 모든 곳에서 소수의 손아귀에 집중된 거대한 부, 모두가 소수에 의지하는 곳, 신인 황제 자신조차 더 위대한 신에게 의지하는 곳, 또한 법원, 가정 어디서나 불평등이 법인 곳.

아니 이런.

이 글을 읽고 난 이상, “안빈낙도”에 대한 다른 글들에 대해서도 한번씩은 다시 의심해 봐야 하는 게 아닐까 싶어졌다.

지금 바로 이 시기에, 복잡한 마음으로 읽은 글은 “영국의 반유대주의”였다. 영국 내의, 폭력적이진 않지만 악의를 수반한 채 만연하고 있었던 유대인 차별과 반유대주의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이에 대해 뭔가 죄스럽고 수치스러우며 문명인이라면 품지 말아야 할 감정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에 대해서. 지금 이 시대에 중국인 혐오를 조장하며 명동에서 시위를 하고 있는 극우세력들에 대해, 또 그 영국이 팔레스타인 땅을 쪼개어 유대인 시오니스트들의 나라로 만들어, 결과적으로 이 모든 학살의 시작이 되었던 것에 대해.

그러므로 반유대주의 연구의 출발점은 “왜 이런 명백히 비이성적인 믿음이 사람들을 매려시킬까?가 아니라, “왜 반유대주의는 나를 매료시킬까? 내가 그것에서 진실로 느끼는 바는 무엇일까?가 되어야 한다. 이런 질문을 단진다면 적어도 우리 스스로가 행한 합리화를 발견할 것이고 그 아래 무엇이 있는지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오웰의 이 글은, 세월이 지난 지금은 “반유대주의”가 아니라 “혐오 전반” 에 대한 것으로 다시 읽어야 할 것이다. 동시에, 시오니스트가 아닌 유대인들, 전쟁에 반대하고, 가자에서 벌어지는 학살에 반대하고, 네타냐후에 반대하는 유대인들에 대해서도 더 이야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세계가 이 학살을 지켜보고, 관심을 갖고 반대하고 막으려 한다는 것을 계속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나아가 가자에서의 학살 뿐 아니라, 극우들의 혐중시위, 그리고 이 나라 안에서 벌어지는 보편적인 차별에 대해서도 더 이야기를 해야 할 것이다.

PS) 헨리 밀러의 “북회귀선”에 대한 리뷰가 실려 있어서 깜짝 놀랐다. 1990년쯤에 신문 광고로 “무삭제 완역판”이라며, 표지에 토플리스 상태의 여성이 그려진 책 광고가 신문에 자주 실렸었다 보니, 북회귀선이 그렇게 오래 된 소설일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니까 1935년에 나온 책이, 1990년쯤에야 “무삭제 완역판”으로 들어왔던 거다.

PS) “프로파간다와 대중 연설”이라는 글을 읽는데, 중간의 구어체 선동에 대한 대목에서 약간 경남 사투리를 쓰는 남자 목소리로 누군가 읽는 듯한 느낌을 받으면서 읽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정보라 작가님 부군이신 임순광 선생님 목소리로 뇌내 재생하며 읽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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