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묘한 메모의 묘미 – 김중혁, 유유

지난 번 도서전에서 보고 일단 표지가 마음에 든다고 생각했다. 휘갈겨 쓴, 아마도 저자 본인의 메모일 듯한 메모가 대비가 낮게 색이 변환되어 바탕에 깔려 있고, 그 위에 메모지처럼 흰 네모칸이 놓여 있다. 여기에 ‘ㅁ’ㅣ묘한 ‘ㅁ’ㅔ모의 ‘ㅁ’ㅛ미. 미음(ㅁ)으로 시작하는 세 단어를 앞에 배치한 제목이 줄 맞춰 들어가 있다. 저자의 이름도, “시작은 언제나 메모였다”는 부제도 모두 흰 네모 안에 들어가 있다. 이 모두가 요만한 메모지에서 출발했다는 웅변같았다. 책을 바로 사 왔던 것도 표지가 마음에 들어서였던 것 같다.

사실 여기 나오는 다양한 메모의 방법들 중 대부분은 나도 하고 있는 일들이고, 어지간한 메모나 시간관리, 노트정리 책자를 봐도 대부분은 아는 내용이다. 새로울 것은 없다. 하지만 이 책을 굳이 읽고 있는 것은 대부분의 메모, 시간관리, 노트정리 관련 책이 효율성에 대한 이야기이고, 아이디어 발상이라는 것도 창작와는 좀 다른 계열의 것이다 보니, 창작자의 메모 책을 좀 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참고로 내가 20년 전에 읽고 아직도 때때로 읽는 메모 책은 니시무라 아키라의 “CEO의 다이어리엔 뭔가 비밀이 있다”라는 얇은 책이다. 이 책은 한 번 집에서 잃어버렸다가 다시 구입해서 지금 우리 집에 두 권 있는데, 여전히 번갈아가며(그리고 집 안에서 번갈아 잃어버리며) 한번씩 보곤 한다. 메모나 다이어리 쓰기에 필요한 대부분은 그 책에서 배웠던 것 같고, 일부는 프랭클린 플래너를 몇년간 쓰면서 습관을 들인 면도 있지만, 본질적으로 그 책이나 그 시스템은 효율성에 대한 것이고…… 창작의 메모는 그보다는 좀 더 감성적이고 내밀하고 때로는 고약한 면도 있으며, 남들이 보기에는 비효율적이더라도 내키는 대로 꾸미거나 배치하며 비주얼을 강조하고 때로는 굳이 페이지를 넘기지 않고 손톱만한 틈에 깨알같은 글씨로 이어서 적어가며 자기 생각을 파들어가는 부분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회사에서 쓰는 업무일지와 내가 갖고 다니는 A5사이즈의 노트들만 비교해 봐도 그런 점이 있다. 물론 사람마다 그 파들어가는 정도는 다르고, 내 경우는 어느정도 파들어가면 그 뒤의 생각은 컴퓨터 모니터에 워드프로세서를 띄워놓고 정리하는 쪽이지만……

“1초 영상 프로젝트” 같은 것은 아직 안 해 봤지만 추가로 해 볼 만 한 것 같다. 칠판은 전에 선생님께서 주신 중간 사이즈 칠판이 있고 바로 이런 목적으로 쓰려고 했지만 우리집 어린이들이 차지하고 말았고. (오열) 카드로 메모하는 대목을 보면서, 예전에는 A7 사이즈 카드에 이것저것 메모하기도 했는데 어린이들이 크면서 못 하고 있지, 하는 생각이 잠깐 났다. 결국은 제본된 노트에 쓰고 있는데, 생각해 보니 나는 고등학생때도 연습장 만화의 설정을 학교 앞에서 팔던 A6 사이즈 노트에 적고 있었지……. 해 봤던 메모법과 아직 해 보지 않은 메모법과, 예전에 했지만 지금은 못 하는 방식들에 대해, 어떻게 적용하고 어떻게 버릴 것인가에 대해 이것저것 생각하며 읽을 수 있어서 즐거웠다.

한편 벌써 10월 하순인데, 전에는 새해 다이어리를 12월 초쯤 샀던 것 같다. 빨라야 11월 하순이었고.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점점 빨라져 10월 말만 되어도 새해 다이어리가 나오네, 했는데. 일본에서는 9월만 되어도 내년 다이어리가 쏟아져 나온다. 유명한 호보니치 테쵸 같은 건 8월 중순부터 신년 다이어리 카운트다운에 들어간다. (그래서 일본에 놀러갔다가 로프트에서, 아직 추석도 안 되었는데 새해 다이어리가 나온 것을 보고 놀란 적도 있었다. 12월에 갔을 때에는 원하는 제품을 못 구한 적도 있고.) 그러더니 요즘은 우리나라 문구 브랜드들도, 양지나 모닝글로리같이 역사와 전통의 업체도 10월 말, 디자인 문구류는 9월 말이면 새해 제품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다이어리를 여러 권 쓰는 사람들도 많이 늘었다. 내 경우는 호보니치 테쵸를 쓸 때에는 한 권+메모장 한 권 정도로 썼다. 월간+버티컬 주간+1일 1면 형태로 구성되어 있어서 어지간히 쓸 게 많은 날이 아니면 메모량을 대충 커버할 수 있었으니까. 근데 이토이 시게사토가 마음에 안 들어서+토모에 리버 용지의 촉감도 바뀌었다고 해서 결국은 호보니치를 더 안 쓰게 되었고. 지금은 로이텀 노트나 국산 브랜드의 A5 노트들을 번갈아가며 써 보고 있다. 줄지(ruled)만 아니면, 모눈이나 백지나 상관없이. 요즘은 일정은 따로 한 권을 쓰고, 손으로 하는 메모는 현재 쓰는 노트에 시계열순으로 모으고, 그밖에는 구글 킵이나 노션 등을 쓰고 있다. 이 책을 산 것은 지난 도서전 때였는데, 리뷰를 지금 쓰고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내년에 쓸 노트들을 고르다가 뒤늦게 생각이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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