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 어제 플라뇌즈 페잇퍼에서, 김보영 작가님의 “지구의 하늘에는 별이 빛나고 있다” 낭독 듣다가.
처음에 그 단편을 읽었을 때는 지구가 아닌, 지구와 다른 어떤 세계에 대한 밀도높은 묘사에 대해, 놀라움과 함께, 슬픔을 느꼈다. 그건 오노 후유미의 “마성의 아이(제목은 이따위이지만 사실 뿔을 잘리고 인간 세계에 떨어진 타이키의 ‘이곳은 나에게 맞지 않는다’는 슬픔에 대한 책)”를 읽었을 때의 슬픔과 쓸쓸함, 자신을 붙잡아주는 중력이 없는 것 같은 사람의 고통,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괴로움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내 집에도 내 자리가 없는 사람의 괴로움, 나를 숨겨주는 낡은 애착이불 하나만이 나를 편안하게 만들어 주는데 가족들은 그걸 내다 버리고 싶어하거나 말도 안 하고 내다버릴 때의 슬픔 같은 것. 사실 아주 조금만 달라도 고립되는 이 세계에서, 돌아갈 고향별이 없는 것 같은 그 슬픔과 고통은 매우 익숙한 것이었다.
그 소설을 읽은 건 한두 번이 아닌데, 목소리로 들은 것은 처음이었고. 목소리로 들려오는 이야기에서 느껴지는 것은 슬픔이 아니라 그리움이어서 조금 당황했다. 그건 분명히 다른 정서여서. 그 차이가 어디에서 올까 하고 생각하다가 문득, 작가님은 이제 “나에게 맞지 않는 세계”와 동시에, 나를 편안하게 붙잡아주는 세계도 갖고 계시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 한 문장에서 시작하여 어딘가에 나에게 맞는 그곳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추론을 하는 것이 아닌, 그곳이 존재한다는 확신. 그 생각을 하다가 앞쪽을 보니, 작가님과 똑같은 티셔츠(장애인 인권영화제 티셔츠였던 것 같다)를 입은 작가님의 짝 되신 분이 계셨고, 문득 조용필의 “바람의 노래”에서 “이 모든 해답이 사랑이라면.” 이라는 구절이 잠시 떠올랐다. 우리는 그렇게 저마다의 중력을 찾아 함께 돌며 살아갈 수 있는 별과 같은 사람들을 그리워하고, 기적처럼 만나게 된다면 그곳을 돌아갈 고향별로 두는 거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