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녹주 작가님은 글을 잘 쓰는데, 글 하나하나가 페이지를 넘기다가 손가락이 베일 것 처럼 예리한 대신 작업 속도는 썩 빠르진 않은 편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잘 쓰는 사람이 첫 개인 소설집이 이제야 나온 것도, 건강 문제도 있겠지만 단편 하나하나에 날을 세우듯이 다듬고 갈아대다 보니 그런 것도 있을 것 같다.
좋아서 몇 번이나 계속 읽었던 것은 예전에 어느 문예지에 실렸던 ‘어머니의 도원향’. 작은 테라리움부터 시스템 속 거대한 가상공간까지, 천재적인 가상세계 제작자였던 어머니는 도박과 술독에 빠지며 이상현상을 보이다가 끝내 집에 불까지 지르고 사라진다. 그리고 어머니가 남긴 편지를 통해, 어머니가 읽던 시경을 상고한어로 읽는 방식의 인증을 거쳐서, 소원은 가상세계 속 어머니를와 현실과 닮았지만 다른 어머니의 가족들(아버지와 소원)을 만난다.
어머니의 도박 중독은 우연하고 예기치 않게 시작되었다. 친척끼리 심심풀이로 들른 카지노에서 대박이 터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기 부모에게까지 인연을 끊겼다. 보다 못한 아버지가 개입해서 치료를 권했다. 나는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앞으로는 양가 조부모를 만나지 못한다기에 아쉬울 뿐이었다.
어머니는 도박을 끊기 무섭게 술독에 빠졌다. 폭력과 사과가 예사로 반복됐다.어머니는 대낮에 유리창을 깼고 한밤에 비명을 질렀으며 끝내 집에 불을 질렀다. 불길은 어머니와 아버지가 함께 세운 둥지를 삽시간에 무너뜨렸다.
천재적인 두뇌와 세계를 이해하는 깊은 해상도로 가상세계를 만들던 어먼는 현실에 없는 이상을 극한까지 추구한 끝에, 조현병적인 증상을 보이고 각종 중독에 심각하게 빠져든 사람이다. 소원은 그 이름부터, 어머니와 아버지의 깊은 사랑과 기대를 안고 태어난 사람이지만, 그는 어릴 때 부터 호르몬 시술을 받아오던 트랜스젠더였다. 어머니의 도원향 속에서 소원은 트랜지션 전의, 어린 여자아이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물론 그 모습은 어머니가 어린 소원을 보며 기대했던 모습이고, 소원은 그 모습을 보며 어머니는 자신이 남성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음을 떠올린다. 하지만 어머니가 남긴 편지 속에서 어머니는 소원을 시경에 나오는 교동, 야살궂은 사내에 비유함으로써 소원이 아들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듯 보인다. (물론 교동의 동은 아이 동 자인데, 시의 맥락상 자신이 짝사랑하는 사랑스러운 남자, 그 남자 때문에 나는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자네 하는 시다.) 그리고 이제 소원은 상고한어라는 낯선 말과 글을 통해, 시경이 그리는 세계를 통해, 그리고 낯선 것에 대한 배움을 통해 어머니를 이해하고 다가서려 한다. 그리고 그렇게 다가선 소원에게 어머니는 “아들.”하고 불러준다. 살아서 만났을 때는 하지 못했던 다정한 말들은, 어머니가 꿈꾸었던 해상도 높은 이상향 속에서 나직하게 들려온다.
‘그 사람은 죄가 없어요’와 ‘화엄사 들매화는 끝내 흐드러지고’, ‘지속 가능한 사랑’ 이 세 작품은 같은 카테고리로 묶을 수 있을 것 같다. 사랑 이야기라는. 물론 그 사랑이 본인이 생각하기에는 헌신적이지만 남들이 생각하기에는 기이한 방식으로 남성을 사랑하는 여성의 이야기로 압축되긴 하지만. 성공한 도시락 사업가가 살인범을 사랑하게 되었든, 아기가 돌도 안 되었을 때 출가한 남편을 따라 절집 공양주 보살이 되었든, 법조인을 스토킹하든. 이들의 사랑은 본인 기준으로는 헌신적이고 지고지순할지 몰라도, 남자 본인이 야비한 인간이어서, 또는 애초에 이 관계가 남성 입장에서는 범죄에 시달리는 상황이어서 보답받기엔 애저녁에 글렀다 싶은 관계들이다. 스님이 된 아버지가 “수행자가 아무리 애써도 공양주 공덕은 그 세 배”라고 말한들 그게 어머니의 고생을 보상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한편으로는 ‘화엄사 들매화는 끝내 흐드러지고’의 선재는 기념수목보전위원회 소속, ‘좀비 정국에 올리는 편지’에서 주인공 재서는 국회 비서관, 큰엄마 응우옌은 여당 당대표, ‘지속 가능한 사랑’의 주인공 예람은 여당 의원실 비서이고, 그는 제주에서는 판사를, 지금은 판사 출신 국회의원을 사랑한다. 연속으로 이런 직종들이 보이는 것이 흥미롭다. (사실 국회 비서관이나 대통령 직속 무슨 위원회 소속 공무원이 흔한 직업은 아니기도 하고.)
(그렇게 국회와 관련된 인물들이 자꾸 나오다 보니, ‘화엄사 들매화는 끝내 흐드러지고’를 읽다가 문득 이준석이 칠불사에 홍매화 갖다심은 뉴스가 떠올라서 잠시 고통)
그리고 전에 문녹주 작가님이 백설공주 이야기를 새로 쓴 단편을 보여 준 적이 있는데, ‘지속 가능한 사랑’의 딸과 어머니와 딸의 관계에서 그 소설 생각이 잠깐 났다. 물론 그 관계의 형태는 다르지만.
다들 왜 그렇게 필사적으로 좀비를 막았느냐는 제 물음에 언니는 너무나 태연하게 대답했습니다. 쌀을 지키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밥은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사람들 입에 들어갈 쌀을 지키고 있었다고요.
‘좀비 정국에 올리는 편지’는 짧지만 이미지가 강렬하게 떠오르는 소설인데, 저 대목에서 잠시 멈추어서 생각을 많이 했고. 맨 첫 작품인 ‘누가 가장 불쌍한가?’ 이야기를 안 했는데, 매우 현실적인데 그러다보니 현실에서 봐도 지긋지긋한 인간군상들이 참으로 해상도가 높게 들어가 있어서 떠올리며 리뷰를 쓰기도 싫어졌다.
그렇네, 전체적으로 해상도가 높은 책이다. ‘어머니의 도원향’ 속 가상현실들처럼. (그런데다 상고한어 몰라도 끝까지 읽을 수 있으니 가상현실보다 세 배 더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