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의 집 – 정보라, 열림원

어린아이, 특히 학대당하는 어린아이라는 측면에서는 지난번 읽었던 “고통에 관하여” 와도 상통하는 부분이 있는데, “고통에 관하여”가 결말에는 사랑을 말하고 있음에도 그들이 어린 시절 학대를 당하거나 고통받던 이야기들을 읽는 것이 너무나 손에 잡힐 것 처럼 생생하여 사뭇 괴로웠던 것과 달리, 이번 소설은 아이들이 당하는 고통을 다루면서도 그보다 훨씬 따뜻하고 다정하다. 정보라 작가님이 갑자기 힐링물을 써보기로 결심한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만큼. (물론 이 소설은 힐링물이 아니다. 내가 느끼기에 따뜻했다는 거다.)

성인인 시민은 누구나 한달에 하루, 돌봄 의무를 이행해야 하는 세계, 신생아 거주환경 조사관인 무정형은 자신의 양육보호의무 일정에 친구인 정사각형이 일하는 “아이들의 집”에서 아이들을 돌본다. 어느날 무정형이 담당하던 집에서 미라처럼 변한 색종이라는 시신이 발견되는데, 색종이는 정사각형이 일하는 “아이들의 집”에서 종종 양육되던 아이였다. 이것은 이 소설의 세계관에서는 정말 기이한 일이다. 한 아이를 키우는 데 마을 하나가 필요하듯, 마을의 중심에는 “아이들의 집”이 있고, 모든 돌봄은 국가와 공동체가 책임지는 이 세계에서는 양육자가 일할 때만 아이를 맡기는 것이 아니라, 아예 아이를 “아이들의 집”에 맡기는 경우도 많다. 양육 선생님들들은 아이들을 키우고 돌보고 아프거나 다쳤을 때 병원에 데려가며 키운다. 그런데도 색종이의 엄마는 굳이 아이를 집에 데려가서, 뇌를 자극하여 똑똑하게 만든다는 클리닉에 데려갔다가 아이를 죽게 만들었고, 아이의 아빠라고 주장하는 남자는 국가가 지급하는 피해자 보호 보상금을 내놓으라며 나타난다.

색종이가 죽은 집은 빈 집이 된다. 하지만 “기술과학의 발전을 지지한다”며 여성의 개입 없이 아이를 출산하겠다는 단체와 이 단체가 완전히 인공적으로 태어났다고 주장하는 아이가 발견되는데, 국가는 아이의 양육을 이 단체가 아닌, 국가가 해야 한다고 판정하고 양육 선생님을 배정한다. 하지만 이 지역에 그 아이에게 거주지로 배정할 만한 곳은 최근에 색종이가 죽은 집 밖에 없었고, 집을 점검하러 갔던 무정형은 이 곳에서 푸른 얼굴의 귀신 같은 것을 목격한다. 여기에 더해 무정형은 “어린 사람들의 행복을 지지하는 모임”의 웹사이트에서, 자신이 처음 조사관이 되었을 때 갔던 흉가의 모습을 발견한다.

여기에, 해외로 입양되었고, 그곳에서 만나 가족이 된 관과 표가 있다. 이들은 입양되어 간 국가에서 불법 이민자 강제 추방이 벌어지자, 이를 막기 위해 서둘러 결혼했다. 상대에게 국적을 주고 한숨 돌리자마자 동성결혼을 불법화하려는 움직임이 벌어졌고, 관은 자신들이 온 나라에서는 생물학적 부모가 그 나라 국적을 갖고 있으면 자식이 자동적으로 국적을 얻을 수 있다며, 혹시 이곳에서 삶의 터전을 잃더라도 돌아갈 수 있는 곳을 만들기 위해 원부모를 찾아 돌아온다.

사실 이 책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은, 가만히 읽다 보면 “아, 그 이야기구나.” 할 만한 이야기들이다. 부분부분 자르면 그렇다. 이를테면 전쟁 이후 1980년대까지 수많은 아기들을 돈을 받고 해외로 팔아치우던 홀트(공식적으로는 비영리단체였으나 기부금 형태로 아이를 팔아치운 곳이다) 같은 곳이 그렇다. 백인 양부모가 유색인종 아이를 입양해 노예처럼 부리거나, 성적으로 학대하거나, 제대로 교육을 시키지 않고 시민권도 받기 어렵게 만들어 버리는 경우도 적지 않았는데도, 그들은 금전적 이익을 위해 아기들을 팔아치웠다. 친권자가 없거나 친부모가 버린 고아들 뿐만이 아니었다. 부모가 어떤 사정으로 잠시 고아원에 맡긴 아이들도 서류를 위조해 고아로 만들어서 입양보내고, 미아도 같은 식으로 처리했다. 고아원에서 보조금을 받기 위해 친부모가 있는 아이를 납치해다가 아이들 머릿수를 채워 놓고 집에 돌려보내지 않는다는 이야기들도 있었다. 이건 말이 좋아 해외 입양이지, 거의 인신매매다.

뇌에 자극을 주어 학습 능력을 높이겠다거나 하는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뇌의 특정 부분에 전기 자극을 주면 수학 문제를 더 빨리 풀 수 있더라는 이야기다. 물론 짧은 시간 동안 전기 자극을 주어 신경전달물질의 교란을 리셋하는 식으로 우울증에 도움을 주는 치료법이 있기도 하지만, ADHD 약도 “공부 잘 하는 약”으로 팔리고, 카페인 젤리가 “공부 잘 하는 젤리”, “잠 안 자는 젤리”가 되어 팔리는 나라에서 저런 게 멀쩡한 용도로 사용될 리 없긴 하지. 아동 학대에 대한 이야기들도 그렇다. 특히 이 아동학대 부분은 “고통에 관하여”를 떠올리게 하는 부분도 있다.

“가끔 보면 좀 다른 방향에서 비정상적인 양육자를 만날 때도 있다는 거야. 예를 들면 상황이 자기 마음대로 돌아가지 않으니까 양육자가 아이 탓을 하는 거지. 아이가 정말로 괴로워하고 힘들어하는데, 양육자는 아이가 나를 골탕 먹이기 위해서 일부러 괴로운 척한다, 나를 조종해서 자기를 떠받들게 만들기 위해서 힘든 척하고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야.”
(중략)
“아이는 그냥 아이를 생각을 못 하는 거지. 아이가 어른처럼 똑똑하고 영악해서 어른을 이겨 먹으려고 항상 이런저런 꾀를 쓰고 있으니까 나는 거기에 넘어가지 않고 아이를 혼내서 어른 무서운 걸 알게 해 줘야 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양육자들도 있어. 아이가 오로지 자기를 괴롭히고 자기 인생을 망치려고 존재하는 무슨 괴물인 양 피해망상 비슷하게 생각하는 양육자도 있고.”

그리고 이런 이야기들을 읽다 보면, 과연 부모의 슬하에서 자라는 것만이 행복일까, 아이들이 충분히 사랑받고 교감할 수 있다면, 아이들의 집에서 자라는 게 더 행복할 아이들도 얼마든지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어릴 때는 분명, 북한에서는 여자들도 전부 일하러 나가느라 아이들이 탁아소에서 자라고, 그래서 매우 불행하다는 식으로 배웠는데. 그로부터 2, 30년이 지난 지금, 한국의 수많은 맞벌이 양육자와 싱글 페어런트들은 어린이집 덕분에 일을 할 수 있고……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종일 일하고 퇴근하자마자 아이를 데리고 집에 가서 집안일을 하고, 주말에도 어른 둘이 힘을 합쳐도 하루에서 하루 반나절 정도는 꼬박 집안일을 해야 유지가 되는 게 일상이다 보니, 다들 지치고 힘들고 아이들에게 좋은 모습만 보여주지 못하는 것도 현실이다. (그래서 태권도 관장님은 분기에 한번 정도씩 주말 저녁때 아이들을 태권도장에서 자고 가게 해 주시는데, 정말 관장님의 은혜가 하늘같아서 내가 애를 키우고 산다…… 그 분기에 단 하루 저녁의 여유 덕분에 급한 일들을 어떻게든 해치우기도 하고, 정말 발등의 불처럼 급한 일이 아니라면 때로는 부부가 같이 영화라도 보고 올 수 있는 것 아닌가.) 게다가 내 경우는 둘째를 낳을 때, 아무리 알아보고 통사정을 해도 첫째를 맡길 곳이 없어서 염치불고하고 선생님…… 내가 존경해 마지않는 모 작가님 댁에 첫째를 맡겨놓고 분만실에 들어갔던 일도 있었는데. 만약 이런 “아이들의 집”이 있다면, 평소에는 학교 끝나고 “아이들의 집”에 갔다가 퇴근할 때 데려오고, 한달에 한두 번 정도 정말 급할 때는 안심하고 아이를 맡기기도 하고, 적어도 아이 낳으러 들어가기 직전까지 큰애를 어디다 맡겨야 할 지 몰라 쩔쩔 매며 뛰어다니진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을 했다.

한편으로는 또, 당장 양육자가 아이를 돌볼 수 없는 가정이나, 양육자가 폭력을 휘두르거나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경우에도, 이런 “아이들의 집”에서 보호받는 것이 더 행복할 텐데, 아이가 제 발로 찾아가 보호를 요청할 수도 있지 않을까, 몇 살까지 돌봄을 받을 수 있는 걸까, 하면서 이야기 속의 시설에 대해 계속 생각했다. 대놓고 구타하고 폭력을 휘두르고 성범죄가 벌어지지 않더라도, 불행한 아이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고통스럽고, 그럴 때 어릴때 다녔던 어린이집같은, 그러나 아직 “아이”라 불릴 수 있는 동안에는 언제든 도망쳐서 숨어있을 수 있는 어딘가가 있었다면. 그랬다면 조금은 더 낫지 않았을까. 여성의 개입 없이 아이를 만들겠다는, 그래서 그렇게 만들어낸 보호자 없는 아이를 수출할 생각이나 하는 단체도, 아이를 “어린이의 집”이라는 행정적 보호 아래 두는 게 아니라 학대를 할 지언정 “부모 손에” 자라는 게 더 낫다는 식으로 주장하는 자들도, 이 이야기 속에서는 아이들 본인의 행복과는 관심없는 자들로 묘사된다.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은, “아이들의 집”의 어른들과, 자기 아이를 낳아 기르진 않았지만 기꺼운 마음으로 양육보호일정에 참가하고, 때로는 너무나 고통스러운 날 자신이 양육보호를 가는 아이들의 집에서 마치 보호받아야 하는 아이처럼 몸을 웅크리는 무정형에게서 더 찾아볼 수 있다.

백주를 마시면서 무정형은 우는 아기를 안고 달래 주었을 때의 따뜻한 무게와 병원으로 가는 길에 아이들이 왁자지껄 떠들던 소리, 파란 하늘과 차가운 바람,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삼각형과 경주하던 원통형 로봇 앨리스의 모습을 두서없이 떠올린다.
오늘은 좋은 날이었다고, 무정형은 맥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문득 생각했다. 정보라 작가님은 아마도 아이들을 만난다면 무정형처럼, 투덜거리면서도 아이들에게 해줘야 할 일을 하고, 무심한 것 같으면서도 가만히 아이들의 곁에 있고 싶어할 것 같다고. 다정하고 수줍은 분이니까 그럴 것 같다.

한편, 어린이의 집에 있는 로봇 앨리스의 대사들이 내 머릿속에서는 어쩐지 정보라 작가님의 말투로 들렸다. 삐릿삐릿. 앨리스의 대사를 읽으면서 계속, 작가님같은 목소리로 말하는 로봇이 있다면 무척, 귀여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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