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는 내내 웃었고, 초등학생 어린이들과도 같이 볼 수 있는 내용인데다 주역 걸그룹인 헌트릭스와 그들의 음악 자체가 IVE나 TWICE(트와이스는 일부 곡에 참여하기도 했다)를 연상하게 하는 면도 있어서 일단 가족이 함께 보기 좋은 애니메이션이었다. (12세 관람가이므로 보호자 지도 하에 함께 볼 수 있음) 20일 금요일에 공개되었으니 아마도 23일 월요일에 학교에 가면 이 애니메이션을 본 친구들이 꽤 많을지도.
보기 전에도 일단 까치호랑이가 귀여워서, 인형 안 나오나요 하고 모니터를 들여다봤는데. 이 까치도 눈이 세 개 달린 까치다. 새는 하늘과 땅을 잇는 사자요, 삼두매나 삼족오 등 3이 들어간 새는 신성한 존재인데, 눈이 세 개라니 그 자체로 신성한 새다. 진우와 함께 등장하긴 했지만 악령의 붉은 색을 띠지 않고, 마지막에 귀마를 물리치고 혼문을 펼친 뒤에도 버젓이 이 세상에 돌아다니는 것을 보면 이 호랑이와 까치는 악령이나 귀마와는 상관없는 존재, 오히려 노래의 힘으로 악령들을 물리쳐 온 무당과 그 후예인 퇴마 아이돌과 같은 선한 힘을 사용하는 존재일 것이다. 호랑이는 문자 그대로 아기여서 발이나 종아리가 통통하고 자기가 넘어뜨린 화분을 어쩔 줄 몰라 하는 순하고 약간 망충한 모습으로 나오고, 호랑이보다는 나이가 더 많고 총명한 까치는 호랑이의 하는 짓에 한숨을 쉬는 한편, 진우가 호랑이에게 만들어 준 갓을 빼앗아 쓰고 다닌다.
나온 장면만 다 합치면 10분도 안 될 까치호랑이 이야기만 자꾸 하고 있었는데, 그만큼 귀엽다. 여튼 본론으로 들어가면, 과거부터 노래의 힘으로 악령들과 싸울 수 있었던 세 여성들이 무당으로, 아이돌 가수로, 세대의 변화에 따라 그 모습을 달리하며 현대에 이른 과정을 순식간에 보여준 뒤, 도입부부터 악령들을 때려눕히고 콘서트에 늦지 않게 도착하는 헌트릭스의 모습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여기서 셋은 역시 앞서 말한 신성한 숫자이자, 무당의 세 부류를 뜻하는 것 같다. 가계 대대로 무업을 이어받으며 어릴 때 부터 무업에 대해 철저히 가르침을 받는 세습무, 신내림을 받는 강신무, 그리고 무당 집안에 태어나진 않았으나 제자가 되어 배워 익혀 무당이 되는 학습무. 주인공인 루미는 이전 대의 퇴마 아이돌인 선라이트 시스터즈 멤버의 딸이었고, 역시 선라이트 시스터즈의 멤버인 셀린의 손에서 자라며 퇴마 아이돌의 길에 대해 철저히 배웠으니 말하자면 세습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느낌으로는 팀의 메인 댄서로 신들린듯이 춤추는 미라가 강신무, 직접 작사도 하고 나름 브레인인 조이가 학습무가 아닐까 싶은데 사실 국내 작품도 아닌데 거기까지 파고 들진 않았을 것 같기도 하고.
그리고 이들 헌트릭스에 대항하기 위해 진우가 귀마에게 제안하여 만든 K-POP 보이그룹인 사자 보이즈가 나오는데, 사실 진우 말고는 이름도 짧게 지나가고 대사도 거의 없다. (90분짜리 OVA의 한계임. TV 시리즈였으면 적어도 1쿨은 지지고 볶았을 것이다.) 사자 보이즈의 음악이나 춤, 의상 같은 것도 재미있는데, 여러 보이그룹들을 참고했다지만 일단 후반부의 “Your Idol”은 BTS의 “IDOL”에서 참고한 게 많지 않았을까 싶다. 도포를 휘날리며 춤추는 남성 아이돌이라든가, 또 멜론 어워드 무대에서 붉고 푸른 불꽃 같은 것이 휘날리던 장면이라든가 이것저것. 그러고 보니 악령들이 단순히 도깨비의 형상을 닮았다거나 하는 게 아니라 탈춤의 취발이나 말뚝이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것도 그렇고.
진우는 과거 조선시대에 가난하지만 노래를 잘 부르는 청년이었고, 악령의 꾐에 넘어가 어머니와 어린 누이동생을 버리고 혼자만 잘 사는 길을 택했다가 그대로 타락해버린 인물이다. 그는 그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그 기억을 지우기 위해 사자 보이즈를 결성하여 혼문을 파괴하려 하는 인물이다. 그는 잘생긴 얼굴과 루미와의 로맨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루미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등, 남주 롤로서 부족함이 없지만, 역시 과거의 업보 때문에라도 “루미에게 다시 일어날 힘을 주고, 루미로 인해 구원받고, 악을 물리치려는 루미를 지키기 위해 목숨과 혼을 바친 뒤 소멸하는” 결말을 맞는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진우에게 버림받은 어머니와 누이동생을 구원한 이들은 과거의 헌터들, 그러니까 세 무당들이다. 진우를 닮아 노래를 부르는 힘도 있었을 것이고, 구출되는 장면에서 가슴에 파란 빛이 빛나기도 했으니, 어쩌면 진우의 누이동생은 과거 조선시대에 활약한 헌터들 중 하나였을 수도 있는 일이다. 루미가 어머니의 뒤를 이어 퇴마를 했듯이, 진우의 누이동생도 다른 퇴마 아이들들의 조상이 되었을 수도 있다. 그렇게 치면 인간으로서 가장 강력한 악령이 된 존재와, 그 악령을 물리치는 헌터 모두를 낳은 진우의 어머님은 얼마나 대단하고 강력한 힘을 지닌 여성이었을까 생각하게 되는데……
진우의 과거가 나오는 장면에서 붉은 관복을 입은 신하들 뒤에 서 있는 궁녀들이라든가, 왕이 용상에서 왕비인지 후궁인지 모를 여성과 함께 앉아 있는 장면 등이 고증에 맞지 않는다는 말이 나오고 있는데,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레퍼런스가 물구나무를 서서 봐도 왕의 남자였는걸. 그러니까 왕이 예쁘고 노래 잘하는 남자를 궁으로 불러들여서 매일 비단 이불을 덮고 자게 만들지.
루미와 셀린의 대립 부분이 재미있는데, 사실 이 시퀀스는 스타워즈에서 오비완 케노비와 시스의 제자가 된 아나킨 스카이워커의 대립과 비교할 만 하다. 다만 셀린은 너를 사랑한다면서 사인검으로 루미를 베지 못하는 와중에도 악령의 문양이 전신에 퍼진 루미에게 선뜻 손을 내밀지 못하는, 역시 용기를 갖고 견디고 있을 뿐 그 역시 두려움이 있는 인간임을 보여주고 있다면 오비완 케노비는 “사랑했다”고 하면서 제자의 팔다리를 다 잘라놓는 것을 생각하면. (먼산) 헌터이자 아이돌이었던 어머니는 악령과의 사이에서 루미를 낳았는데, “나의 표식을 지닌 아이”라는 표현으로 볼 때 정황상 아버지는 귀마로 보인다. 귀마의 힘이 약해져서 지금은 불의 형태로만 남아 있는 것이 선대의 활약 덕분었다고 생각할 때, 뭔가 아주 매운맛 시퀄이 준비되어 있을 것 같기도 한데.
어쨌든 루미는 인간과 악령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헌터를 못 할 것도 아닌게, 한국에는 이미 왕의 귀신과 인간 사이에서 태어나 귀신을 부리고 요마를 잡던 인물에 대한 전설이 있다. 비형랑이라고……
황금 혼문을 만들기 위해 헌트릭스가 발표했던 노래의 제목은 “Golden”이다. 그러나 자신의, 악령 혈통을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하며 감추고 싶어하던 루미는 이 노래의 클라이맥스를 부르는 데 자꾸 실패하고, 라이브를 펑크내고 도망친다. 이 노래는 그 노래의 가사 그대로 “태어난 그대로 빛나기로” 결심한 그 순간, 다시 루미의 노래가 된다. 물론 연말 어워드 때와 마찬가지로, 태어난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는 데는 시련도 따르지만, 그 시련을 딛고 일어난 결과는 연금술의 최종 단계, 현자의 돌, 평범한 자신을 황금으로 바꾸는 기적의 순간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받아들인 사람의 연금술과, 그를 위해 자신의 혼을 내어주는 희생, 동료들의 신뢰로 헌트릭스는 혼문을 완성한다.
내용은 어찌 보면 단순하고 대단히 뻔하다 못해 거대한 뮤직비디오 같은데, 디테일한 부분이 아주 한국적이어서 흥미로운 구석이 많았다. 일단 “라멘”이 아니라 “라면”이고(3분 라면에 물 부어놓고 라면이 다 익기 전에 적을 물리치다니, 삼국지냐고요), 멤버들은 김밥을 손으로 들고 먹어대고, 알록달록한 수면바지라든가, “짱구는 못 말려” 잠옷에서 짱구만 거북이로 바꾼 잠옷, 거리 풍경 같은 것들 하나하나가 한국적이었다. 게다가 남산타워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최후의 대결이라니. 도쿄, 특히 도쿄 타워를 배경으로 인류 최후의 싸움 같은 게 벌어지는 만화들을 보면서 자란 중년의 덕후들은 남산타워 앞에서 벌어지는 대결 하나만으로도 “김구 선생님 보고 계십니까!”를 외칠 만한 일이었다. 특히 이 배경의 한국적인 부분 말이데, 사방 어디를 봐도 산이 보이는 것부터 시작해서 골목 풍경, 한옥마을 풍경까지 현실의 한국에 가까워서 좋았다. 보다가 짜증나서 닫아버린 넷플릭스 오리지널 애니메이션 “이 별에 필요한”은, 한국 감독이 만든 한국 애니메이션인데도 배경이, 한글만 적혀 있지 1990년대 홍콩 영화 배경 같은 것을 + 신카이 마코토 풍으로 표현하고 싶은데 + 어두운 색을 적절히 쓰지 못해서 파스텔톤으로 경박하게 붕 뜬 가운데 인물 컬러톤하고 겹쳐서 인물이 배경에 묻혀 보이기까지 하는 총체적 난국이었던 반면, 해외에서 제작한 K-POP 소재 애니메이션 속 서울이 더욱 핍진한 것을 보면서 복잡한 마음이 들었고….. 아이돌 팬 관점에서는 저건 좀 아니지 않나 하는 부분이 있긴 한데(헌트릭스가 무대에서 싸우고 내려가자마자 사자보이스가 그걸 디스하며 자기들 라이브 하니까 남산으로 오라고 하거나. 현실이었으면 사자보이스 인성 실화냐 같은 글로 온 포털이 도배되다못해 헌트릭스가 싸운 일이 묻혔을 것 같다) 아이돌 덕질은 별로 하지 않아서 그쪽 관점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애니메이션이나 한국형 퇴마물 같은 것들에 관심 갖고 살아온 관점에서는 아주 잘 뽑혔다. 소재도 너무나 의외이지만 정말 제대로 써먹었고. 왜, 현실에서도 사람들이 그런 말 하잖아. 연예인 사주가 옛날같으면 무당 되었을 사주라고.
PS) 스토리상 중요하지도 않은 한의사 선생님이 길게 나오면서 개그씬을 하시네 했더니 성우가 꽈찌쭈…… 아니, 대니얼 대 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