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사람을 구하는 마음으로 “으아아악 더러워”를 외치면서 리뷰를 썼는데, 그 글을 제일 윗줄에서 빨리 내려버리기 위해 얼른 다른 책의 리뷰를 쓴다.
사실은 서점에 갔다가 “넷플릭스 왜 보냐, 성해나 책 보면 되는데”라는 띠지를 보고 솔직히 “오징어게임 같은 것이라는 뜻인가”하고 거부감을 느꼈다가, 전에 “릿터”에서 읽었던 작품이 수록된 책인 것을 뒤늦게 알고서 읽게 되었다. 저 띠지의 멘트에는 여전히 거부감이 있지만, 영상화 되었을 때 그 강점이 극대화 될 만한 부분들을 보면서 무슨 뜻으로 쓴 멘트인지는 이해했다. 저런 멘트가 소구하는 독자층도 분명 있을 테니까.
“길티 클럽 : 호랑이 만지기”는 우연히(그야말로 ‘덕통사고’라는 말 그대로 예상치 못한 사고를 당하듯 갑자기) 영화감독에게 입덕하고, 그를 숭배하고 닮고 싶어하며 소비 정체성을 통해 자신의 팬/덕후로서의 진정성을 입덕하려 하고, 여기에 더해 이 영화감독이 사회적으로 물의를 빚으며 이런저런 시련을 감당하면서도 감독에 대한 믿음과 애정을 유지하던 사람이 어느 순간 아주 어처구니없이 탈덕할 때 까지, 그리고 그 이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사실은 영화감독이 아니라 아이돌이었어도 비슷하거나 더 강렬한 효과가 있긴 했겠지만, 그랬으면 또 중간에 시네필들 나오는 장면 같은 흥미진진한 장면이 안 나왔을 수도 있겠지. 사실은 이 단편을 읽으면서 장르는 다르지만 오타쿠 공감성 수치 같은 것을 좀 느낀 부분도 있었고, 덕후, 또는 덕후가 되고 싶은 덕후 워너비들의, 입덕->이 사람 이 전에 이 장르에 아무도 없었던 것 처럼 찬양->이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는 평범한 머글들에 대한 우월감->덕질 대상이 잘못을 해서 온 세상이 그를 비난해도 여전히 그를 사랑하는 자신의 모습을 사랑함->탈덕->배신감을 느끼고 남들의 세 배로 욕하고 다님, 정도로 요약 가능한 흐름들을 생각해 보게 되기도 했다. 게다가 시네필 농담도 떠오르고 해서, “이 소설 때문에 책 제목이 ‘혼모노’였을까” 하는 생각도 잠시 했다.
어쨌든 이 “길티 클럽 : 호랑이 만지기”는 이 책에서 가장 훌륭한 소설은 아니라도 책 전체의 분위기를 충격적으로 확실하게 잡아주는데, 그 중에서도 흥미로운 부분이 집에서 쓰는 물건이나 남편의 옷차림을, 그 감독처럼 만들려고 하는 것. 요즘은 “치즈 인 더 트랩”의 손민수라는 캐릭터에서 따와서 “손민수 한다”는 식으로 말하는, 자존감 낮은 사람이 자신이 동경하는 사람을 동일시하며 온갖 것을 따라하고 싶어하는 것 말이다. 혼모노(本物)와 니세모노(偽物), 원본과 열화된 복제. 그리고 자신이 자아를 의탁한 존재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 응원한다며 “그는 잘못했을 리 없어. 그를 비난하는 너희가 잘못이야.”하는 식으로 뻗대다가, 그 존재가 자신의 잘못을 사과하는 순간 자신의 세계관이 퍽 하고 부서져버리는, 그래서 탈덕에 이르게 되는 과정까지. 자신이 진짜라고 생각한 대상을 조악하게 카피하면서 이건 진짜에 한없이 가까운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거는 듯한 그 모든 과정들이 흥미롭고 현실적이었다. 보통은 이런 과정을 잘 모르거나, 알거나 예전에 경험했다면 부끄러워서 이렇게 리얼하게 다루기 쉽지 않을 텐데.
표지의 사과는 반으로 잘린 청사과와 붉은 사과를 붙여 놓은 듯한 형상이다. 작두의 날에 반으로 쪼개진 사과겠지. “혼모노”는 어떤 재능에 대한 이야기이자, 진짜란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인데. 딱히 좋아하는 노래는 아니지만 요즘 많이 들리는 “나는 반딧불”이라는 노래가 떠오르는 이야기였다. “나는 내가 빛나는 별인 줄 알았어요/한 번도 의심한 적 없었죠/몰랐어요 난 내가 벌레라는 것을/그래도 괜찮아 난 눈부시니까” 하는. 자신이 별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반딧불, 개똥벌레였다는 노래 말이다. 30년동안 장수할멈을 신으로 모셔 온 중년의 박수무당 문수는 어느날 할멈이 떠나 더이상 신을 받을 수 없는 상태가 되고, 그의 앞집으로 이사온 젊은 신애기는 문수에게 할멈이 자신에게 왔다고 말한다. 문수는 장수할멈과 떠나지 못하는 자신을 가짜라고 생각하고, 그러면서도 무속인의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가짜 작두를 구해야 하나 고민한다. 신애기는 그를 가짜라고 조롱하며, 문수가 바라던 인간문화재는 자기가 될 것이라고 말하지만, 문수는 그에 분노하면서도 동시에 그의 운명에 안타까움을 느낀다.
친구는 있을까. 있어도 일상을 공유하거나 실없는 이야기를 나누며 낄낄대기는 힘들 것이다. 우리가 받은 생은 여느 평범한 이들의 삶과는 다르니까. 저 나이에 나는 평범한 삶을 살고 범상한 몸을 가질 수 있기를 간절히 염원했는데. 한번만 살 수 있다는 것을 저주처럼 여겼는데.
그러면 장수할멈이 떠났으니까, 문수는 이제 가짜 무당인가. 한국에서 무당으로서의 정체성은 강신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과, 무업을 배워서 이어가는 것, 둘이 다 존재한다. 배우지 않고 일단 신이 들어와서 영험해진 존재는 신을 받았으니 영통 면에서는 진짜 무당이겠으나, 한편으로 자기 자신으로서 진짜인지는 알 수 없다. 신과 통하지 못하게 된 문수는 영통 면에서는 가짜라고도 볼 수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무업을 하며 살아온 지난 30년은 가짜가 아니다. 그는 자신의 고객이었던 정치인이 문수가 아니라 장수할멈을 보고 맡겼던, 그래서 장수할멈을 신으로 받은 신애기에게 새로 의뢰한 굿판에 뛰어들고, 발바닥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그 굿판에 모든 것을 건 사람처럼 춤을 춘다.
삼십년 박수 인생에 이런 순간이 있었던가. 누구를 위해 살을 풀고 명을 비는 것은 이제 중요치 않다. 명예도, 젊음도, 시기도, 반목도, 진짜와 가짜까지도. 가벼워진다. 모든 것에서 놓여나듯. 이제야 진짜 가짜가 된 듯.
장수할멈이 없이도, 그는 삼십 년동안 무업을 이어 온 무속인이다. 장수할멈의 목소리가 그의 안에서 사라졌다고 해도, 문수의 삼십 년 동안의 굿판과 춤사위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는 신을 받지 못하는 가짜이자, 무무를 추는 예인으로서는 진짜가 된다. 그것은 사실 어떤 종류의 재능과 창작에 대한 이야기이다. “진짜란 무엇인가요.”라는, “벨벳 토끼 인형”을 읽을 때의 고통같은 그 질문을. 그리고 더 나아가 지극한 헌신 끝에 “그래서 시발 진짜가 뭔데.”라는 질문을.
“구의 집 : 갈월동 98번지”은 남영동 대공분실을 설계하게 된 건축가와 그의 제자에 대한 이야기다. 악의 평범성에 대한 우화같은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역시 재능에 대한 이야기, 그 중에서도 윤리가 제거된 재능이 어떤 결과물을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잉태기”는 전에 릿터에서 읽었던 소설인데, 임신한, 이혼하고 친정 근처에서 살며 당연한듯이 엄마의 사랑과 돌봄을 누리는 딸과 엄마, 그리고 딸에게 ‘지지’라 불리는 할아버지(화자인 엄마의 시아버지)가 삼각형을 이루며 밀고 당기는 이야기다. 어린 시절 친정에서 사랑과 돌봄을 제대로 누리지 못했던, 소외된 딸이었던 엄마는 시어머니가 자신에게 패물 같은 것을 물려주는 것은 어색해하며 사양하지만, 딸에게 물려주라며 다시 건네주면 선뜻 받는, 자신은 돌보지 않고 딸에게는 아낌없이 퍼 주며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한 인생을 깔아주고 싶어하는 사람이다. 그것은 할아버지도 마찬가지다. 별나고 괴팍하다는 말을 듣는 이 할아버지는 자신의 핏줄이라면 며느리의 뱃속에 들어있을 때 부터 익애하며, 자신의 곁에서 자신이 설계해놓은 그대로 살길 바란다. 할아버지는 엄마가 딸의 앞날을 계획하고 나설 때마다 매번 자신이 나서고 끼어들려 하고, 자기 주장을 관철하려 들며, 엄마는 할아버지를 견제하고 딸에게서 밀어내려 한다. 그러면 또 할아버지는 자기는 살 날이 얼마 안 남았고 여기저기 아프다는 말로 손녀를 불러들인다. 어느 사립초등학교에 보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부터, 유학 문제, 임신한 뒤에는 어디서 아이를 낳느냐에 대한 문제까지, 두 사람은 사사건건 대립한다. 그리고 엄마의 고집으로 딸이 원정출산을 떠나기 직전, 할아버지는 공항에 나타나 원정출산을 만류하며 자신이 예약해 놓은 산부인과에서 출산할 것을 고집한다. 그리고 두 사람이 싸우는 가운데, 딸은 양수가 터지고 만다. 딸이 또 다른 어머니가 되려는 순간까지도, 그들은 탯줄을 끊지 못하고, 이 아이가 자신들과 다른 독립된 인격체임을 인정하지 못하고, 그저 예쁜 인형처럼 대한다. “잉태기”는 딸이 임신한 가운데 엄마와 할아버지가 대립하는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이들이 아직도 탯줄을 끊지 못하고, 자기 자식, 자기 자손이 독립된 인간으로 살게 내버려 두지 않는 인간들임을 이야기한다.
기묘하다고 생각했던 소설은 “스무드”인데, 주인공이 한국인 2세인데, 아무리 집에서 한국과 문화적 단절을 해왔다 해도 주변의 한인 커뮤니티가 있는데 이 정도로 한국에 대해 전혀 모를 수가 있나 싶었다. 본인이 의도적으로 한국을 차단해온 입장이어도. 그렇다면 차라리 한국인 입양아 출신이었으면 어땠을까 생각하면서 읽었고. 낯선 나라에 처음 놀러가는 거라고 해도 이보다는 조사를 해서 움직이지 않을까 싶었는데, 어떤 부분이 텅 비어있다고 느껴질 정도로 한국에 대해 데이터가 없는 인물이어서, 싫다는 사람을 납치해다가 서울에 풀어놓은 것 같았다. 읽는 내내 “대체 왜?”라는 생각이 가장 많이 들었던 소설인데, 그래도 “길티 클럽”과 “혼모노” 두 편만으로도 충분히 빼어났고, “잉태기”와 “구의 집”도 좋았으니까 뭐. 한 권이 전부 다 마음에 들 수는 없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