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부

1990년대에 바둑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던 사람이면 모를 수가 없는, 아니, 바둑에 관심이 없어도 뉴스라는 것을 보고 살았던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이야기인데다, 앞부분의 조훈현과 녜웨이핑 대결은 “미생”에도 각 화별로 기보가 들어가 있던 대국이었다. 정말 보고 싶은데, 배우가 마음에 안 들어서 영화관에서 보지 않고 있다가 넷플릭스에 올라온 다음에 봤다.

과거의 뉴스에 현재의 배우들을 위화감없이 욱여넣고, 중간중간 대국 장면이나 뉴스로 넘어가는 장면 등은 화면의 입자가 굵은 느낌으로, 해상도는 높지만 예스럽게 처리한 장면들이 많아서 화면과 연출이 좋았다. 바둑판 위로 CG가 오가는 것도(이창호가 다음 수를 계산하는 장면이나, 조훈현이 앉아있는 가운데 바둑판을 아래에서 위로 투영해서 찍은 듯한 장면) 자연스러웠다. 사실 그런 연출을 보면서 “3월의 라이온” 만화(원작) 생각도 했다. 반상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무엇보다도 탁월한 연출을 한 만화가 있으니까. 화면을 짜는 데 영향이 없진 않았겠지.

조훈현과 이창호에 대해, 바둑에 조금이라도 흥미가 있었던 사람들은 대충 아는 이야기들이 가득한데, 그렇다고 전부 실화 그대로는 아니다. 일단 이창호는 어릴때도 시끄럽지 않았고, 이제 막 들어온 신입이 선배들을 다면기로 처바르는 전개는 좀 너무했다. 그리고 조훈현의 바둑매너(……)는 실제보다 축소된 것이다. 이 이야기로 조훈현 이창호 사제대결을 처음 접한 사람이라면 영화에 묘사된 조훈현의 바둑매너만 보고도 기가 막혔을 텐데, 사실은 그보다 더 다양한 바둑매너의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대국하다가 노래를 부를때 한본어로 부르셨다거나. 이창호는 인터뷰 등에서 남을 디스한 게 거의 없었는데 그런 이창호의 자서전에 하늘같은 자기 스승님 바둑매너 언급이 짧게 나올 정도면 얼마나 심했을지 짐작이 간다. 그리고 담배도 담배 전매청(담배인삼공사…. KT&G의 전신) 사보에서 인터뷰를 해 갈 만큼 어마무시하게 많이 피우다가 결국 이창호에게 연속으로 지면서 담배를 끊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무려 금연초(……) 광고모델도 했다.

솔직히 배우의 얼굴은 그냥 머릿속에서 실사를 떠올리면서 봐서 그런지 정작 보다보니 크게 거슬리진 않았다. 작중의 두 배우가 어떻게 생겼는지 화면 끄고도 기억이 잘 안 난다. 당시 뉴스에 나오던 실제 인물들의 얼굴이 먼저 떠올라서. 다만 중간에 이창호와 조훈현이 연달아 대국하고 이창호가 승리하는 그 시기에 이창호는 15~16세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 어른들 진짜 못났네”싶은 생각이 안 들 수가 없다. 고등학생 이창호는 “선생님”을 여전히 좋아하는데, 조훈현은 “제자를 두고 이제 제자가 훌륭하게 떠오르는 만큼 저물어가는 스승”이 아니라 여전히 승부사여서 갈등이 벌어지지만, 그 상황에서 자기 성질 부리느라 애한테 저렇게 할 일인가 싶은 장면들도 그렇고. 명인 아니라 뭐라도 고등학생인 애한테 자기 스승 잡아먹어서 배 부르겠다고 면전에서 비꼬는 기사들도 그렇고. 작중의 이창호는 매일 선생님과 대국하며 깨지고(실제로 조훈현은 그렇게 매일 제자와 바둑 두지 않았다고 한다. 조훈현 본인도 세고에에게 배울 때 스승과 대국한 건 두 판인가 세 판이었다고) 매일 혼나고 자존감이 팍팍 깎여나간 상태로 선생님과 싸워서 이기고 기는 죽고 선생님은 너 이제 슬슬 분가하라고 하고…… 내쫓으면서 “너는 내 자랑이었다”라니 무슨 오비완 케노비가 아나킨 스카이워커에게 “I loved you!”하는 소리 하고 있네. (웃음)

좋게 나오고 잘 사용된 캐릭터가, 서봉수 9단…… 이 아니라 작중에서는 남기철이라는 이름으로 나오는 기사. 출연시간은 적은데 두 캐릭터를 움직이는 캐릭터다. 그리고 듣다보니 신기할 정도로 1990년대에 가까운 말투를 쓰고 있고.

앞부분에서 세고에 9단의 사진이 나오고, 중간에 조훈현이 흔들릴 때 세고에 9단의 글이 적힌 바둑판이 나온다. 그리고 군복 입은 이창호가 나오고. (세고에 9단은 마지막 내제자였던 조훈현이 군입대 때문에 한국으로 돌아온 뒤 자살했다.) 마지막에 스승은 자기 스승이 물려준 바둑판을 제자에게 물려주며 자신이 승부사인 동시에 자신을 뛰어넘을 만한 제자를 가르쳤고, 그렇게 자신의 바둑이 이어져 나감을 인정한다. 그야말로 “군자의 세 가지 즐거움 중 제일은 천하의 영재를 제자로 삼아 가르치는 것”이라는 말이 떠오르는 이야기인데, 그 긴박한 이야기와, “답이 없지만 답을 찾으려 하는 게 바둑이다”(세고에 겐사쿠) 나 “바둑은 자신과의 싸움이다.”(조훈현)을 비롯해서 이런저런 바둑 명언들이 쏟아지는 것 치고는 연출 같은 게 너무 밋밋했고, 흥미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넣은 장치들이 제대로 녹질 않았다.

말했듯이 이창호 에피소드에 왜 그렇게 무리하게 한국기원 연구생 도장깨기 장면 같은 걸 넣었는지도 모르겠고. 좀, 감독이나 연출이나 누군가가 한국 드라마든 일본 소년만화든, 그런 클리셰를 보고 잘못 집어넣은 맛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조훈현이 어릴때 그렇게 나댔다면 이해가 가도 이창호가 그렇게 나대는 건 너무한 것 같았다. 그렇게 자신감 넘치던 아이가 커서 기원 옥상에서 궁상스럽게 짜장면 먹는 장면을 넣으면, 이야기 맥락만 보면 “남의 스승이 되기에는 한없이 덕이 없던 조훈현이 애를 얼마나 갈구면 애가 저렇게 성격까지 변했겠냐”같은 해석이 가능해지지 않을지?

PS1) 벡델 테스트에 넣을 수조차도 없을 만큼 처음부터 끝까지 남자만 나오는 영화인데, 딱 한 사람 나오는 여성은 조훈현의 아내다. (이름도 안 나온다) 그는 예민한 남편이 제자에게 지고 조바심을 내고, 돌부처같은 내제자가 승리하고서도 새벽까지 바둑을 두는 것을 보며 안절부절 못하면서도 두 사람을 대국장으로 데려간다. 그게 전부다.

PS2) 그리고 유아인은 지금 30대 후반인데, 고민하는 중학생 이창호부터 스승과 대국해서 이기는 고등학생 이창호 역이라니. 아무리 이창호가 노안이었다지만 이건 너무한 일이 아닌지.

PS3) 사실 조훈현에 대해, 또 한국 바둑에 대해 흥미진진한 서사를 읽고 싶다면 이 영화 말고, “바둑 삼국지”라는 만화가 있는데 그게 정말 좋습니다. 완결이 안 난 채 5권에서 멈춰버려서 탈이지만.

PS4) 조훈현은 사실 이런저런 창작물에 많이 나왔고, 사실 슬슬 조치훈이 주인공인 이야기도 나왔으면 해…….

PS5) 90년대에 어쩌다가 바둑에 관심을 갖고 있었나 : 지금은 다 까먹었지만 고등학교 다닐 때 특활 바둑반이었음. 특활 하는 날은 계산삼거리에 있는 기원에 가서 바둑 비슷한 것과 오목을 두다가 집에 갔었는데, 아직도 그 기원이 그 자리에 있음.

PS6) ……아니 그리고, 유창혁에 해당하는 기사가 안 나온 것 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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