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사유의 장미 2025년 극장판

지난 1월 말, 일본에서 “베르사유의 장미”의 새 극장판 애니메이션이 개봉했다. 사실 12월 3일 이후 계속 뉴스에 집중하고 주말에 집회 나가던 중이었고, 트위터에서 사람들이 “베르사유의 장미”나 “북해의 별”, “테르미도르”의 장면들을 인용하며 이야기하기도 하던 중에 나온 극장판이라니, 정말 보러 가고 싶었다. 국내 극장 개봉은 없었지만 4월 말에 넷플릭스에 올라온다고 했고, 우리말 더빙도 포함된다고 해서 더욱 기대가 컸다. 그래서 마침내 4월 30일, 고대하던 극장판을 보기 시작했는데.

시작부터 굉장하다. 당시의 시국이라든가,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의 갈등이나 놀기 좋아하던 공주 마리아 안토니아의 이야기는 안 나오고, 마리아 테레지아는 코빼기도 안 나온 상태로, (국경에서 프랑스의 의복과 장신구로 전부 갈아입은) 마리 앙투아네트가 파리에 입성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렇다, 주인공인 오스칼이 왜 남자로 자라게 되었는지에 대한 사연과, 천둥번개가 울부짖던 크리스마스에 딸이 태어났는데 높이 들어올리며 얘를 아들로 키워서 내 후계자로 삼겠다는 자르제 장군의 광기는, 그로 인한 비극의 암시는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애니메이션은 시작하자마자 놀기 좋아하고 매 장면마다 드레스를 갈아입는 화려한 로코코의 여왕같은 마리 앙투아네트와, 아마도 파리와 빈을 통털어 가장 잘 생긴 미소년으로 보였겠지만 내면은 나라와 황태자비에 대한 충심으로 가득한 나라의 동량 오스칼 프랑수아 드 자르제를 보여준다. 분명 후반부에서 “이 분은 태어날 때 부터의 여왕”이기에 바뀔 수 없다고 오스칼이 생각하는 부분이 나오는데, 수미상관하게 넣으려면 앞부분에서 뒤 바리 부인 에피소드를 빼고 갈 수 없었을 텐데도, 뒤 바리 부인은 그냥 화려한 귀부인으로 화면에 지나가고 끝이다. 당연히 평민 출신 애첩인 뒤 바리 부인과 합스부르크의 공주님 출신인 황태자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갈등 같은 것도 나오지 않는다.

이쯤 되면 대체 뭐가 나오려고 그러나 생각할 즈음, 마리 앙투아네트는 원작보다 훨씬 아름다워진 스웨덴의 귀공자 페르젠과 만난다. 원작에서는 그가 독일에서 조병학을, 이탈리아에서 음악과 의학을, 스위스에서 철학을 배우며 그랜드투어를 한 뒤 파리에서 사교계에 데뷔하려고 온 것으로 나오지만, 첫 등장부터 나이트클럽…… 아니, 가면무도회에 별다른 설명 없이 나타나는 그를 보면 원작을 안 읽은 사람이 보기에는 얼굴만 반반하고 싹수는 노란 놈으로 보이지 않을까 싶었다. 어쨌든 역사대로 페르젠은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알현을 청하고, 두 사람은 가까워진다.

역시 아무 설명 없이 마리 앙투아네트가 말을 타다가 낙마하는 사고가 발생한다. 말을 잡고 있던 앙드레는 사형에 처해질 위기에 처하지만 오스칼이 목숨을 걸고 진언하고, 페르젠은 물론 마리 앙투아네트도 달려나와 구명을 청한 덕분에 목숨을 건진다. 앙드레는 오스칼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맹세한다. 그리고 갑자기

국왕 루이 15세는 천연두에 걸렸다.
(촛불 꺼짐)
한달 후……

지금 장난하나……

물론 천연두 환자를 화면에 보여주는 건 부담스러웠겠지만 적어도 실루엣이라든가 병자가 누워 있고 의사들이 드나드는 장면이라든가 뭐 1, 2초라도 할애할 줄 알았는데 그런 것 없다. 정말 조금이라도 아름답지 못한 컷은 한 프레임도 보여주지 않겠다는 집념마저 느껴졌다. 루이 15세의 죽음은 1초도 안 비춰주고, 앙드레가 실명하는 장면도 15초 정도로 지나간 뒤, 7월 12일 밤은 그렇게 길게(5분쯤) 보여준단 말이죠. 제작진의 집념이랄까, 무엇에 집착하는지는 잘 알겠고요. (허탈함)

이쯤 되면 짐작할 수 있다. 이 2025년판 베르사유의 장미는 뭐, 다카라즈카 공연처럼 아름다운 장면들 위주로 뮤지컬 애니메이션 형태로 만든 것에 가까운 물건이다. 역사와 혁명이 아니라 프랑스와 로코로 풍, 아름답고 비극적인 왕비와, 역시 아름답고 비극적인 오스칼의 사랑 등을 탐미적으로 그리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면 여기에 부합한다고는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걸 감안하고서도 여러 문제가 있는데, 제일 메인이 되는 오스칼과 앙드레의 이야기는 잠시 후 하고 다른 이야기들 먼저 하겠다. 우선 초반에는 오스칼과 마리의 비중이 비슷비슷한데, 오스칼이 생각이 많은 것에 비해 마리는 너무나 생각이 없다. 하다못해 쉴 때 읽는 로맨스판타지나 BL에서도 군주나 왕비나 대공비나 기타 주인공들이 부지런히 일하지 않으면 못 견디며, 주인공 수를 무자비하게 괴롭히는 폭군 황제라 해도 일은 제때 해야지, 일 안 하고 사랑에만 빠져 있다고 하면 내가 내지도 않은 저 작품 속 세계의 세금이 아까워서 짜증내는 것이 한국 독자들인데, 그 기준으로 마리 앙투아네트는 정말 너무 생각없이 놀기만 한다. 오스칼이 자신의 운명을 따라 자기 길을 가겠다고, 검에 살겠다며 비장하게 노래를 부른 직후에 마리도 같은 가락과 연출로 역시 비장하게 노래를 부르는데 그 운명 따라 자기 길을 가겠다는 것이 국제적 불륜남 페르젠과의 불륜인데 너무 당당한 것 아니냐고……

초반에는 오스칼과 마리의 비중이 비슷하고, 오스칼이 드레스를 입고 페르젠과 무도회에서 춤을 추기 전까지는 페르젠과 마리의 관계가 많이 나오지만, 정확히 오스칼 드레스 신을 기점으로 이야기는 오스칼과 앙드레의 관계로 넘어간다. 이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를 하려면 신분차이로 인한 고통과 앙시엥 레짐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작품은 혁명이라든가 앙시엥 레짐 이야기를 싹 빼고 사랑에 집중한다. 어느 정도냐 하면 로베스피에르 한 컷 나왔고, 나의 차애캐인 베르날 샤틀레는 두 번 나왔다. 긍지 높은 귀족으로 약자에 대한 연민은 있지만 평민의 삶 자체에 대해서는 피상적으로 알고 있던 오스칼에게 평민이 살아가는 현실의 가혹함을 알려주는 캐릭터인 로자리는 베르날보다도 적어서 한 번 나왔다. 야, 이 망할 제작진들아, 로자리를 그만큼 출연시키는 게 말이 됩니까. 오스칼님이 원작에서 그러셨잖아. 신부 차림을 한 로자리의 모습을 보지 못하는 것이 애석하다고. 그러면 애니메이션 만드는 김에 신부 차림으로 베르날과 손잡고 선 로자리 모습 정도는 보여줘야지! 오스칼님이 애석해 하시는데! 네놈들은 서비스 서비스 몰라?! (그리고 어째서인지 나폴레옹은 원작에 나오는 그 얼굴로 한 컷 나온다. 대체 왜?)

……안다, 로자리 싫어하는 독자들도 있다는 것을. 약간 그, 평범한데 오스칼님의 가장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고 중간에 발목 잡는 일도 있는 이물질같은 여자애라고 생각하고 싫어한다는 것 같은데. 원작에서 그때 로자리가 쓰러진 오스칼을 간호하지 않았다면, 또 그때 로자리가 흑기사를 향해 생전 처음으로 총을 쏘아 명중시키지 않았다면 오스칼은 무사하지 못했을 텐데요. (물끄럼) 그리고 그의 캐릭터성이나, 그가 “나의 봄바람”이라 불리는 “천상 평범한 여자애” 스타일의 소녀인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해도, 로자리가 있었기에 오스칼은 어린 소녀가 어머니를 부양하기 위해 거리에서 몸을 파는 현실을, 귀족이 평민을 마차로 치어죽이고도 뻔뻔하게 구는 현실을, 귀족들이 전채부터 후식까지 여러 접시의 식사를 할 때 평민들은 채소 줄기가 조금 떠 있을 뿐인 묽은 수프로 배를 채운다는 것을 알고, 그 고통을 이해하고, 자신이 귀족이라는 사실을 부끄러워하며 진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로자리를 싹 빼버린 결과로, 흑기사도 나오지 못하고, 오스칼은 “폭력적인 시민이 휘두르는 몽둥이”에 맞아서 앙드레가 한 눈을 잃게 된 것을 보고서야 자신이 지금 국민들의 현실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했다는 사실을 겨우 자각한다. 이 각성이 너무나 급격하게 이루어지기 때문에 연출 등을 고결한 느낌을 주도록 잡은 것은 알겠는데, 전체적인 서사를 보면 “그때 그 일로 사회계약론 좀 찍어먹고는 가난한 평민 출신의 군인들이 모여 있는 근위대에서 마음만은 자유라고 이야기했냐” 싶어지는 것. 충분히 빌드업이 되지 못한 채 이루어진 각성이다 보니, 그가 혁명에 뛰어드는 동기가 더없이 얄팍해지는 문제가 있다.

혁명과 앙시엥 레짐 이야기가 많이 희석되다 보니, 3부회도 개최되는 장면만 나오고 지나갔고, 국민의회 의원들이 의사당에 못 들어가고 가로막히는 장면, 오스칼이 의원들을 해산시키라는 명령을 거부하는 장면, 제로델이 그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출동하자, 오스칼이 국민의회 의원들을 지키기 위해 달려가 그 앞을 가로막고 “내 가슴을 포탄으로 찢을 용기가 있는가, 제군!”하고 외치는 장면도 전부 빠졌다. 참고로 이번 극장판에서 미역머리 제로델의 작화가 아주 미목수려하게 나왔는데, 그러면 뭐합니까. 제로델의 오스칼에 대한 사랑의 서사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은 오스칼을 위해 구혼을 그만두고 물러나는 게 아니라, 바로 이 장면에서 오스칼에게 머리를 숙이고 돌아서며 “그대를 위해서라면 단두대라도”하는 장면이었는데. 당연히 이 장면이 빠지면서, 자르제 장군이 오스칼을 반역자라고 부르며 죽이려 하는 장면도, 앙드레가 막아서는 장면도 다 사라졌고, 오스칼이 베르날과 손을 잡고 시민들을 움직여 부하들을 구해내는 장면도, 베르날이 곧 혁명이 일어날테니 이 나라를 떠나라고 말할 때 오스칼이 “프랑스에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나는 조국과 함께 하겠다.”고 진정한 애국보수같은 말을 하며 돌아서는 장면도 다 빠졌다. 남은 것은 정세가 어지러우니 딸을 결혼시켜 보호하려는 자르제 장군의 눈물겨운 부정과(……) 상사 처돌이 제로델의 구혼과, 앙드레가 불행해지면 자신도 불행해지기 때문에 결혼하지 않겠다는 오스칼만 남았다. 이러니 애니메이션만 봤다는 사람에게서 광기의 부친, 베르사유의 태극기부대같은 저 자르제 장군이 딸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 딸의 길을 응원해주는 아버지 아니냐는 잘못된 캐해가 나오지. 그리고 오스칼과 마리의 마지막 대면 씬 말인데. 지난 겨울을 겪고 난 한국인은 그걸 보면서 “마리 저거 지금 계엄령 때리려는 거 아니야”소리가 나오면서 마리에 대한 오만 정이 다 떨어지는(정 없음) 것이었다.

어, 그래도 오스칼이 군신 마르스의 아들로 살겠다 하는 장면 전에 다리가 나무인형처럼 되어 있는 채로 걸어가는 “걷기 시작한 인형” 장면과 그 뒤에 사슬에서 벗어나는 장면은 재해석으로는 좋았다……. 원작의 재해석으로도, TV판에의 오마주로도, 오프닝에서 마리오네트처럼 묶여 있는 오스칼과의 비교도 그렇고.

그리고 이야기의 중심 서사 말인데. 이야기는 바스티유 함락 직후 오스칼의 죽음과 천국에서 앙드레와 다시 재회하는 모습으로 끝난다. 즉 이야기의 방점은 오스칼과 앙드레의 사랑에 맞춰져 있는데. 여기에도 이런저런 문제가 있다.

원작에서의 앙드레는 하인이지만 궁에 출입하고, 총명하고 정세 판단이 빠른 오스칼과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충분히 주고받을 수 있을 만큼, 그리고 “누벨 엘로이즈”를 읽으며 자신의 사랑과 신분의 차이에 괴로워할 만큼 지성이 있는 사람이다. 여기 더해서 데자키 오사무 판에서는 본인이 먼저 혁명 사상에 관심을 두는 모습도 보였고.

2025년의 앙드레 그랑디에에게 남은 것은 사랑과 갑빠 뿐이다. 사실 앙드레는, 지금 기준으로 보면 자기가 오스칼을 사랑하고, 그 감정을 말하지 못한 채 오래 억눌러왔다는 이유만으로 순간의 격정을 못 이겨 강간하려 하고, 오스칼이 다른 남자와 결혼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절망해서 동반자살….. 아니, 살해 후 자살을 꿈꾸던(그러나 이 시점에서 오스칼도 이미 자신은 앙드레 때문에라도 결혼하지 않는다고 하던 상황이었으니까 참작의 여지는 있겠다) 여러모로 문제가 많은 인물이었지만, 그래도 두 사람의 사랑과 신분의 갈등이라는 측면에서는 좋은 장면들이 많았던 인물이다. 이를테면 두 사람 사이의 성적 텐션은 잔뜩 높아진 상태로 파리에 지금 상황이 이렇고 저렇고 이야기하면서 아니야, 이런 말을 하려던게 아닌데 하고 생각하는 장면이나, 자르제 장군이 국민의회 의원들을 구하기 위해 명령을 어기고 달려나간 오스칼을 반역자라고 부르며 죽이겠다고 할 때 자신이 평생 주인님으로 섬겨 온 자르제 장군을 막아서며 자신의 사랑으로 신분을 넘어설 순 없어도 이 사랑은 진실이라고 말하는 장면 같은 것이 좋은 건데. 음.

사실 앙드레에게 중요한 게 뭐겠습니까. 아무것도 가진 것 없지만 너에 대한 나의 이 사랑 하나는 순정한 것이다, 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네 곁에 있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며 필요하다면 네게 내 목숨을 바칠 것이다. 아니, 안 필요해도 받아다오. 내 목숨은 네 것이다. 그거잖아요. 그리고 이 사랑의 가장 큰 걸림돌은 그의 신분이고요. 그는 사랑하지만 구혼할 수 없는 몸이라서 괴로워하고, “하늘”을 향해 총을 쏘고, 함께 죽는 것 밖에는 같이 있을 방법을 찾지 못해서 독배를 준비하고, “난 아무데로도 시집가지 않는다”는 말에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그저 오스칼을 구하기 위해 자르제 장군 앞에 뛰어들어 막아서는 그 모든 시퀀스 없이 외모만 남다니.

(하지만 역시 강간미수는 어떻게 해석을 해도 선해의 여지가 안 나온다. 역시. 그리고 그런 문제가 있어서인지 이번 극장판에는 삭제되어 있다.)

(독배 씬은 원작을 그대로 살렸는데, 사실은 한국 뮤지컬 베르사유의 장미 “독잔” 쪽의 어레인지가 좀 더 시대에 맞지 않았을까 생각하긴 한다. 뮤지컬은 또 마리 앙투아네트가 안 나올 만큼 너무 각색을 많이 하긴 했는데, 적어도 여기의 앙드레는 오스칼이 다른 남자와 결혼하는 걸 두고 보느니 동반자살을 하겠다가 아니라, 혼자 자살하려고 하다가 오스칼이 나타나서 “나는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을 거야.” 하니까 독을 쏟아버린다. 그래도 애니쪽 해석이 좋은 부분도 있는데, 독배 사건 며칠 뒤에 그대로 다시 앙드레에게 와인을 부탁하는 장면이다. 사실 제정신인 사람이면 누가 봐도 “미쳤나 쟤를 뭘 믿고 또 와인을?” 싶은 장면이지만 오스칼 본인으로서는 사랑인지 아닌지도 생각해 본 적 없을 만큼 가깝고 절실한 사람에게 자기 목숨을 맡기는 게 사랑의 다른 표현이었을 것.)

어쨌든 그 앙드레 그랑디에에게서 신분을 넘어서려고 몸부림치는 그 모든 것이 빠진 채 충직하게 오스칼 곁에 있는(+오스칼을 사모하는 것을 자르제 장군 빼고 모두가 알고 있는) 소꿉친구이자 잘생긴 하인으로만 남아있다가, 7월 12일 밤으로 넘어가서 실은 얼굴만 잘생긴게 아니라 갑빠도 상당했다, 만 어필하고 넘어가 버리니까 화면은 예쁜데 절박한 느낌은 하나도 없었다는 게.

채다인님이 보시고 오신 뒤 “베르바라 올드팬들 회춘하는” 장면이었다고 표현하셔서 오, 하고 봤는데, 사실 이 베드신이란 것이, “내일 우리가 하려는 것은 혁명이고 그 혁명은 이 집과 베르사유, 과거와의 단절이자 우리를 얽어매던 신분제를 넘어서는 것이다. (어차피 오스칼은 폐결핵에 걸려서 남은 목숨도 길지 않지만) 우리는 그 혁명이라는 제단에 목숨을 바칠 것이며 우리의 사랑은 죽음을 통해 맺어지리라”는 그런 것이잖아요. 앙드레 그랑디에의 사랑 역시 원작에서도 시작부터 끝까지 목숨을 바치겠다, 나를 죽여도 좋다, 같이 죽자, 나를 죽여도 좋으니 오스칼의 목숨만은, 그런 식으로 매사 죽겠다, 죽겠다 하는…… 아니, 타나토스에 닿아 있는 것이고.(앙드레의 사랑과 타나토스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전에 쓴 고찰 : 베르바라의 앙드레 그랑디에 자공자수 동인지라는 관점에서의 “제라르와 자크”(이게 무슨 소리야)를 보세요) 이 극장판에서도 그렇다. 나오는 온갖 노래에 보답받지 못해도 마지막 끝까지 함께 하겠다거나 자기 목숨을 주겠다는 소리밖에 없었던 것 같았는데. 쌓아올린 죽음과 사랑, 타나토스와 에로스가 한 침대에 누운 듯한 이미지는 싹 사라지고, 길고 아름다우며 30년간 서로 바라보던 두 사람이 별다른 절절한 극복 없이 혁명하러 가기 전에 같이 자는 장면이 되어 버려서…… 화면은 아름다운데, 진지하게 보기가 어려웠다.

전체적으로 돈을 정말 아주 많이 들인 동인지 같았다……. 최애캐들이 움직이는 동인지……… 가장 아름다운 장면들이 움직이는데 중간중간 맥락은 다 생략되고…….. 작화 깨진 장면은 거의 없는데 중간에 가면무도회에서 사람들 동작이 너무 심하게 동기화가 되어서 좀 기괴했고. 그래도 작화에 공을 아주 많이 들인 것은 알겠다. 애니화 미모 버프를 가장 많이 받은 것은 페르젠, 그 다음은 제로델이다. 마리와 오스칼은 얼굴이나 체격, 성장과정이 그대로 이야기 흐름을 따라가는데, 14세부터 19세, 20대 초반, 근위대 나올 무렵, 30대 중반이 다 달라서 성장까지 섬세하게 묘사한 느낌이다. 전체적으로 “베르바라에서 사람들이 뇌내로 여러 번 돌려 볼 만한 장면들을 모아서 움직이는 화보집처럼 만든 애니메이션”으로 연출 면에서는 솔직히 낙제점에 가깝지만 화면이 아주 아름답다. 그렇다고 다시 안 볼 것은 아니고. 우리말 더빙과 영어 더빙으로도 봐야 하니까 아직 최소 두번은 더 봐야 한다.

PS) 의외로 미역이가 많이 나옴. 어린이와 함께 봤는데.

“근데 미역이는 어떻게 하는 말마다 느끼하지.”
“미역이한테 참기름을 잔뜩 부은 것 같아. 비슷한 대사를 오스칼이 하면 안 느끼한데 미역이 하면 느끼해.”
“물 붓고 끓이면 미역국이 되는 건가.”
“맛있겠네.”

뭐 그런 의미불명의 대화를 하며 봤음.

PS2) 베르날 고작 그만큼 나왔으니 역시 피규어는 고사하고 아크릴도 안 나올 것 같더군. (우울) 크흐흑. 그래도…… 그래도 오스칼님 넨도 같은 건 나오지 않을까? 어? ㅠㅠㅠㅠㅠ

+

PS3) 불어는 고등학교때 배운 것을 마지막으로 손도 대지 않아서 아는 말은 je ne sais pas français 밖에 없지만
“화면은 예쁘지만 전개는 속터지는 베르바라를 불어 더빙으로 보면 좀 낫지 않을까. 요시나가 후미 선생님 말씀대로 그냥 15분 섹스하고 끝날 때 까지 싸우는 것이라고 치면.”
뭐 그런 생각으로 불어 더빙과 한국어 자막을 켜고 보기 시작했고요.

……..”아, 이거 프랑스 사람이 보면 ‘시발 혁명이 장난이야’ 할 것 같은데.” 하고 생각하고 말았다. 아니, 물론 화면은 여전히 예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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