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 김장하

87년 마산과, 위안부 할머니 문제들, 부마 민주항쟁, 각종 이 지역의 역사들을 취재하고 기록했던 기자 김주완은 정년퇴임을 3년 남기고 경남도민일보를 그만두고 나온다. 그는 진주에서 남성당 한약방을 운영하는 한편, 진주에서 문화와 역사, 약자들과 청년들을 위한 후원을 아끼지 않았던 진주의 명사 김장하를 30년째 취재하고 있다. 김장하는 자신이 최대 후원자로 있는 진주신문 인터뷰도 안 하는 사람이었으니, 김주완의 취재에 선뜻 응할 리 만무했지만, 김주완은 그럼에도 김장하를 계속 취재하며, 그의 삶을 자기도 모르게 본받고 닮아가려 하고, 김장하는 김주완의 기자 인생에서 어떤 지표가 된다. 김장하 선생 같은 분도 검소하게 사시는데, 적어도 부정한 돈을 받는 기자가 되어선 안 된다는, 그런 지표가.

진주에서 쑥밥, 고구마밥 지어 먹던 가난한 집 넷째아들로 태어난 김장하는, 해방 이후 처음 한약사 자격시험이 있을 때 18세의 나이로 합격한다. 그는 미성년자라서 합격 보류를 받았다가 다음 해에 자격증을 받고, 사천에서 남성당 한약방을 경영한다. 김장하는 싸고 효과가 좋은 약을 짓는다고 소문이 나서, 사람들이 번호표를 받아서 줄을 서고, 이웃의 다른 한약방들도 함께 장사가 잘 될 만큼 손님이 많이 몰렸다. 그런데 김장하는 그렇게 돈을 벌고도, 승용차 없이 자전거를 타고 다녔고, 낭비하는 모습을 보이지도 않았다. 그의 한약방에는 아직도 “금성” 에어컨이 돌고 있을 정도다. 대신 그의 돈은 진주를 위해, 각종 사회사업에 쓰였다. 진주 가정폭력 상담소 개소에 지원하고, 가정폭력 피해여성 피난시설을 만들 때에도 가구마다 독립적으로 지낼 수 있게, 제대로 만들 수 있도록 도왔다. 자기를 드러내진 않으면서도 여성 인권 문제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평생 관심을 가졌다. 백정들의 신분을 철폐하고자 하는 평등 운동이었던 진주의 형평운동에 깊은 애정을 갖고 있었고, 형평운동 기념사업회의 초대 이사장을 맡으면서도 각종 새로운 차별들을 없애야 한다고 생각했다. 시민주 700명이 모여서 만들어진 진주신문도 꾸준히 지원했다. 진주신문이 적자 끝에 문을 닫을 때 보니, 매달 적자가 날 때 마다 김장하가 지원한 것이, 정산할 때 헤아려보니 10억 가까이 되었다. 연극 극단 현장에서 공연할 극장을 옮기게 되었을 때에도, 형평운동 강상호 선생의 묘가 다 무너져 가는 것을 보수할 때에도, 김장하는 아낌없이 지원했다. 남성당 한약방의 이름을 딴 남성문화재단을 만들어 문예행사를 운영하다가, 재단을 해산한 뒤에는 그 기금을 경상국립대에 기부했다. 주변 사람들은 그를 두고 남에게 살게끔 해주는 사람이라며, 김장하 덕분에 살아난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고 말한다. 1984년에는 명신고등학교를 설립했는데, 학생들의 교육 문제에 지원을 아끼지 않고 교사들의 복지에도 신경을 쓰며 학교를 키워 나가다가, 학교가 본궤도에 오르자 식당이나 도서관, 체육관 등을 싹 증축한 뒤 국가에 헌납했다. 그 액수는 110억원, 김장하의 나이는 40대 초반이었다.

나는 아프고 괴로운 사람을 상대로 돈을 벌었다. 다른 직업을 선택했다면 번 돈으로 호의호식 했겠지만, 그 소중한 돈을 함부로 쓸 수가 없어서 사회 환원을 시작했다.

누구를 만나는가, 어떤 사람을 만나는가, 그 사람에게서 무엇을 보고 나에게 어떤 순간이 왔을 때 그 사람의 형상을 마음 속에 그려보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사람과의 만남이 어떤 사람의 인생을 바꾼다면, 그것은 바로 그 형상을 마음속에 떠올릴 수 있는가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인간 김장하의 삶의 방식은 그런 식으로 기자 김주완의 마음 속에 형상화된다. 기득권자와 권력자들, 토호들의 악행을 보도해 왔지만 그런 기사가 나간다고 해서 사람들이 바뀌지 않는 것을 보았던 김주완 기자는, 채현국이나 김장하같은 이들을 취재하고, 그들의 선함이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을 보면서, 이런 의로운 사람들을 알리는 것이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유용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진주신문 김경현 기자도 그렇다. 김장하는 김경현 기자에게 친일 문제를 취재해 보라고 말한 적이 없었지만, 김경현은 김장하의 삶을 보며 기자로서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진주 전체의 인사들을 조사해서 일제강점기 인명록을 만든다. 진주고와 대아고 등 매년 2, 30명에게 장학금을 지원하고, 대학에 가면 등록금도 지원했지만 그는 학생들에게 딱히 잔소리를 하지 않고 학생들의 이야기를 듣기만 했고, 도움이 받는 학생들은 후원자에게 위축되지 않았다. 헌법재판관 문형배는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이 사회에 갚으라”는 말을 기억한다. 어떤 이는 “부모형제가 등록금을 내주는 것도 아니고 남이 내주는데 데모하고 감옥에 가서 죄송하다”고 말하지만 김장하는 민주주의를 위해서 학생이 희생하는 일이라며 응원한다. 재판하는 사람도 있고, 재판받는 사람도 있고, 서울대 가더니 머리 깎고 스님이 되어 돌아온 사람도 있고, 등록금을 받은 이들의 면면은 다양하다. 하지만 그들은 김장하의 삶을 거울삼아 닮아가려 한다. 진주문고 대표 여태훈의 표현대로라면 “최악의 선택을 못 하게 하는 브레이크 같은 분”인 것이다. “내가 이런 짓을 했을 때 김장하 선생님께 부끄럽지 않을까” 생각하게 만드는 사람.

김장하의 삶을 요약하다 보면, 마치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는 일만이 훌륭하고 의미있는 일 보일 수도 있고, “김장하 키즈”라고 언급하는, 그의 장학생들 중에 교수나 헌법재판관 등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 많은 것에 먼저 눈이 갈 수도 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점을 대단하다고 말하면서도, 그런 일은 본받고 싶다고 쉽게 본받을 수 있는 일도 아니지 않나 생각하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눈이 가는 것은, 저 “내가 이런 짓을 했을 때 김장하 선생님께 부끄럽지 않을까” 하는 부분이었다. 부정하고 불의한 일에 손대지 않는 것, 깨끗하고 청렴하게 살고, 세금 같은 문제에 떳떳하게 처신할 것, 자신이 후원을 하더라도 자신이 아니라, 주인공에게 스포트라이트가 가도록 자신은 한 걸음 뒤에 있는 것. 내가 내것을 누구에게 주었다는 생각조차 버리는 무주상보시의 길을 가는 것. 하늘에 부끄럽지 않게 바르고 곧게 살아가는 것. 그런 사람은 그 존재만으로도 다른 사람을, 한번 더 등을 펴고 가슴을 펴게 만든다. 나도 그런 사람이 되어야 겠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그런 사람이 곁에 있는 사람에게, 어떤 선택과 유혹의 순간이 왔을 때 마음 속으로 그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게 한다. 그 사람의 얼굴과 목소리와, 그가 여기 있었으면 자신에게 할 말을 머릿속에 그려보게 만든다. 때때로 내가, 어떤 선택의 순간에 내 선생님을 생각하며 마음의 방향키를 잡듯이. 그런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적어도 나쁜 길로 가지 않게 만들 것이다.

그런 사람을 본받을 수 있다면.

혹은 내가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이 영상물은 그런 마음을 들게 만든다. 보는 사람의 마음에 어쩌면 뿌리를 내릴지도 모르는 선의 씨앗을 담아서.

이 이야기는 김장하라는 사람이 진주라는 도시에 뿌려놓은 자선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가 뿌려놓은 수많은 선의 씨앗들에 대한 기록이다. 자신이 손해를 보더라도 옳다고 믿는 일을 해내는 힘에 대한 이야기다. 사람들은 학교도 헌납하고, 형평운동, 시민운동, 그런데 기부하는 그의 헌신을 의심하며 형평운동에 관심 두는 것을 보니 출신이 백정이냐, 무슨 감투를 쓰려고 하는 짓은 아니냐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아님은 세월과 그의 삶이 증명하고 있다. 빨갱이다, 민족문제연구소 같은 데 기부하지 마라, 국가에 반성문 써서 제출하라는 욕설을 들으면서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들을 해내는 사람. 그러면서도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려고 노력을 많이 해왔습니다만 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 누군가는 그를 두고 “평생을 저런 생각으로 살았으니 허투루 살 수 없었다. 힘들었을 것이다.”고 말하지만, 그 허투루 살지 않으려는 마음이 사람을, 타인을, 더 나은 삶으로 이끌어갈 것이다. 카메라에 잡히지 않고 글에 다 담기지 않는 걸음걸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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