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울 때에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 슈테판 츠바이크의 마지막 수업 –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클라우스 그레브너, 폴커 미헬스 엮음, 배명자 역, 다산초당

이 책이 언제 나왔더라 하고 다시 보니 2024년 11월이었다. 아직 계엄이 시작되기 전에 나온 책인데, 읽으면서 계속 지금의 상황을 생각하게 된다. 출판사도 지금의 어두움을 느꼈기에 바로 지금 이 책을 들여온 것일까 생각하다가, 애초에 이 미공개 에세이들이 책으로 묶여 나온 것이 2023년인 것을 생각하고 다시 한숨을 쉬었다. 세계가 그만큼 엉망진창인 것이겠지. 세계대전을 앞둔 시기, 데미안이 싱클레어와 함께 올려다보던 구름 낀 하늘처럼. 세계 곳곳에서 전쟁과 학살이 일어나고 극우세력들이 발호하는 시기가, 두 번의 세계대전을 살았고 그 중 한번은 기자로서 종군했으며 두 번째의 전쟁에 깊이 절망하여 끝내 아내와 함께 자살하고 말았던 작가의 글이, 그대로 지금의 현실과 겹쳐져 보이는 것은.

젊은 시절 이 사소한 일화를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사실이라고 믿고 싶지 않았다. 내 안에서 거부감이 일었다. 역사적 순간에 그런 이기적인 무관심이라니, 말도 안 되었다. 19세기 말, 평화롭고 조용하고 전혀 극적이지 않은 분위기에서 자란 나는,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이라는 극적인 시대에는 유럽 사람 모두가 분명 끊임없는 열기 속에 살았을 거라고 믿었다.

중간에 나오는 “센 강의 낚시꾼”이라는 에세이에는, 콩코르드 광장의 단두대에서 루이 16세의 목이 떨어지던 바로 그 순간 어떤 사람들은 그 대단한 역사적 이벤트를 등지고 선 채 센 강에서 낚시를 하고 있었다는 일화를 읽었던 젊은 슈테판 츠바이크의 감상이 드러나 있다. 사실은 지금, 그 계엄에 대해서 “빨리 해결되었으니까 다행이지.”정도로 넘기는 사람들, 언론에서, 또 내란 주범들이 별 일 아니었다고 말하니까 정말 별 일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볼 때의 내 기분도 그랬다. 사실이라고 믿고 싶지 않았고, 인간이 어쩌면 저렇게 생각이 없냐, 해삼처럼 뇌가 퇴화된 게 아니냐고 욕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러나 츠바이크는 말한다.

이 시대의 우리는 정말로 세계적 격변을 모두 목격하고 그것에 빈틈없이 참여하고 있을까?

물론 그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우리가 세계의 일부임을 인식하고 할 수 있는 일들을 함께 해 나가야 하는 게 아닌가?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사람이 생각을 더 해야 하지 않나? 먼 나라에서 벌어지는 비극도 아니고, 바로 자신이나 이웃들도 희생자가 될 수도 있었던 일인데? 불과 몇십년 전에도 이런 일들이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자유를 박탈당했는데? 그러나 그에 대해 츠바이크는 다시 건조하지만 따뜻하게 말한다.

이 시대의 대다수는 역사가 아니라 언제나 오직 자신의 삶을 산다.

역사적 시대의 모든 낭만적 상상을 진실에 맞게 지우면, 역사적 사건이 벌어지는 바로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사건을 경험하고 그에 참여하기보다 오히려 그것을 잊으려 애쓴다고 고백할 수 밖에 없다.

사람들 대부분은 평범하지 않은 모든 사건에 관심을 둘 의향이 매우 강하고, 그것에 몰두하고 참여하려는 의지가 있으며, 심지어 그것을 소망한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모두 더 강한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이 자연법칙은 우리의 참여의지와 공감능력을 현명하면서도 경제적으로 제한한다. (중략) 전쟁에 대한 끊임없는 생각은 마음을 파괴하고, 시대가 우리에게 연민을 더 많이 요구할수록, 우리의 지친 영혼이 느낄 수 있는 연민은 더 줄어든다.

그리고 그와 함께, 츠바이크는 잠수함 테티스의 침몰과, 그 잠수함에 갇힌 채 죽었을 90명에 대해 사람들이 느꼈던 슬픔과 충격, 그리고 그 이후의 전쟁에 대해 이야기한다. 세월호에 대해, 그리고 뒤이어 일어난 많은 일들에 대해 생각하니 그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이해가 갔다. 약자에 연대하고 피해자에 연대한다고 해도, 우리는 너무 많은 사건들을 겪고 있고, 그 집중력과 자원들을 온전히 모든 사건에 쏟아부을 수도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그 일들을 끄집어내고 말하는 사람들을 존경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고. 그의 말대로, “우리의 심장은 너무 작아서 일정량 이상의 불행을 감당하지 못하는”것이고, 특히 전쟁과 수많은 혼란을 겪었던 어떤 세대들은 더욱 그러할 것이다. 비행기의 그림자만 보고도 폭탄이 떨어질 것을 두려워하며 몸을 숨기듯이, 고통을 많이 겪었던 세대가 이런 일을 외면하는 것에도, 답답하고 원망스러울지언정 그 무관심을 비난하는 것 또한 오만일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은 탄핵 반대 집회에 뛰어나가서 빨갱이 새끼들 다 총으로 쏴죽여버려야 한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지만 않아도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것일까.)

그가 나치에 대해 말한 글에서, 한 사람의 입을 위해 모두의 입을 침묵하게 했던 그 폭력의 시절과 고통스러운 침묵들에 대해 읽으며, 절망한 듯한 그의 물음을 다시 떠올린다. “여기가 20세기 맞아?”라는. 얼마 전 제6공화국 체제의 종말을 바라보며 우리 모두가 떠올렸던 그 의문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떠올린다. 츠바이크가 말하는 의지를. 우리가 이 시대를 어떻게 살아야 하고, 또 만에 하나 그래야 한다면 어떻게 죽어야 하나 고민했던 모든 순간들과 함께. 이 어두운 시대에 글을 쓰는 사람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저항하고 의무를 다해야 하는 것의 의미를.

그러나 이곳 자유국가에서 우리가 누리는 바로 이 자유가 우리 작가들에게, 우리 시인들에게 신성한 의무를 부과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인생 전체를 통틀어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의무일 것입니다. 이미 반쯤 파괴된 혼란스러운 세계 한복판에서, 이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도덕의 힘과 무적의 정신을 흔들림없이 믿게 하는 것은, 오늘날 말과 글을 가진 우리의 사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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