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맞아 허새로미 선생님의 영어강좌를 듣고 있다. 새해라서 영어를 다시 시작할 마음이 든 것도 있고, 지난번 중국에 갔을 때 영어가 들리긴 하는데 내가 대답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 좀 갑갑하고 분해서. 첫 주 수업에 여러 감정들을 카테고리별로 나누어 놓은 단어표를 보여주셨는데, 그 단어표에 들어있는 단어들을 하나하나 읽어보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영어로 이 다양한 감정 표현을 하는 것은 고사하고, 요즘은 한국어로도 이렇게 세분화된 감정 표현을 사용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생각이. 온갖 감정 형용사들은 쿨하고 쩔어주고 찢었고….. 심지어는 배설을 묘사하는 형용사 등으로 간단하게 대체되어 버린다. 하나하나의 감정이나 느낌을 구분해서 형용사를 쓰고 있으면 지루해 하거나, 꼰대나 선비같다고 생각하거나, 심지어는 그 형용사를 못 알아들어서 엉뚱한 뜻으로 오해하고 화내는 사람도 있다.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나오는 엄연한 모국어인데 대체 초등학교때 뭘 한 걸까.) 언어가 체라면, 내가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카테고리를 만들고 분류할 수 있는 기준일 텐데, 그런 사람들에게는 감정 역시 희노애락 네 가지도 안 되는 걸까. 표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하다가, 이 선생님 수업이 재미있어질 것 같았다. 실제로 계속 에세이 숙제가 나오는데, 숙제를 하는 것이 쉽진 않았지만 “글을 쓴다”는 것 자체는 내게 익숙한 일이다 보니 익숙하지 않은 언어로 익숙한 일을 하는 것에 대한 흥미진진함도 있었다. 쓰면서도, 우리집 어린이들이 나랑 말싸움을 하다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정확한 단어로 집어내지 못해서 억울해하는 순간들이 떠올랐고, 다시 그 에세이를 줌으로 선생님과 의사소통 하며 첨삭받는 과정에서 다시 소통에 대해 생각한 것도 있었고.
그래서 연휴에 이 책을 읽었다.
‘감동을 주는 실화’에서 감동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정서였을까? 슬프다는 뜻일까? 희망적이라는 뜻일까? 비극적이라는 뜻일까? 교훈을 남긴다는 뜻일까? 보기에 즐겁다는 뜻일까? 왜 나는 감동 실화라는 그 간단한 소개에 반감을 느꼈을까? ― 종잡을 수 없는 ‘감동’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표준국어대사전을 찾아보았더니 “크게 느끼어 마음이 움직임”이라 되어있었다. 한영사전을 찾아보았더니 ➊ be moved ➋ be impressed ➌ feel emotion으로 번역되어있다. 모두 어떤 느낌을 묘사할 뿐이지 감정의 실체를 알려주지는 않는다. ➊은 그저 ‘마음이 움직임’이고 ➋도 ‘(무언가) 인상 깊음’이다. 게다가 ➌은 말 그대로 ‘감정을 느낌’이다. 그렇다면 어떤 영화나 이야기가 감동적이었다는 건 그냥 ‘그 작품을 접하고(불특정한) 감정을 느꼈다’라는 의미일 뿐이다. ‘감동’이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감동적인 영화”를 검색해보았더니 그야말로 액션과 호러 장르를 빼고는 모두 감동적인 영화에 해당되는 것 같았다. 감동적인 동물 영화, 감동적인 사랑 이야기, 죽다 살아난 감동 실화……. 동물이 죽거나 착취당하는 경우에도 여전히 감동적이었고, 주인공이 죽거나 실의에 빠지는 내용이지만 어쨌든 감동적인 사랑 영화였으며, 납치당한 자녀를 필사적으로 찾아 헤매다 결국 찾지 못한 이야기도 엄마의 감동적인 사랑에 관한 이야기였다. 우리는 감동이 무엇이며 어떤 식으로 느끼는지에 대한 합의가 없이 그 단어를 널리 사용하는 것 같았다.
……제 말이 그 말입니다. 한국사람들은 한국어를 마구 뭉뚱그려서 대충 쓰는 데 너무 익숙해져 있어요. 심지어는 글 내부에서 필요에 의해서 섬세하게 단어를 구분해서 쓰고 있는데 편집자가 “중학교 1학년이 읽어서 이해할 수 있게 쓰세요”하면서 뜻이 미묘하게 다른 A’와 A”와 A”’를 전부 A로 쓰게 하기도 한다니까. ㅠㅠㅠㅠㅠㅠㅠ 가끔 한국어를 너무 심하게 뭉뚱그려 쓰는 사람을 보면 “저 새끼는 지금 자기가 무슨 소리를 하는 지도 모르고 저 단어를 쓰고 있네”라는 소리를 빙 돌려서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릅니다.”하고 빈정대기도 하는데(물론 예수님은 교회도 성당도 안 다니는 인간이 이 말을 빈정거리는 용도로 쓸 거라고는 꿈에도 상상 못 하셨겠지) 정말로 말이죠. 그냥 “감동실화” 그래놓고 어떤 카테고리의 감동인지는 말을 안 해준다니까. 하아.
현상에 이름이 붙고 진단이 따르고, 그 언어를 통해 바깥과 연결되는 경험은 거의 모든 것을 바꾸었다. 누구도 나를 도울 수 없을 때, 나조차 나를 돕는 데 관심이 없을 때 모든 것을 달라지게 하는 일은 아주 작은 데서 시작하는지도 모른다. 외부의 말로 붙은 이름을 배우는 것, 그 이름을 통해 내가 혼자가 아님을 아는 것. 내 고통이 세상에 나밖에 모르는 것이었다면 이름이 붙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이름을 알고, 더듬더듬 읽고 그것이 남긴 흔적을 따라가는 일이 낫는 일의 시작이었다. (중략) 여기에 이름이 있고, 같은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건 한참 뒤에야 알았다. 영어로 검색을 할 수 있게 되면서부터였다. 둘 다 강박장애OCD, obsessive-compulsive disorder를 겪는 사람들에게 흔히 발견되는 증상이라고 했다. 손끝을 뜯는 것은 더마틸로마니아dermatillomania라 불리며 신체에 집중된 반복 행동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세상에는 나 말고도 몸의 여기저기를 쥐어뜯으며 마음의 안정을 찾는 사람이 많으며 그들은 괴물이 아니라고. 모근을 뜯어내는 강박 증세는 트리코틸로마니아trichotillomania라 부른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서로에게 질문하고, 자기의 경험을 나누고, 도움을 주고받고 있었다. 이 증상으로 유명한 연예인에는 샤를리즈 테론, 케이티 페리, 나오미 캠벨이 있다고 했다. 저렇게 빛나고 아름다운 사람들에게도 있는 것이 나에게 있다니, 안심이 되었다.
옛날 판타지 소설 중에는 적의 “이름”을 파악하거나 합당한 “이름”을 붙여야만 물리칠 수 있는 이야기들이 있었다. 현상이든 고통이든, 이름을 붙이지 않고 무명속에 놓아두면 맞서 싸울 방법도 없는 법이다. 장미가 다른 이름으로 불려도 여전히 향기로울 거라는 줄리엣의 말은 그가 아직 어린 소녀이고, 일물일어라는 말을 못 들어봤기에 할 수 있는 말이겠지. 그런 줄리엣조차도 “죽음”과 “사랑하는 로미오의 죽음”이 서로 다르다는 것은 종국에는 알았을 것이다. 그와 함께 하기 위해 무덤에 묻혔던 자신이 결과적으로 그에게 어떤 고통을 주었는지도. 이 책을 읽으며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것은 이런 대목들이었다. 하나의 단어가 대체 불가능하게 그 자리에 들어맞는 일물일어적인 감각과, 그 감각을 “대충 뭉뚱그리고” “그나마도 상위 개념의 단어를 쓰는 게 아니라 신조어나 비속어로 대체하며” 둔탁한 언어를 쓰고, 상대가 그런 둔탁한 언어들을 “눈치로 알아차리기를” 바라며 나아가 자신의 감각조차도 둔감하게 만드는 현상들에 대해서. 사실 아이를 키우면서 가장 신경쓰는 부분 중 하나가 한국어를 명확하게 쓰도록 만드는 것인데, 영어 조기교육이나 수학 선행학습보다 한국어 단어를 미묘한 단계까지 구분하게 만드는 게 더 급하다고도 생각한다.
책을 읽으면서 이 선생님은 정말 “눈치”에 포함된 사회적 기술과 상하관계와 그런 것이 주는 압력들을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증오하시는구나 생각하고 좀 쓰게 웃었다. 남의 신호들을 읽을 수 있는 것과, 그 신호들과 언어가 어긋났을 때 어느쪽을 따르느냐는 다른 문제인데, 나는 주로 언어를 따르고, “당신이 이렇게 말했지 않느냐”고 따져 묻다가 싸가지 없는 인간이라는 소리를 종종 듣는다. 원하는 게 있으면 말을 똑바로 하든가. 자기는 이거 필요 없다고 말하면서 다른 신호만 잔뜩 보내면, 알아서 모시라는 거야 뭐야. (웃음) 그렇게 편리하게 상황을 왜곡하고,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떠받들기를 요구하는 데는 종종 교묘한 말장난들이 쓰인다. 자기 자식 또래의 어린아이를 폭행한 성인 남성에 대한 기사에 “손찌검을 했다”며 가해자에게 이입시키는 것 처럼, 자신에게 항의를 하거나 지적을 하는 여성에게 “예쁘게 말하라”며 입을 막는 남성처럼. 어떤 이들은 언어를 통해 상대를 통제하려 들고, 자기 언어를 갖고 말하는 사람에게 정이 없다는 둥, 너 나 무시하냐는 둥 하며 가스라이팅하고, 때로는 정확한 높임말을 구사하며 따지는 상대에게 “위아래가 없다”고 맥락없이 욕을 해댄다. 언어는 체이고, 카테고리이고, 개인이 세상을 인식하는 틀이기 때문에.
3차원을 즉물적으로 이해하고 거기에 집착하는 언어를 보조 수단으로 둔 이후로 내가 세상을 보는 방법은 조금 달라졌다. 어제 인천공항에 도착한 친구에게 “언제 도착했냐”라고 묻지 않고 “언제 날아 들어왔느냐fly in”라고 물어보게 되었다. 요리 레시피를 볼 때 닭 가슴살을 프라이팬에 대충 던져 넣을지toss, 잘 눕혀 놓을지lay, 마구 쏟을지dump를 세심하게 구분하게 되었다. 올리브 오일을 그냥 부었다pour고 하면 되지 굳이 방울져 떨어지게 했다drip고 말해야만 성이 풀리는 언어를 내 안에 받아들이며 생긴 변화였다. (중략) 영어는 공간을 자꾸 말 안으로 끌어들이고 싶어 했다. 위면 위고 아래면 아래지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냐는 간명한 한국어와 달리 영어는 자꾸 위를 on이랬다가 over랬다가 above랬다가 헷갈리게 굴었다. 심지어 어떤 때에는 up이 위라고 했다. 이차원의 위와 삼차원의 위를 구분하려고 들었다.
영어가 한국어보다 나은 언어다, 라고까지 말할 생각은 없지만 예전에 대학 다닐 때 위상수학(!!!!) 교수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다. 분야에 따라 다르겠지만 적어도 위상수학을 다룰 때 한국어로는 명료하게 표현되지 않는 것들이 영어에서는 명료하게 표현된다고 말씀하셔서, 그건 애초에 위상수학이 영어권 국가에서 만들어진 수학이라 그런게 아닐까 생각했었는데…… 교수님은 아마도 이 공간과 차원을 다루는 방식이 다르다는 말씀을 하고 싶으셨던 것 같다. 그리고 그런 면들이 이공계통 책에서는 전반적으로 영어가 더 사용되는 이유가 아닐까를(그래서 문과쪽은 대학교 전공 책도 번역서가 많지만 이과쪽은 1학년부터 바로 원서로 수업하는 것이 아닐까.), 이 책과 요 며칠간의 수업에서 새삼스럽게 다시 깨달았다. 나아가 한국어의 시제와 영어의 시제 사이에서, 어떤 사람들은 시간을 바라보는 방식 방식 자체가 달라지기도 할 것이다.
한편 그와 별개로 이번 몇 번의 수업 중 숙제에 “겐지 이야기”에 대한 설명을 한 적이 있는데, 분명히 난봉꾼의 이야기이지만 나름 진지한 구석이 있었던 이야기였을 겐지 이야기의 내용을 영어로 요약하다 보니 정말 기괴한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언어가 가진 관점과 시각은 같은 이야기를 다르게 보이게 할 수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