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

데미안 : 2024년 12월 계엄과 관련한 단상

어릴때 데미안을 읽으면서 제일 혼란스러웠던 부분은 데미안이 전쟁에 찬성하지 않고, 전쟁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고, 자신과 같이 카인의 표식, 용기와 자유의지를 지닌 이들이 그런 세상에서는 먼저 처단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장교로 제일 먼저 참전하는 대목이었다. 사실 제1차 세계대전을 소재로 하는 매체에서, 아니, 다른 전쟁이라고 해도. 그 창작물 속 많은 청년들은 군대로 간다. 그 중에는 “제군들, 나는 전쟁을 좋아한다” 어쩌고 하는 미친새끼도 있지만, 전쟁에 동의해서 싸우는 것이 아니더라도, 나라를 위해 이 한 목숨 바치겠다고 결의하고 전쟁터로 가거나, 가족을 지키기 위해 전쟁터로 가거나, 반전주의자이자 평화주의자인데 끌려가거나, 자기네 나라는 전란에서 한 발 물러서 있지만 연인의 조국을 지키기 위해 전쟁터로 가거나, 그런 인물들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막스 데미안은 여기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는다. 그는 영리하고 단정하고 남의 호감을 살 만 하게 생겼으며, 적당히 남들 눈에 이상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수완좋게 겉치레를 할 줄도 알지만 그 본질적인 면에서는 “카인의 표식”을 가진 사람, 자아가 강한 사람이다. 그는 국가를 위한 전쟁이나, 애국심, 순종, 충성, 그런 체제순응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못해, 그런 상황에서는 극단적인 애국주의자들 손에 죽임을 당하지나 않으면 다행일 인물이다. 그런데 그런 인물이 왜 전쟁터에 앞장서 가고, 끝내 죽음을 맞는가……

그러다가 지난 한달여의 시국을 돌아보면서, 사람들의 여러 모습을 보았다. 어떤 사람들은 12월 3일에 말로만 듣던 계엄령이 선포되자 겁을 먹었지만 바로 일상으로 돌아갔다. 심지어는 자고 일어났더니 계엄이 터졌다가 해제까지 되었다며 “러키비키”하다는 사람도 있었다. 해제되었으니 된 거 아니냐 하는 사람도 있고, 심지어는 극우 유튜브의 말을 듣고 대통령도 계엄을 할 이유가 있었을 거라고 떠드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정신나간 사람들이 아니라, 순응적이고 온순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을 보수라고 말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그저 물처럼 흘러가는 게 좋고, 좋은 게 좋은 것이고, “나랏님”이 하자고 하면 응당 따라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다. 지금 이 추운 날씨에 헌법과 공화국이라는 지극히 보수적인 가치를 지키기 위해 깃발과 응원봉을 들고 거리로 나오는 사람들, 남태령에서 밤을 새우고, 광화문에서 명동까지 구호를 외치며 걸어가고, 한강진에서 은박담요를 뒤집어쓰고 눈을 맞으며 시위를 하는 이들은 사실 그렇게 순응적인 사람들도 아니고, 데미안 식으로는 카인의 표식을 가진 이들이다. 반골, 좌파, 빨갱이 소리를 듣던 사람들. 그 중에서도 12월 3일에 국회로 달려간 사람들에 대해 계속 생각하게 된다. 국회의원들과 국회 직원들, 그리고 시민들의 용기에 대해.

그런 상황을 곱씹다가, 문득 데미안의 마지막 부분에 대해 생각했다. 막스 데미안은 대체 왜 전쟁에 나갔을까. 자신의 통찰로 다가올 전쟁이라는 먹구름을 뻔히 예측했으면서도, 그는 왜 장교로 전쟁터에 나갔을까. 그것도 남들보다 먼저 전쟁에 뛰어들어야 했을까.

전세계가 휘말릴 정도의 압도적인 전쟁이라는 것은, 개인이 피하고 싶다고 생각한다고 피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는 이 상황에서 도망치거나 비겁하게 몸을 숙이고 순응하며 살 수 없었다. (어떤 가수는 “전쟁이 나면 나는 너랑 같이 도망갈래” 그런 노래를 발표하기도 했지만, 그건 사실 말같지도 않은 소리고……)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상황이기에, 순응하며 살거나 자유의지에 반해서 상황에 떠밀려가며 살 수 없었던 데미안은 그 운명에 맞설 수 밖에 없다. 그 끝이 설령 죽음이라 해도, 그는 전쟁터에 “끌려간”게 아니라 “타인의 목숨을 책임지는 장교로서” 먼저 지원해 가는 것으로 자신의 운명과 투쟁한 것이다. 한편 어떤 면에서는, 평화와 자유와 이상과 인류의 다음 한 걸음을 생각하는 그로서는, 전쟁이 불러올 야만이 일상이 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기에 차라리 죽음을 택했다고 볼 수도 있다. 죽고 싶지 않지만 자신의 이상을 관철하기 위해, 최후까지 자신의 삶의 주인으로 살기 위해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는. 그렇게 해석하면 데미안이 참전을 한 것도, 목숨을 잃은 것도,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의 청년들이 “데미안”을 품에 안고 전쟁터에서 죽어갔더라는, 1990년대에 읽은 “데미안”의 소개글에 나오는 말도 납득이 간다.

다행히도 2024년 12월의 사람들은 죽지 않았지만, 3일 밤 사람들은 죽음을 각오한 용기로 국회 앞으로 달려갔었고, 실제로도 정말 죽을 뻔 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하지만 데미안은 결국 그 전쟁으로 목숨을 잃는다. 운명에 맞서 싸우고, 끝내 죽음을 맞이한다. 그러나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데미안은 싱클레어가 자신의 내면에서 데미안을, 자신의 등불을,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만들었다. 이는 불교에서 말하는 스스로를 등불로 삼으라는 이야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근데 이 장면이 “눈을 감아 싱클레어…..” 였다. (……)

아이고, 헤세 선생님ㅋㅋㅋㅋㅋㅋㅋ

어떻게 자등명 법등명 이야기를 하다가 말고 세계 문학사에 길이 남을 BL적 모먼트로 날카로운 첫키스의 추억을 남기고 가시냐고요 저 장면으로 BL에 입덕한 사람의 숫자만으로도 대체. (생각하다보니 기도 안 차네.) 아니 정말, 저 장면으로 BL에 입덕한 사람 숫자가 못해도 지금 서울 인구+도쿄 인구만큼은 되지 않을까? (세어본적 없습니다. 지나가세요)

아니 그런데.

사실 저도 “눈을 감아 싱클레어” 농담 종종 하지만 사실 그 장면은 가슴 속에 등불을 가진 자의 의지를 이어 싱클레어와 독자의 안에 등불을 켜는 장면인걸요. 그러니까 데미안을 읽고 마음 속에 등불을 가진 자는 모두 데미안의 그 최후의 키스를 받은 사람인 것임. 그것은 카인의 낙인이고, 전세계의 입맞춤인 것이죠. 다시 한번 “아니 그러니까 헤르만 헤세 선생님!!!!”하고 허공에 한번 더 외친 뒤 이야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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