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부터 유치원생의 강력한 요청이 있어, 온 가족이 “사랑의 하츄핑”을 보고 왔다. 갔더니 좌석이 70% 이상 찬 가운데, 초등학교 5학년쯤 되어 보이는 남자어린이 서넛이 가방에 티니핑 열쇠고리 같은 걸 달고 “사랑의 하츄핑”을 보러 온 것을 보았다. 티니핑을 남아들도 많이 봤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실감이 났다.
스토리는 뻔한 것이, 자신의 단짝 티니핑을 만나기 위해 여러 티니핑을 만나보던 로미가 티니핑 도감에서 하츄핑을 발견하고 운명을 예감한다. 그러나 하츄핑은 저주받은 라미엔느 왕성 근처에 살고 있어서 국왕은 로미를 만류하는데….. 로 시작된다. 사실 이 도입부만 보면 어른이 관심가질 내용은 아니다.
그런데 연출이 화려하고, 뮤지컬 장면에서는 정말 돈을 아낌없이 쓴 티가 나며, 주요 장면의 레퍼런스가 한국적이면서도 재미있어서 지루하지 않았다.
일단 리암 왕자의 티니핑으로 라미엔느 왕성에서 쫓겨난 뒤 오랜 시간동안, 꽃잎이 지고, 단풍이 떨어지고, 눈이 쌓이도록 같은 자리에서 리암을 기다리던 트러핑의 뒷모습은 은행나무 침대를 연상하게 하고, 로미가 하츄핑의 집으로 들어가는 입구와 그 안에 펼쳐진 도원경같은 세계, 하츄핑의 작은 집을 중심으로 꽃이 가득한 그 세계는 연이외 버들도령 속 버들도령의 세계와도 같다. 그 하츄핑의 집과 꽃밭이 불타버리는 것도. 물론 불타버리는 과정은 다르지만.
로미와 하츄핑의 첫 번째 접촉에서 한국적인 아이돌 걸그룹의 모습에 프라고나르의 “그네”와 “천지창조”의 손가락 맞닿는 도상을 합쳐놓는 것도 그렇고. 로미가 리암(말)을 타고 라미엔느 왕성으로 달려가는 장면에서 트러핑의 분노로 파도가 다리 위로 올라오고 끝내 다리가 무너지며, 마치 바다 위를 달려서 성으로 들어가는 듯한 연출이 이어지는데, 이거야 당연하게도 겨울왕국 2의 오마주다. 정말 노린 장면이지. 게다가 겨울왕국 2에서 엘사가 성으로 달려가서 만난 것은 자기 자신이자 자신의 근원=어머니다. 그러니 겨울왕국 2를 보았던 관객에게 이 장면은 로미가 자기 자신=하츄핑을 찾아 구해내는 여정으로 받아들여진다.
하츄핑과 로미가 함께 하는 뮤지컬 장면에서 소녀혁명 우테나에서 밤하늘이 비치는 물 위에 장미가 가득한 모습을 연상하는, 물 위에 꽃잎이 가득하고 그 꽃잎이 갈라지며 밤하늘과 오로라가 비치는 장면이 나온다. 로미가 갇혀 있고 마음을 닫고 있던 하츄핑을 목숨을 걸고 구하고, 저주에 걸린 리암 왕자를 저주에서 해방시키고, 배신과 미움으로 원한을 품은 트러핑이 리암 왕자와 다시 마주하게 해주는 롤인 것을 생각하면 무척 납득이 가는 오마주다. 게다가 로미는 우테나처럼 분홍 머리카락이고!
그리고 리암 왕자 말인데, 예고편에 대놓고 미형으로 노리고 만든 왕자가 나와서 저건 뭐지 로맨스인가 흑막인가 또다른 한스새끼인가 하며 궁금했는데 리암 왕자의 롤은 놀랍게도 뎀셀 인 디스트레스였다. 그는 배신당하고 폭주한 트러핑의 저주에 걸려 동물로 변하고, 로미가 하츄핑을 구하러 가는 영웅적인 행보를 격려하고, 자신을 희생해서 로미를 성으로 데려다준 뒤 돌이 되어 버린다. 공주의 눈물이나 요정의 눈물이 저주를 푸는 이야기는 많고 이 시리즈에서는 하츄핑의 눈물이 때때로 기적을 일으켜 왔지만 왕자의 눈물이 저주와 원한을 푸는 건 정말 드문데 이 애니가 그걸 한다. 총 출연시간은 10분? 길게 잡아도 15분도 안 될 것 같은데 4기가 나오도록 얼굴 예쁜 척 말고는 하는 일 없이 호객용 요구르트 같은 빵집 오빠 3인방보다 더 많은 일을 한다.
그런데다 리암은 트러핑과, 로미는 하츄핑과 절절한 사랑에 빠져서 인간들의 로맨스는 그림자도 없다. 뭐, 하츄핑을 만나기 전의 이야기다 보니 로미가 원래 시리즈보다 조금 어려져서 열 살로 나오기도 하고.
이건 좀 아니다 싶었던 건 하츄핑과 로미의 마음이 통해서 둘의 키스로 로미가 변신하고 트러핑의 저주를 푼 것 까진 좋았는데, 여기서 변신 폼은 아무래도 1기의 프린세스 하트의 초초초절정 고퀄리티여야 하는 게 아니었을까…… 프린세스 트와일라잇만큼 세 보이는 프린세스로 변신할 일이었나…… 이것은 새 프린세스 인형과 의상과 마법봉을 위한 희생인가……. 그럴 거면 앞부분에 몬쥬 박사를 더 갈아서 굿즈를 만드는 게 나은 선택이 아니었을까……. 음.
트러핑에 대한 이야기는 부모가 반대하는 결혼 이야기로도, 반려동물에 대한 이야기로도 볼 수 있는데, 귀하게 키운 자기 아이가 근본없는 티니핑/자기 집안보다 격 떨어지는 배우자 후보나 동성 연인/길고양이를 데려와 단짝/배우자/반려동물로 삼은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서, 아이를 멀리 보내놓고 그 사이에 내쫓아버리는 부모와, 부모에게는 쫓겨났지만 자신을 데려왔던 아이를 믿고 한동안 기다리다가 아이가 돌아오지 않자 배신당했다고 생각하고 모두에게 복수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하면, 트러핑 이야기는 보는 시각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나올 수 있어서 흥미롭다. 다만 트러핑 일반 버전보다 흑화 버전이 더 예쁘다. 몽글몽글 보라 괴물 버전도 귀엽고. 거대 괴수같이 나오지만 베이스가 티니핑이다 보니 그냥 솜뭉치처럼 보여서 좀 귀엽다. 몇몇 어린이들은 무서워하는 듯 보였지만.
그리고 1기의 티니핑들이 좀 나오고, 특히 해핑과 라라핑이 “머리핀은 없고 크고 토실토실해져서” 나온다. ㅋㅋㅋㅋㅋㅋㅋ 자세한 상황은 보면 안다. 하나 더, 우리나라는 YS도 그렇고 문재인도 그렇고 평범한 관공서 국장님들도 그렇고 사람들을 마구 산으로 끌고가서 그런지, 이젠 로미 공주에게 얽힌 소녀 마리도 하츄핑 삼고초려에 따라가느라 며칠 연속 산에 끌려다닌다. 역시 한국에서 높은 사람과 잘못 얽히면 등산에 끌려다니는 것인지. 아, 정말……ㅋㅋㅋㅋㅋㅋ
………아니다, 숲이라고 꼭 산은 아니지. 산이라고 생각한 건 내가 송도 신도시에만 가도 산이 없네, 하는 한국인이라 그런 것일지도.
그리고 토요일 빠른 회차로 갔는데 특전은 이미 떨어졌다고……… 과연 티니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