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소설과 여러 비소설을 쓰고, 때때로 만화 스토리도 쓰고 있는 작가, 전혜진이다.글을 써서 돈을 받은 지는 23년,
“작가”가 된 지는 올해로 17년이 된다.
내 명함에는 종종 관계자들을 당황하게 하는 멘트가 적혀 있다.
“성실한 입금, 확실한 원고”라고.
그리고 미팅에서 명함을 건넬 때 그 멘트를 보고
“어이쿠, 무섭네. ㅋㅋ”같은 식으로 농담을 하는 이가 있다면,1여담이지만 그 멘트를 보고 헛소리를 하는 이들은 현재까지 100% 확률로 남성이었고, 한 명 빼고 전부 중년 남성이었다. 그리고 대부분 원고를 넘기고 책을 만들고 돈을 받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다.
나는 직감한다. 이번 일은 계약을 하지 말든가,
돈을 받을 기대를 버려야 하는 일이구나 하고.
계약서를 잘 읽고, 장부를 꼬박꼬박 쓰고, 아마도 평균적인 작가보다는 법에 대해 잘 알 뿐 아니라 이런 일로 법원도 종종 가 본 작가라고 해도, 작가로서 17년, 컴퓨터 잡지 같은 데 글을 쓰던 것까지 포함해 지난 23년동안 떼어먹힌 돈의 액수는 만만치 않다. 어릴 때에는 컴퓨터 강좌를 연재했던 잡지들에 돈을 떼어먹혔고, 신문물 좋아하다가 저 북토피아가 망할 때 피해자가 되기도 했다. 뜻이 있어서 하는 일이라 생각하고 싼 청탁료에도 불구하고 원고를 건넸더니, 계약서에 적힌 원고료에서 세금 떼고서 나머지 잔돈을 떼어버린 뒤 입금하는 경우도, e-book을 내면서 “종이책이 나오면” 정산해 주겠다는 조항이 든 계약을 했다가 끝내 정산을 못 받았던 적도 있었다. 자랑은 아니지만 바로 작년에도 원고료를 떼어먹혔다. 물론 사기꾼도 만나봤다. 그런저런 과정에서 느는 것은 내용증명 쓰는 실력이요, 법원에도 여러 번 왔다갔다 했지만, 여전히 수금은 쉽지 않다. 요즘은 정산일을 지키는 회사들도 많이 늘어나고 있지만, 경기가 어려울 때는 많은 회사들이 입금을 밀린다. 여기까지는 작가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기성은 먼저 정산해 주고 신인 작가들은 제때 정산해 주지 않거나, 심지어는 여성 작가들은 늦게 정산해주고 남성 작가들만 먼저 정산해 주는 회사도 있다.2그런데 출판만화 쪽은 더 심해서, 아예 남성 작가와 여성 작가의 원고료 자체가 달랐다. 2010년 무렵 공모전 출신 남성 작가가 잡지에 연재할 때 원고 1매당 35000원, 공모전 출신 여성작가가 1매당 30000원이었고, 비공모전 출신 여성작가가 1매당 25000원이었다. 물론 이 원고료는 잡지 게재용이고, 인세는 별도 정산되었다. 많은 출판사들이 노력함에도 불구하고, 젊은 신인 작가나 여성 작가의 열정페이를 뜯어먹는 출판사들도 분명 존재한다. 웹툰, 웹소설 쪽도 작가를 착취하는 면에서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고.3웹툰, 웹소설은 원고료 없이 인세에 해당하는 MG를 선지급하고, 그 MG에 해당되는 액수를 차감한 뒤에도 추가 분배금이 들어가지 않도록 온갖 독소조항을 계약서에 추가하고, 이를 지적하면 계약이 되지 않았다. 지금은 개선된 부분도, 더 나빠진 부분도 있다. 그리고 그 상태로, 원고료는 딱히 오를 기미도 보이지 않는게 현실이다.
그리고 그 모든 부당함과 불합리에도 불구하고 작가들은 글을 쓰고 만화를 그린다. 이들은 데뷔 전에는 아무도 읽어주지 않는 글이라 해도 잠을 줄여 여러 해에 걸쳐 습작을 거듭하고, 어떤 대가도 받지 않고 인터넷으로 공개하던 사람들이다. 심지어 작가에게는 원고 독촉을 밥먹듯이 하면서도, 정작 원고를 받아가서는 1년이 넘도록 교정도 안 보고, 원고를 넘긴 게 언제인데 계약기간이 끝나가도록 책이 안 나왔으면서도 뻔뻔하게 구는 일도 있지만, 나의 원고가 무슨 판촉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300화짜리 웹툰 웹소설에서 한 150화를 프로모션이라고 무료로 풀어버리면서도 “마케팅”이라며 손실 보전도 안 해 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들은 이러고 산다. 그러니 원고료를 현실화해라, 준다고 한 날짜에 돈을 줘라, 주간 연재하는 작가라도 1년에 몇 번은 쉬어야 하지 않느냐고 당연한 소리를 해도, “그러게 누가 작가 하라고 칼 들고 협박이라도 했느냐”며 조롱하는 소리가 나온다. 너희들 작가들은 대체 가능한 놈들이고, 어차피 이 짓 아니면 할 수 있는 일도 없지 않느냐는 식이다.
물론 그렇지 않다. 그놈의 원고료가 얼마나 짠지, 작가들 중 상당수가 다른 직업에 종사해서 먹고 살지 않는가. 아마도 낮에는 먹고 살자고 다른 직업을 갖고 살다가, 야간과 주말에는 글을 써서 꾸준히 팔고 사는 우리들 작가들이, “누가 작가하라고 협박했냐”고 낄낄거리고 조롱하는 놈들보다는 훨씬 유능하고 생산적으로 살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언제까지 이러고 살아야 하는데?
17년동안 글을 쓰면서, 작가로서의 인생이 조금 수월해진 계기가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에이전시를 만난 것이다. 협상이 덜 번거로워지고, 돈을 떼이는 일이 줄어들었다.
또 하나는 과학소설작가연대에 가입한 것이다. 작가들이 힘을 합쳐 도서전이나 행사에 참여해 내 작품, 내 이름을 알리기도 하고, 작가로서의 권리에 대해 지식을 공유하고, 어떤 문제에 공동 대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에이전시는 유료 서비스로, 모든 작가가 수월하게 이용하기엔 어려움이 있다. 협상이나 돈을 받는 문제도 어떤 업체를 만나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과학소설작가연대는 작가단체로서 상당히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고, 작가들에게 긍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지만, 모든 장르의 작가들을 아우르며 가입할 수 있는 단체는 아니다.
또 세상에는 다른 여러 장르의 작가단체들이 있지만, ‘직장협의회’와 노조가 다르듯이, 노조가 아닌 작가단체에는 한계가 있다. 실제로도 “좋은 게 좋다는”식의 친목단체나, 작가들이 돌아가며 감투를 쓰기 위한 도구가 된 작가단체도 적지 않다.
그래서 지금, 바로 필요하다.
작가의 권리를 포괄적으로 주장하고 작가들의 불이익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단체가
경력이 길거나 명성이 높은 작가가 아닌 가장 취약한 신인 작가를 위해 일하는 단체가
“어떤 불이익을 감수하고서라도” 글을 쓰며 살겠다고 결심한 이들이 집필노동자로서 최소한의 권리를 보장받고 자신이 일한 것에 대한 대가를 제대로 받을 수 있도록 지지하는 단체가
가장 취약한 하한선을 끌어올리기 위해 노력하는 단체가.
지금, 우리에겐 노조가 필요한 것이다.
출판계에 익숙하지 않은 신인 작가를 위해
사회가 낯설고 두려운 젊은 작가를 위해
각종 편견과 혐오로 차별받는 작가들과
아직 행운이 따르지 않은 작가들,
그리고 글을 쓰고 이야기를 만드는 일에 자신의 인생을 걸고 걸어가다가
원치 않은 돌부리에 발이 걸려 넘어진 모든 집필노동자들을 위해
작가노조가 필요합니다.
2024.06.16. 전혜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