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사시는 양원영 작가님이 부산을 배경으로 쓴, 이 웃다가 눈물이 나고, 화가 나서 눈물이 나는 이야기는 “눈물을 마시는 새”에 나오는 유명한 문장의 패러디로 시작된다.
합계 출산율이 0.98명에 이른 시대의 대한민국에 자식 볼 일 없는 운명을 맞이한 십 대 청년이 외로이 여름 길을 걷고 있었다.
원래 스무 살까지 못 살리라 하던 병약한 청년 한민주는 19세의 나이에 신내림을 받고 봉래도 삼신할망을 모시게 되어, 본인은 결혼도 못 하고 자식도 못 낳는데다 삼신으로서 아이를 점지해야 할 의무를 짊어지게 된다. 어머니인 주미는 신내림을 받은 대신 아들이 더는 아프지 않으리라는 것에 안도하며 민주보다 더 정성으로 할망신을 모시지만, 민주는 [고자 되기 vs 자살하기] 같은 인터넷 농담이나 떠올리며 자신의 일에 대해 시큰둥해한다. 아이를 점지받기 원하는 목소리를 듣고도 제대로 일하지 않던 민주는, 아는 형인 현우가 자기가 곧 10년동안 사귄 수지와 결혼하지 않겠느냐, 미리 애 점지받으면 좋지 않냐며 아이를 점지해달라고 하자 수지의 의견도 묻지 않은 채 아이를 점지하고 자신이 신의 힘을 사용한 것에 으쓱해 한다. 하지만 그는 곧, 인터넷 게시판에서 묘한 기시감이 드는 제목을 발견한다.
제목 : 10년 사귄 여친 임신시키러 감 ㅋㅋ
10년 사귄 여친 임신시키러 간다 ㅋㅋ
개년이 성격도 지랄인데 생긴 게 이쁘장해서 10년간 데리고 다녔음 이제 와서 나랑 결혼 못 하겠다고 하네 ㅋㅋㅋ
씨x년 내가 지한테 들인 돈이랑 시간이 얼만데 졸라 억울하네 ㅋ
임신시켜서 신세 조져놔야겠음
익명 : 여자 인생 확실히 조지는 법 알려 줄까?
└ 글쓴이 : 뭔데?
└ 익명 : 임신시키고 헤어지3. 그럼 여자는 책임지라고 하든가, 애 지우려고 할 거임. 어느 쪽도 니 손해가 아님 ㅋㅋ 손해는 그년이 더 많이 받음 zz
└ 글쓴이 : 와 씹 천잰가 ㅋㅋㅋㅋㅋ 그년 성격에 분명히 지울라고 할 거임
└ 익명 : 그럼 더 좋지, 낙태죄로 고소해 버리셈
수지는 임신을 하고, 민주를 찾아와 현우의 요구대로 아이를 점지했느냐며 따져 묻는다. 주미는 경악하고, 수지는 낙태를 하겠다고 선언한다. 민주는 자신이 생명의 웅덩이에서 가져온 영혼으로 점지한 아기를 낙태한다는 말에 냉정하다, 소름돋는다며, 여자들의 타산적인 선택이고, 죄라고 말한다. 그러나 수지는 현우가 임신할 의사가 없는 자신을 임신시키기 위해 콘돔에 구멍을 내고, 아이를 점지해 달라고 한 것은 엄연한 강간이라며, 병원을 소개받아 낙태를 한다. 수지가 바잣가랑이 붙들고 매달릴 줄 알았던 현우는 달려와 살인자라며, 낙태죄로 고소하겠다고 길길이 날뛴다. 수지는 소개받아 간 병원은 봉래도 여자들 낙태시켜 주는 전문 병원이라며, 현우의 모친도 그곳에서 딸을 낙태했음을 알려준다.
“대체, 왜, 왜 저였어요? 제가 어떻게 태어난 거죠?”
물기 젖은 목소리가 떨렸다. 내가 먼지만도 못한 존재라는 데서 오는 초라한 우울감에 눈가가 시큰거렸다. 할망신이 혀를 찼다.
“네 할미가 네 어미에게 세 명의 딸을 거부케 했느니라.”
“예?”
“네 어미는 딸 셋이 운명지어져 있었고, 네 어미는 셋 다 거부했다. 그건 네 할미의 업보다. 그릇이 딸을 태어나지 못하게 모체를 해하였다. 그렇게 약해진 그릇이 간절히 바라고 바라 내 억지로 안겨 준 것이 너였다.”
말인즉, 민주의 위에 누나 셋이 있어야 했는데 할머니가 억지로 낙태시켰다는 소리였다. 머리를 망치로 세게 두들겨 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한계에 달한 그릇이 억지로 제 운명도 아닌 영혼을 품었으니, 그 영혼은 허약하고 비틀려 너 같은 오래 못 살 놈을 태어나게 했느니라. 내 봉래도에 태어난 아이들을 웬만하면 아끼고 싶어 너 같은 놈이라도 살리려 직접 거두었다. 이제 알겠느냐?”
읽는 내내 현실에 저런 “임신공격”으로 여자 인생을 망쳐보려고 하거나, 임신시키고 헤어진 뒤 낙태죄로 고소해서 인생을 망치겠다고 굴던 놈들이 얼마나 많은가 생각하면서 분개하게 된다. 낙태죄가 위헌 판결을 받고도 아직 후속조치가 이어지지 않는 지금은 더욱 그렇다. (낙태죄 위헌 판결이 난 것은 “280일”이 출간되기 전의 일이었다.) 이 이야기에서 가장 비현실적인 부분은 삼신이 아이를 점지한다거나 봉래산에 삼신이 산다는 대목이 아니다. 현우의 부모가 쫓아와 아들을 욕하며 두들겨 패고, 주미도 모자란 아들 민주가 남의 집 딸을 불행하게 만들 일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대목이다. 대개의 한국에서 아들 둔 부모들은, 자기 아들 일에 대해 그 정도로 양심적이지 못하다…… 불행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