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문명생활

슬기로운 문명생활 – 위래, 블루픽

위래 작가는 오프라인에서는 뵌 적이 거의 없는 것 같지만 온라인으로는 정말 오래 봐 온 분 같다. 꾸준히 글을 쓰고, 꾸준히 무언가를 하는 분. 세상에는 많은 작가가 나타나고 또 사라지지만, 위래 작가는 느리지만 멈추지 않고 꾸준히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이 이야기는 전형적인 겜판소로 시작한다. 신의 관점에서 판타지 문명을 건설하는 게임 “로스트 월드”의 모든 컨텐츠를 다 깨고 난, 랭킹 1위인 “네뷸라(최성운)”는 갑자기 알딘이라는 자에 의해 게임 세계로 소환되어, 신으로서 이 세계에서 문명을 건설하고 다른 신들과 경쟁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초반의 네뷸라는 능률을 중시하고 냉철한(웃음) 남성 게이머 주인공처럼 보인다. 그는 광야를 헤매는 굶주린 리자드맨 종족, 그 중에서도 동료들을 구하려다 상처를 입은 의로운 리자드맨 라크락의 상처를 치유해주고, 그의 앞에 리자드맨들의 먹이인 푸른 딱정벌레를 내려주며, 라크락을 중심으로 이들 종족들에게 검은 비늘을 갖게 하며, 벌레들로 하여금 풀을 갉아먹게 하여 물소 떼를 리자드맨들에게 인도하는 등, 리자드맨을 번성시켜 신앙을 모으려 한다. 그리고 그런 네뷸라의 제사장이자 리자드맨 무리의 지도자인 라크락은 지위가 높아져도 용기와 의로움을 잃지 않으며 리자드맨들을 이끌고, 신인 네뷸라의 뜻에 거역하면서까지도 자신을 희생하여 악신에 맞선다. 그리고 그 순간 몰려든 모든 이들의 기도가 신앙 수치를 올려, 라크락은 네뷸라의 첫 번째 사도가 된다.

네뷸라는 이 세계에서 “신”이고 라크락과 리자드맨들의 운명을 변화시켰지만, 신의 가호를 입은 개체인 라크락 역시 네뷸라를 변화시킨다. 그는 자신의 백성들에게 애정을 갖고 그들을 위해 희생할 수 있는 군주였고, 그로 인해 신을 거역하며, 네뷸라의 레벨에서 불가능한 위업을 일으키며 사도가 된 기적적인 존재다. 네뷸라는 동생과의 과거가 있고 승부에 집착하지만 기본적으로 선한 성품인데, 라크락의 희생, 그리고 라크락의 희생에 감명받는 리자드맨들을 보며, 이 세계를 좀 더 선으로써 대하게 된다. 이들의 세계에서 신은 질투하고 복수하는 신이 아니라 능률을 꾀하지만 기본적으로 사랑하는 신이고, 이들의 세계에서 영웅은 자신을 희생하며 모두를 지키려 한 라크락이다. 이런 세계에서 사람들은 현실 지구의 사람들보다 서로 사랑하고, 덜 배신하고, 위기의 순간에 서로 손을 잡고 힘을 합친다. “레 미제라블”에서처럼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신의 얼굴을 보는 것”이므로.

물론 이 세계의 신이 네뷸라만 있는 것은 아니다. “로스트 월드”게임을 하다 이 세계의 신이 되어 게임을 진행하라며 끌려온 다른 27명들은 서로 반목하거나 협력하며 세력을 넓히고, 그 과정에서 동료가 된다. 서로 뜻이 맞지 않는 이들도 있었고, 로스트 월드 세계에 오랫동안 전쟁이 이어진 기간도 있었지만, 이들은 지구에서 경험했던 문명들을 이 세계에 전달하고, 세계를 덜 오염시키고, 슬픔을 줄이고, 가급적 평화롭게 세계를 다스리려 한다. 이들의 “게임”은, 인류의 역사가 지상에서 저질렀던 실수를 피해가기 위한 노력이기도 하다. 여기에서도 이들 플레이어들이 기본적으로는 분별력이 있는 인물임이 드러난다. 현실에서는, 게임에서 막판에 몰살을 시키거나, 심즈를 하면서 공연히 캐릭터를 굶겨 죽이려 드는 플레이들이 난무하지만, 이들은 그런 막장 플레이 대신 승리를 추구하거나, 자신이 가호하는 종족을 보호하기 위해 움직인다. 선이 세계를 더 좋은 곳으로 만든다는 이야기와도 같다. 그리고 이들은 결국 이전의 악신들과 대결하며 세계의 비밀을 알아가고, 자신들을 끌고 온 알딘과 과거의 신들에 의해 타천당해 평범한 사람의 몸으로 돌아온다. 대부분의 신들이 신성을 잃은 그 순간에, 사람들과 사도들은 힘을 합쳐 세상을 구하고 악신과 맞서며 이전의 전투에서 봉인된 신을 되살려낸다. 그 구상은 네뷸라에게 있었으되, 이를 실천하는 것은 리자드맨이나 엘프, 오구리, 뱀파이어, 인간 등의 종을 뛰어넘고 포괄하는, 지성과 덕을 가지고 있으며 협력하고 연대할 수 있는 존재들,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게임속 문명을 발전시킬 뿐 아니라, 현실의 인간들보다 더 나은 존재들이 되어서 사랑하고, 투쟁하고, 압제에 굴하지 않고 약자의 권리를 지키려 혁명한다.

“남성”작가의 “게임판타지”라고 하면 가질 수 있는 편견들이 있는데, 이 소설에서는 그런 단점들이 적거나, 혹은 다른 요소들로 그를 상쇄하고 있다. 이를테면 라크락의 반려인 자올은 최초의 수학자이자 건축가로, 자동성의 성주 휘경은 노련한 상인이자 최초의 길드를(약간 프리메이슨같은 느낌도 있다) 만드는 인물로 묘사되며, 그 밖에도 여러 여성 인물들이 나온다. 이들의 숫자 자체는 반반이 될 정도로 많진 않지만, 대신 나오는 인물들은 누군가의 반려, 배우자가 아니라 강하고 지혜로우며 스토리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인물들이다. 그 바람에 “작가가 페미니스트다”라고 남초 사이트에서 비난하는 경향도 있는 것 같지만, (대체 그게 왜 비난거리란 말인지) 그냥 이 정도는 약점도 단점도 있지만 노련하게 상쇄를 잘 시킨 작품이지 페미니즘적인 작품까지는 아닌데.

그건 그렇고, 사실 가장 감동적인 장면,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장면을 꼽으라면 역시 라크락의 희생이나, 휘경과 사이란 무엘의 재회, 그리고 헤게모니아가 과거의 신들과 싸우는 장면 등이 있겠지만, 그 밖에도 인상적인 장면들이 많이 있다. 이를테면 세종대왕을 모티브로 삼은 천재 왕 카일이 평생 공부와 연구와 일만 하다 죽어 저승에 갔더니, 바로 네뷸라의 사도가 되어 성역에 갇혀서 “공밀레” 당하듯이 수백 년에 걸쳐 컴퓨터와 인터넷을 만들고 있다거나, “로스트 월드” 세계에 인터넷이 도입되자마자 그 세계의 인간들도 게시판에서 뻥 치고 악플달고 키보드로 싸우고 있거나 하는 장면들. 그리고 역시 가장 귀여운 걸 하나만 꼽으라면, 고무오리 형상의 날개접은 황금새를 신으로 모시는 오리너구리 비슷하게 생긴 오구리 종족이다. 다빈치 헬리콥터를 타고 날아가는 오리너구리라니, 상상만 해도 귀여워서 죽을 것 같다. 얼마 전에 보니 웹툰도 나오던데, 고무동력 헬리콥터 탄 오구리 아크릴이나, 가죽 앞치마에 연장을 잔뜩 끼우고 있는 대발명가 미치광이 툴보 아크릴 피규어 같은 거 내주면 좋겠다. 내주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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