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가 한국, 일본 SF에 끼친 영향

[청두 월드콘 발표] 삼국지가 한국, 일본 SF에 끼친 영향

이 내용은 월드콘 발표 시 통역가 선생님을 위해 따로 준비한 대본입니다. 초고를 읽으면서 녹음해 입말에 가깝게 원고를 쓴 뒤, 다시 번역기에 돌렸을 때 더 쉽게 번역되는 형태로 단어들을 한차례 교정한 버전입니다. (이시아 번역가님이 소개하신 중국어 번역본은 이쪽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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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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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한국에서 SF와 스릴러를 쓰고 있는 전혜진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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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의 원작과 연출 작업도 하고 있어서, 영미권에는 “Lizzie Newton : Victoria Mysteries”로 알려진 추리 만화 “레이디 디텍티브”의 원작을 맡기도 했습니다. 이곳 중국에는 “自由”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SF 만화 “리베르떼”가 번역되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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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소설로는 2017년 “미래사무관리국(未来事务管理局)”과 한국의 “환상문학웹진 거울”의 교류 프로젝트를 통해 “옴팔로스”를, 2019년에는 “100년 후의 청두” 공모전을 통해 “파촉, 삼만 리”가 소개된 적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꽤 많은 SF 소설을 출간했지만, 아직 중국에 소설 단행본이 번역된 것은 없는데, 좋은 기회가 있으면 단행본으로도 중국은 물론 세계의 여러 독자님들과 만나 뵙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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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콘에 가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을 때, 무엇보다도 기뻤던 것은 이곳이 청두(成都)라는 점이었습니다. 쓰촨성은 삼성퇴(三星堆)를 비롯하여 과거 청동기 시절 고촉문화(古蜀文化)가 꽃피었던 곳이고, 과거 촉(蜀)이라 불렸던 지역의 일부였습니다. 이곳은 과거 초패왕 항우(項羽)와 한나라의 고조 유방(劉邦)이 다투던 시절 유방의 근거지였고, 한나라가 멸망한 뒤에는 삼국지의 영웅 유비(劉備)가 한중왕의 자리에 올랐다가, 다시 한나라를 이은 촉나라, 후대에는 계한(季漢)이라 불리는 나라를 건국한 곳으로 알고 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여러분께 소개드리고 싶은 이야기도 사실은 이와 같은 역사적 배경과 관련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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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는, 삼국지가 한국과 일본의, 특히 한국의 SF에 끼친 영향에 대해 말씀드리려 합니다.

제가 이 주제로 발표하겠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는 다들 입을 모아 말씀하셨습니다.

“아니, 얼마나 겁이 없으면 중국에 가서 삼국지 이야기를 한다고 그래. 중국 사람들은 삼국지에 대해서라면 다들 잘 알아요. 이야기하고 5분만에 밑천이 다 드러날 걸?”

게다가 여기는 청두, 쓰촨 성 청두죠. 삼국지를 읽은 사람은 다 아는 촉나라의 수도 성도입니다. 그야말로 입촉(入蜀)을 해서 중국 사람들 앞에서 삼국지 이야기를 하겠다는 건데, 가서 싸우자는 거냐고요. 거긴, 정말로 삼국지 사랑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닐텐데. 어설픈 삼국지 오타쿠(Otaku)는 명함도 못 내밀텐데, 하고.

사실 한국에도 삼국지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이 사람들이 종종 온라인 게시판에서 싸우거든요. 위, 촉, 오 삼국 중에 누가 제일 세냐, 어느 군사가 가장 뛰어난가, 뭐 그런 유치한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한국 정치에 빗댄 이야기까지 다양하게요. 물론 저는 싸우러 온 것은 아니고요. 보시다시피 저는 전투력이 워낙 별 볼일 없어서, 여기 계신 분 아무나 일어나서 저랑 싸우셔도 술이 식기 전에 저를 기절시켜서 한국행 비행기에 태우실 수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1700년 전 중국의 유산인 삼국지가 현대 동아시아 SF, 특히 한국과 일본의 창작물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한 이야기라면 그래도, 동양 문화권에서는 다들 좋아하실 만한 이야기 같네요. 그럼 시작해 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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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저는 인천국제공항에서 출발해서 이곳 티옌푸 국제공항에 도착할 때 까지, “삼국지톡”이라는 웹툰을 보고 있었습니다. 무적핑크 작가님이 스토리를 쓰고, 이리 작가님이 그림을 그린 웹툰이죠. 중국에는 모던삼국(摩登三国)으로, 일본에는 이마도키 산고쿠시(イマドキ三國志), 즉 요즘 삼국지라는 제목으로 연재되고 있을 텐데요. 이 웹툰은 삼국지의 기본적인 흐름과 시대적 배경, 캐릭터와 주요 사건을 유지한 채, 딱 한 가지의 변화를 주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삼국지의 영웅들이 휴대폰을 사용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 사고실험에서 출발한 이 삼국지 기반의 SF 만화는 현재 많은 독자에게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이 웹툰은 삼국지의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사랑받고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삼국지가 중국은 물론, 한국인들에게도 매우 보편적으로 알려진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현대의 우리가 보통 “삼국지”라고 말한다면, 그건 역사로서의 “삼국지”보다는 나관중이 소설로 쓴 “삼국지연의”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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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전에도 정사 “삼국지”에 대한 기록들은 보입니다만, 한국에서 “삼국지연의”에 대한 공식적인 최초의 기록은 임진왜란 전, 조선의 국왕 선조 때였습니다. 그때 조선의 유명한 성리학자 기대승(奇大升)이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이분은 한국의 5천원짜리 지폐에도 나오는 퇴계 이황(李滉)과의 사단칠정과 이기론 논쟁을 통해 조선의 성리학 연구를 크게 발전시킨 것으로 유명한 분인데요, 이 위대한 성리학자 기대승이 선조 임금에게 강의를 하던 중에 선조 임금이, 요즘 삼국지연의라는 재미있는 책이 있다더라고 이야기를 꺼냅니다. 그러자 기대승은, 삼국지연의가 역사와 달리 허황된 내용이 많다면서, 선조 임금에게 이렇게 말했답니다.

“삼국지연의가 널리 읽혀 풍속의 괴란(壞亂)이 우려됩니다.”

풍속의 괴란이라는 말은 풍속이 무너지고 난리가 난다, 요즘 말로는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하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애들이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삼국지같은 허황된 영웅담만 열심히 읽는다는 이야기이죠. 조선에서 손꼽히는 성리학자가 무려 국왕에게 이렇게 말한 것을 보면, 예나 지금이나 어른들이 애들 공부 안 한다고 걱정하는 것은 비슷한 것 같습니다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필 삼국지연의입니다. 기대승이 그런 걱정을 할 만큼, 이미 이 시기에도 삼국지는 널리 퍼져 있었던 것입니다. 요즘 청소년들이 넋을 잃고 유튜브 쇼츠에 빠져 있는 것 같은 정도는 아니었겠지만, 말하자면 웹소설, 웹툰을 보는 만큼은 빠져 있었던 겁니다. 이 시기에 삼국지는, 주로 명(明)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온 사람들을 통해 전해졌습니다. 조선에서 남경(南京, 난징), 또는 북경(北京, 베이징)까지 왕복하는 동안, 사람들은 오며가며 숙소에서 책을 읽었겠지요. 우리가 청두까지 오는 동안에도, 뭔가 책을 읽거나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거나 하는 것처럼요. 그런데 이 여행길에 읽은 삼국지가 재미있어요. 여러 명이 한 질을 돌려 읽는데도, 너무 재미있어서 다음 권을 읽는 사람에게 채근도 했을 겁니다. 그렇게 조선까지 돌아와서는, 재미있으니까 서로 베껴쓰며 필사도 했겠지요. 조선에 처음 유행했던 삼국지는 이와 같은 필사본의 형태였을 것입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정사 삼국지는 널리 읽혔고, 또 제갈량 역시 과거의 여러 훌륭한 재상들과 함께 알려져 있었습니다. 기대승 역시 젊어서 과거 시험을 볼 때 제출한 책문, 즉 시험 답안지에서, 옛날 현인들에 대해 적으며 제갈량에 대해, “제갈공명은 제왕을 보좌할 만한 제주로 한 왕실의 후예를 보좌하여 한나라의 적을 토벌할 것을 맹세했으나, 그 뜻을 미처 다 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고 기록한 바 있습니다. 어쩌면 기대승 본인도, 사실은 삼국지를 꽤 좋아했는데, “삼국지연의”에서 재미를 위해 더해지거나 빠진 부분들을 찾아보며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요. 요즘의 오타쿠들이 말하는 식으로는, “이 동인지는 내 최애 캐릭터에 대한 해석이 잘못되었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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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조선 후기, 정조 임금 시대에는 소설책 등을 대량으로 찍어낸 방각본과,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방각본을 대여해주는 세책가(貰冊)가 크게 유행했는데, 이때에도 삼국지는 널리 사랑받았습니다.
삼국지의 인기는 한문을 읽을 수 있는 사대부만의 전유물이 아니었습니다. 좀 더 대중적인 문자인 한글로 번역되며 삼국지는 여성들과 서민들에게 널리 사랑받았고, 글자를 잘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돌아다니며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소설을 낭독하던 전기수傳奇叟)들에게도 삼국지는 대표적인 레파토리였습니다. 또한 한국에는 고수의 북 장단에 맞추어 한 사람의 소리꾼이 이야기를 들려주는, 일종의 한국식 1인 오페라인 판소리가 있는데요. 한국에서 사랑받는 판소리 중에는 삼국지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인 적벽대전(赤壁大戰)을 서민적인 관점에서 묘사한 판소리 적벽가(赤壁歌)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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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20세기에 들어오며, 삼국지는 한글로 번역되어 더욱 널리 읽히게 되었습니다. 1904년에는 박문서관에서 삼국지 단행본이 나왔고, 한국이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겼던 시절에도 여러 신문에서 삼국지가 연재되었습니다. 그 중에는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승려이며 시인인 한용운이 번역하여 연재하던 것도 있었으며, 한국의 유명 소설가인 김동리와 황순원이 함께 번역한 것도 있었습니다. 한국전쟁 이후 북한으로 갔던 소설가 박태원도 삼국지를 출간했습니다.

한국의 독립 이후에도 다양한 삼국지가 소개되었습니다. 이 중 유명한 것이 역사소설가 박종화가 1967년 번역한 “월탄 삼국지”(박종화의 호가 월탄입니다)와, 황석영 삼국지,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작가 중 한 명인 이문열이 번역한 이문열 삼국지입니다.

월탄 삼국지는 당대의 스테디셀러였고, 1985년 정도에 개정판이 나왔습니다. 연도를 정확히 기억하는 것은 그 해에 제가 유치원에 들어갔기 때문인데, 제가 다니던 유치원에서 50미터 쯤 떨어진 곳에 서점이 있었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월탄 삼국지의 다음 권이 나오는 날짜를 확인해서, 유치원에 다니던 제게 책값을 주시면서 유치원 다녀오는 길에 삼국지를 사오라고 하셨지요. 사실 지금같으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당시에는 그럴 수 있는 일이었고, 일찍부터 책 좋아하는 어린이의 싹수를 보이던 저는 그만 삼국지를 읽기 시작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문열 삼국지는 1990년대, 한국의 명문대학인 서울대학교의 수석 합격생이 언론과의 인터뷰 중 입시 준비 중에도 삼국지를 즐겨 읽었다고 대답하면서, 전국의 중고등학생이 너도나도 한번쯤은 읽는 책이 되었습니다. 저는 딱 이 시기에 고등학교에 입학했는데, 이 무렵 한국의 고등학생들은 한국에서의 전통적인 해석대로 유비처럼 덕이 높은 영웅이 나은지, 혹은 이문열 삼국지의 관점과 같이 조조와 같이 잔인하지만 유능한 영웅이 나은지에 대해 열성적으로 토론하기도 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은하영웅전설의 두 영웅, 라인하르트와 양 웬리 중 누가 더 명장인지에 대해 토론했던 적도 있는데, 생각해보니 은하영웅전설 역시 삼국지와 무관하지 않은 작품이네요. 이런 배경 때문에, 지금도 한국에서 책 좀 읽었다 하는 40대에게 있어 삼국지는 거의 필수 교양이나 다름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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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들이 삼국지를 접하는 경로는 소설만이 아니었습니다. 매체의 발달에 따라 사람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삼국지를 접하게 됩니다. 1980년대에는 어린이 인형극으로 삼국지가 방영되었습니다. 그 무렵에는 아직 한국에 일본 문화 개방이 제한적이었고, 일본 만화나 애니메이션 수입에 엄격한 상황이었지만, 일본의 만화가 요코야마 미츠테루(横山光輝)의 “전략 삼국지(横山光輝 三国志)”가 수입되어 한국 만화가 고우영의 “고우영 삼국지”와 함께 삼국지 만화책의 쌍벽을 이루었으며, 1990년대 이후에는 한국 만화가 이희재가 이문열 삼국지를 바탕으로, 만화가 협회 회장을 지내기도 한 이충호가 황석영 삼국지를 바탕으로 어린이를 위한 삼국지 만화를 펴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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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과 1980년에는 한국의 애니메이션 감독 김청기가 “고우영 삼국지”를 원작삼아 “삼국지 도원결의(桃園結義)편”과 “삼국지 관우오관돌파(오관참육장 五關斬六將)편”을 내놓기도 하는 등, 만화와 애니메이션, 어린이 인형극 등으로 삼국지를 처음 접하는 연령대가 초등학교 저학년까지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여담이지만 김청기 감독의 “고우영 삼국지” 애니메이션은, 비록 가장 유명한 두 대목만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것이지만, 의외로 세계 최초의 삼국지 애니메이션 중 하나라고 합니다. 실제로 요코야마 미츠테루의 전략 삼국지에 기반한, 이마자와 테츠오(今沢哲男) 감독의 니혼TV 삼국지보다 5년이나 앞선 작품입니다. 이 발표를 준비하던 저도 처음에 그 이야기를 듣고 생각했습니다. 대체 한국인들은 왜 이렇게까지 삼국지를 좋아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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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1980년대 후반에는 주요 캐릭터의 인물 이름과 성격을 삼국지에서 따온 기업 시트콤 드라마도 방영되었습니다. 한국 최초의 시트콤 드라마로 꼽히는 작품인데요. 한 회사의 자재과에, 무능해 보이는 과장 아래로 느긋하지만 인화(人和)가 뛰어난 유비 대리와 잔꾀에 밝은 조조 대리가 차기 과장 자리를 노리는 가운데, 장비와 관우, 여포와 조자룡 사원 등이 나오는 이야기였습니다.
뜻밖에도 제목은 “TV 삼국지”가 아니라 “TV 손자병법”이었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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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원생부터 삼국지를 접하게 된 세대가 성장하여 청소년기를 맞은 1990년대는, 삼국지에 대한 패러다임이 바뀌는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먼저 앞서 말씀드린 이문열 삼국지는, 한국에서 인기있던 촉한정통론(蜀漢正統論)에서 어느정도 벗어나, “현실주의자” 로서의 조조의 관점을 많이 반영하고 있었습니다. 다음으로는 책으로 읽거나 TV에서 보는 것이 아닌, 게임을 통해 자신이 삼국지의 군주가 되는 체험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일본 KOEI 사의 삼국지 시리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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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K-POP 스타를 배출한 한국의 SM 엔터테인먼트의 이수만 회장은, “이만큼 있으면 하나쯤은 네 취향이 있겠지”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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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그렇지요? 이 중에 한 명쯤은 취향에 맞는 영웅이 있지 않을까요?

단순히 주인공의 행적을 따라가는 단선적인 게임이 아니라, 캐릭터를 육성하여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전투를 거듭하는 턴제 전략 시뮬레이션이라는 게임 장르에 있어, 수많은 영웅들의 일대기가 담겨 있는 삼국지의 존재는 축복과도 같습니다.

동아시아 문화권에서는 삼국지가 어떤 내용인지에 대해 기본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고, 삼국지를 읽고 접한 사람들에게는 유비나 조조, 손권과 같은 군주 외에도 저마다 좋아하는 캐릭터가 있기 마련입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캐릭터를 군주로 삼아, 빼어난 책사와 우수한 장군들을 거느리고 역사속의 이벤트를 경험하거나, 천하통일의 위업을 달성한다는 컨셉의 이 게임은 크게 성공했으며, 수많은 턴제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KOEI도 이후 광범위한 보편성을 지닌 삼국지 뿐 아니라,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 이전 16세기의 센고쿠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노부나가의 야망”시리즈도 내놓았으며, 반다이 남코에서도 이를 모델로 자사의 로봇 애니메이션 IP를 활용한 “슈퍼로봇대전” 시리즈를 내놓는 등, 삼국지 게임은 1990년대 이후 턴제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의 역사를 재정립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한편 1990년대, 청소년들은 바로 이 삼국지 게임을 통해 삼국지를 접하고, 다시 게임을 더 잘하기 위해 삼국지를 읽게 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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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와 거의 동시에, 삼국지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일본의 장편 SF가 있었습니다. 바로 존경하는 다나카 요시키(田中芳樹) 선생님의 걸작 은하영웅전설(銀河英雄伝説)입니다. 훗날 라이트노벨의 원조가 되기도 하는 이 작품은, 실제로 “은하 삼국지”라는 제목이 붙을 뻔 했다는 후일담이 전하고 있습니다.

독일을 연상하게 하는 은하제국에서, 황제의 후궁으로 끌려간 아름다운 누나를 되찾기 위해 황제를 쓰러뜨리고 우주를 손에 넣겠다고 결심하는 라인하르트는 때로는 조조와도 같은 화려한 야심가로 묘사됩니다. 그의 적수이자 무척 게으르지만 전략에 있어서는 뒤따라 올 자가 없는 자유행성동맹의 젊은 장군 양 웬리는 중국계이자 독서와 차를 즐기고, 고대 중국의 도자기를 사랑하는 등, 여러 면에서 중국의 고상한 사대부를 연상하게 하는 인물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양 웬리야말로 우주 버전의 제갈공명, 제갈공명의 37세기 버전이라고 할 수 있는 캐릭터입니다. 여담이지만 은하영웅전설 애니메이션 시리즈에서 양 웬리 역할을 맡은 성우 토미야마 케이(富山敬)는, 이전에 니혼TV 삼국지에서 제갈량 역을 맡기도 했습니다. (토미야마 케이는, 은하영웅전설 애니메이션에서 양 웬리의 최후를 연기하고 같은 해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한편 1990년대 한국에서 은하영웅전설은, 일본에서와는 조금 다른 특별한 의미로 읽혔습니다. 한국에서의 20세기란, 전반부는 일본 제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한 독립운동이, 한국전쟁 이후는 독재자에 맞선 민주화운동이 이어지던 시기였습니다. 부패하거나 타락한 정치가들, 군사 쿠데타, 독재자에 의한 대규모의 학살, 그리고 자유행성동맹의 몇몇 장군이 은하제국에 맞서 싸우며 죽음을 무릅쓰고 지켜내려 하던 민주주의의 가치를, 사람들은 한국의 근현대사와 비교하며 읽기도 했습니다. 설령 가장 뛰어나고 이상적인 군주가 다스린다 하더라도 독재가 가져오는 한계와, 아무리 허점이 많다 하더라도 평범한 사람들이 힘을 합쳐 선택한 결과로 이루어지는 민주주의의 가치에 대해 불완전하게나마 이야기하는 이 소설은 당시 한국 청년들에게 현실을 빗대어 토론할 만한 이야기였습니다.

그 영향일까요, 마치 제갈량이 자신을 춘추전국시대 제(齊)나라의 명재상 관중(管仲)과 연(燕)나라의 위대한 장군 악의(樂毅)에 비교했듯이, 이 소설이 나오고 40년이 되어가는 지금도 한국에서는 정치에 관심있는 사람들이 자신을 삼국지의 책사 제갈량이나 은하영웅전설의 명장 양 웬리에, 때로는 더 나아가 수십년 간 빈 낚싯대로 세월을 낚았다는, 주나라의 공신이자 제나라의 제후였던 태공망 강상(太公望 姜尙)에 빗대는 일도 종종 있습니다. 물론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대개 제갈량이나 양 웬리처럼 유능하지 않지만요.

여담이지만 이 양 웬리의 말은, 류츠신(刘慈欣)의 “삼체(三体)”시리즈의 두 번째 권, “암흑의 숲(黑暗森林)”에도 인용된 적 있었습니다. “인간의 생명은 모든 것에 우선하오. 국가와 정부는 그 누구에게도 필사의 임무를 맡길 수 없어요. ‘은하영웅전설’에서 양웬리가 이런 말을 했소. ‘국가의 흥망이 이 전쟁에 달려 있다. 하지만 개인의 권리와 자유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각자 최선을 다하면 된다.’”라고요.

“삼체”도 “은하영웅전설”도, 이미 고전이 되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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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1990년대 이후 한국의 독자들은 다음 세 경로로 삼국지를 접하게 됩니다.

첫째는 게임, 가장 기본이 되었던 것은 KOEI의 삼국지 시리즈였지만 요즘은 스마트폰에서도 수많은 삼국지 게임들을 할 수 있지요.

둘째는 삼국지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작품들. 여기에는 단순히 만화나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것 외에도, 삼국지의 구도를 활용해 SF를 만들거나, 삼국지의 인물들을 성반전하는 등의 변형이 포함될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소설을 읽는 방식이 있습니다. 한국에서 삼국지의 “번역”이라 함은 대체로 중문학자나 한학에 소양이 있는 유명 소설가에 의한 “평역”을 의미합니다. 이들은 저마다 진수(陳壽)가 쓴 역사책인 삼국지부터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 때 배송지(裴松之)가 주석을 단 삼국지, 나관중(羅貫中)의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청나라 시기의 모종강(毛宗崗)본, 심지어는 일본의 요시카와 에이지(吉川英治) 삼국지 등 다양한 저본들을 두루 읽고, 저마다 자신의 시각과 주석을 달아 삼국지를 재해석하고 있으므로, 독자는 이 과정에서 다양한 삼국지 소설들을 읽고, 자신이 좋아하는 삼국지 상을 찾아가게 됩니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삼국지를 접한 세대가 창작자가 되었을 때, 삼국지는 수많은 해체와 재조합을 거치며 새로운 작품의 밑거름이 되곤 합니다. 어떤 제한된 공간 안에서 군웅할거처럼 여러 세력이 대립하거나, 이들 세력이 크게 셋으로 정리된다거나, 복숭아 나무 아래에서 약속하는 세 사람이나, 신선처럼 신비하고 나이에 비해 어른스러운 책사 캐릭터, 더듬이같은 긴 장식이나 앞머리가 달린 강력한 캐릭터 등은 대개 삼국지에서 파생된 설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혹은 아예 현대인이 마치 게임을 플레이하듯, 아예 삼국지 세계관 속으로 들어가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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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단샤 소년만화상을 수상한 야마하라 요시토(山原義人)의 만화 “용랑전(龍狼伝)”이나, 소녀시대 팬픽에서 시작하여 한국 웹소설의 선구적 작품 중 하나로 자리잡은 조경래의 소설 “같은 꿈을 꾸다 in 삼국지”와 같은 타임슬립 판타지가 그것입니다. 물론 타임슬립이나 게임빙의, 회귀와 환생 역시 SF의 한 요소이므로, 이들 역시 넓게 보면 삼국지를 소재로 한 SF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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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의 주요 인물들을 성반전한 작품들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작품은 시오자키 유지(塩崎雄二)의 격투만화 “일기당천(一騎當千)”입니다.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한 이 만화에서, 삼국지의 주요 장수들은 여고생의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게임과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진 “연희†무쌍 ~두근☆소녀 투성이 삼국지연의(恋姫†無双 〜ドキッ☆乙女だらけの三国志演義)”도 있습니다.

일본에서 삼국지를 성반전한 작품들은, 종종 주인공들을 미소녀로 만들어 노출과 격투를 선보이는 남성향 작품, 소위 모에 물이 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은 느낌입니다만, 한국에서 삼국지의 성반전은 종종 여성작가들에 의해 이루어지며, SF나 페미니즘과 결합되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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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달의 만화 “여자 제갈량”에서는 주요 책사들과 그 가족들이 성반전되어 등장합니다. 이를테면 제갈량(諸葛亮)과 사마의(司馬懿), 방통(龐統), 순욱(荀彧), 곽가(郭嘉), 가후(賈詡), 육손(陸遜) 등이 여성으로 등장합니다. 다만 주유는, 아마도 대교, 소교 자매의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기 위해서인지 남성으로 등장합니다. 이 만화는 삼국지의 역사적 배경에 페미니즘적 사고실험을 더한 작품입니다.

이 만화에서 제갈량은 서주대학살로 부모를 잃고, 본인은 폐병을 앓는 병약한 젊은 아가씨입니다. 그는 수경선생의 제자로 공부하며, 이 난세에 부모도, 남편도 없고 몸까지 허약한 자신이 한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고민합니다.

제갈량과는 학창시절부터 라이벌로 설정된 사마의는 남녀의 권력이 반대가 되었을 경우 여성은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인물로, 여성이 대를 잇는 명문 사마 씨 집안의 후계자로서, 데릴사위인 장춘화(작중에서는 “장추”로 나오지만 강연에서는 장춘화로 언급함)에게 고압적인 모습을 보이는 가모장으로 등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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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가의 후예인 순욱은 자신이 여성이라는 사실을 감추려 하는 남장여자로, 유능하지만 보수적인 현실주의자이며, 명예남성에 가까운 인물입니다. 하지만 그가 여성이라는 것을 가까운 사람들은 다들 알고 있지요. 많은 매체에서 그렇듯 여기서도 순욱은 왕좌지재(王佐之材), 즉 왕을 보좌하고 나아가 자신의 주군을 왕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재능을 가진 인물로 불리지만, 곽가는 순욱이 남자였다면 왕좌지재가 아니라 스스로 왕이 될 수 있는 인물이라고 평가합니다.

하지만 곽가는 다르죠. 곽가는 순욱과 달리 자신이 여성이라는 사실을 감추지 않고, 자신의 쾌락에 솔직한 인물입니다. 실제의 역사와 달리, “여자제갈량”의 세계에서, 인재가 부족한 난세에 실용주의자 조조는 여성이든 남성이든 재능만 있으면 발탁해서 씁니다. 물론 예외적인 형태로, 남장을 하거나 남자로 기록되는 식으로 주군의 곁에서 책사가 되는 형태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는 곽가에게 있어, 여자라도 재능이 있으면 내보일 수 있는 시대, ‘수경의 제자’가 세상에 나올 수 있는 시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곽가는 이 난세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그 난세의 중심에, 여성이 대를 잇는 사마 씨 집안 출신의 학자인, 수경선생의 제자들이 있습니다. 물론 이 이야기에서는 수경선생 사마휘도 여성입니다.

육손은 가문의 남자들이 전부 전쟁으로 살해당하고 여자들이 절망했을 때, 자신이 오빠 대신 이 집안의 대를 잇겠다고 머리카락을 자르고 남자로 살기로 결의합니다. 가후는 여자이자 이민족의 자식이자 천한 신분인, 철저한 사회적 약자이지만 천재적인 머리로 인해 수경선생의 제자가 되고, 악마적인 재능을 가진 군사로 등장합니다. 이들은 모두 난세를 헤쳐나갈 수 있는, 지혜롭고 뛰어난 인물들이지만 여성이 여성이자 인간으로서 인정받지 못하는 시대에 여성으로 태어났으며, 여기에 더해 추가적인 약점들을 지니고 저마다의 난세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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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현과 김소담의 웹툰 “모던픽션 A : 삼국지 표류도시”는 지구가 멸망하고 약 300년 뒤, 최후의 인류가 타고 있는 거대한 세대간 우주선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세대간 우주선은 그 사람의 계층에 따라 거주할 수 있는 구역이 달라지는데요, 대륙이라는 거대하지만 한정된 자원 안에서의 권력다툼과 전쟁으로 대표되는 삼국지의 세계를 세대간 우주선으로 압축한 디스토피아 속에서 약자들이 존엄을 지키기 위해 투쟁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과학이 발달하고 풍요로운 “상층”에는 한나라와 조조의 세력들이 살고 있습니다. 낙후된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상층에 사는 사람들에게 차별받고 있지요. 그리고 손씨 세력은 15년 전 그 “도시”에서도 추방당한 채, 언젠가 다시 우주로 나가기를 갈망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차별받고 낙후된 “도시”에서도 특히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받는 세 사람, 유비와 관우, 그리고 장비가 술집 ‘도원’에서 만나며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세대간 우주선이라는 작은 난세 안에서, 사람들은 다양한 성별과 인종, 심지어 안드로이드로도 등장하며 계급의 문제와 약자의 연대에 대해서도 함께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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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부터 전해져 오던 판소리 적벽가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뮤지컬 “적벽”은, 판소리과 부채 등을 활용한 호쾌한 무대 연출과, 꽹과리와 북 같은 전통적인 타악기에 신디사이저의 음색을 입히며 가장 한국적인 삼국지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다고 호평받고 있으며, 서울 정동극장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판소리 “적벽가”는 영웅 중심의 삼국지에서 탈피하여 전쟁에 시달리는 병사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덕이 높은 유비와 그를 보필하는 제갈량을 영웅으로, 전쟁을 좋아하는 조조를 우스꽝스러운 악인으로 묘사하며, 전쟁 뒤에 가려진 민중의 고통을 해학을 통해 드러내는 이야기인데, 이 뮤지컬 “적벽”역시 그 관점에서 전쟁을 바라봅니다. 약자 중심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서도 제갈량, 주유, 서서, 정욱 등의 책사들은 여성으로 등장합니다.

하지만 이들은 여성적 고정관념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여성 캐릭터의 다양성을 확장하는 형태로 무대에 섭니다. 제갈량은 약자들을 위해 나서는 유비와 함께 하기로 결의하는, 위엄있고 신비로운 인물입니다. 책사이자 장군인 주유는 강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인물로 묘사되며, 우스꽝스러운 악역이 된 조조를 보필하는 책사 정욱은 한국의 가면극에서 양반이나 권력자를 풍자하는 역할인 하인 말뚝이를 연상하게 할 만큼 한 마디 한 마디에서 조조의 권력욕과 실수들을 빈정거립니다. 특히 뮤지컬 적벽은 젠더 프리 캐스팅에 적극적으로, 책사 뿐 아니라 캐스팅에 따라 조조, 조자룡 등이 여성으로 등장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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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예 현대를 배경으로, 삼국지의 구도를 가져와 새로운 작품을 만든 경우도 있습니다. 한국의 어린이용 특수촬영 드라마인 “레전드 히어로 삼국전”은, 신선계의 마더 컴퓨터가 관장하는 “드림 배틀”을 위한 소형 로봇 장난감 모양의 “영웅패”를 손에 넣은 영웅들이, 삼국지의 영웅인 “레전드 히어로”로 변신하여 싸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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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도 최근 무척 재미있는 삼국지 소재 타임슬립 만화가 나와 있지요. 우리가 흔히 “문명”같은 게임을 할 때 문화 승리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한국에서는 독립운동가였던 백범 김구 선생이 “우리 나라에 바라는 것은 오직 문화의 힘”이라는 말씀을 하신 적도 있는데, 이 만화에서 공명은 전쟁 대신 엔터테인먼트를 통한 문화 승리를 노립니다.

요츠바 유토(四葉夕ト) 원작에 오가와 료(小川 亮)가 그림을 맡은 일본 만화 “파티피플 공명(パリピ孔明)”의 경우, 오장원에서 숨을 거둔 제갈량이 현대 일본 시부야에서 되살아나, 가수가 되는 것이 목표인 츠키미 에이코(月見英子), 우리에게는 월영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황부인과 만나고, 그를 최고의 가수로 키워내기 위해 사람의 심리를 움직이는 다양한 전략을 구사하며 매니지먼트에 나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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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에서 탄생한 삼국지라는 매력적인 이야기는, 이렇게 거대한 원형이 되어 중국은 물론, 한국과 일본의 다양한 창작물에 영향을 끼치고, 사고실험의 기반이 되고, 나아가 SF로서 발전하고 있습니다. SF 작가들도, 웹소설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에서 로맨스와 SF를 쓰고 있는 작가 furem(휘렘)은 23세기 한 연방공화국이 재난으로 몰락한 뒤, 재벌 3세인 조조와 유주 탁현의 시의원 유비, 오군의 유지 손견의 아들 손권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미래의, 민주주의적 기반의 삼국지 웹소설인 “삼국지몽(三國志夢)”을 선보였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켄 리우(Ken Liu)를 빼놓을 수 없지요. 켄 리우의 “모든 맛을 한 그릇에(All The Flavors)”는 중국을 떠나 미국에 정착한 이민자들이 겪은 차별과 슬픔의 이야기가 삼국지 속 영웅이자 동양 문화권에서 신으로 추앙받는 관우의 고난과 역경과 교차하고 있습니다. 고대의 삼국지 속 영웅의 이야기가 가장 현실적인 근현대의 이야기를 빗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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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저 역시도 비슷한 시도들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삼국지와 관련된 SF도 세 편 썼는데, 하나는 제가 살고 있는 인천의 한 선거구를 모델로 하여, 사람들이 메타버스와 현실 양쪽을 살아가는 세계에서 선거운동원이 된 청년들의 이야기를, 판소리 “적벽가”에 빗대어서 쓴 “눈 딱 감고 적벽강에 다이브”입니다.

또 하나는 “사이후이, 싸이파이”입니다. 이 말은 제갈량의 후출사표에 나오는 “국궁진췌 사이후이”, 즉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일하고, 죽은 뒤에야 그만두리라는 말에서 왔는데, 중국과 한자를 읽는 법이 다른 한국에서는 이 뒷부분을 ”사-이-후-이=“라고 읽습니다. 말장난이죠. 이 소설에서, 오장원에서 숨을 거둔 제갈량은 하늘에 빌었던 대로 12년의 시간을 돌려받습니다. 수명이 연장되는 것이 아니라 12년을, 다시 6년을, 다시 3년을 회귀하는 형태로요.

마지막으로 지난 2019년, 이곳 청두에서 “100년 후의 청두” 공모전이 진행되었을 때 출품했던 “파촉, 삼만 리”가 있습니다. 로봇 공학자인 주인공은 죽은 연인이 늘 자랑하던 고향이자, 세계 최초의 산업용 로봇을 만든 제갈공명이 묻힌 땅, 청두에 왔다가 EMP 공격으로 마비된 도시 복구에 나섭니다. 이 “파촉, 삼만 리”라는 제목 역시, 한국의 시인 중 한 명인 서정주(徐廷柱)의 시에서 따온 것이었지요. 머나먼 서쪽 땅, 쉽게 오기 힘든 땅. 그런 삼국지의 땅 파촉, 청두에 왔으니, 어쩌면 저도 돌아가서 삼국지와 관련된 SF를 몇 편은 더 써야 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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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시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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