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책으로도 열심히 보고 있고, 무척 좋아해서 넨도로이드 피규어도 하나 구입했는데, 재작년에 넷플릭스로 올라온 것을 한번 봤었다. 최근에 SF 어워드 예심 결과를 보면서 초심이라든가, 재능같은 것에 대해 조금 다시 생각할 일이 있었는데, 어쩌다 보니 이 애니메이션을 다시 보고 있었다. 어떤 작품들은 그것이 내게 필요한 시기이기 때문에 내게 오기도 한다.
만화쪽에서는 야구치 야토라가 목표하던 도쿄예대에 입학하고, 소위 “대학편”이 시작된 상태다. 개인적으로는 이 대학편 쪽이 무척 즐겁다. 예술가들이 자아를 찾아 방황하고, 깨지고, 삽질하고, 성질들은 다들 더럽고, 얼마나 유쾌한지. 하지만 대다수의 독자들에게 공감을 살 만한 부분은 “대학편”의 직전까지, 그러니까 “입시편”으로 이름을 붙여야 할 것 같은 쪽일 것이다.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진 부분도 바로 이쪽이다. 고등학교 2학년, 미술 시간의 회화 수업 때, 새벽의 시부야 풍경을 그리며 다른 친구들과 싹싹하게 잘 맞춰주고, 잘 동화되는, 성격 좋은 자신의 내면에 깃든 쓸쓸함을 발견한 소년은 그림의 매력에 빠져들고, 미술부에 들어간다. 약간 날라리, 양아치같은 외모에 살짝 불량한 친구들과 어울리지만 사실 성실하고 성적도 우수한 야토라는 원래 지역 국립대 지망이었지만, 그림을 그리기로 결심하며 진로를 국립인 도쿄예대, 단 한 곳으로 정한다. 그러나 도쿄예대는 경쟁률 200대 1, 단번에 합격하는 “현역” 합격자의 비중이 상당히 낮은 학교였고, 당연히 하루이틀 준비해서 갈 수 있는 학교가 아니다. 야토라는 입시미술학원에 등록하고, 이곳에서 천재를, 이론가를, 가족 모두가 도쿄예대 출신을 다니며 자신보다 뛰어난 천재를, 이론가를, 가족 모두가 도쿄예대 출신인 것에 억눌리는 노력파를, 학원에 다니며 만나고,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왜 이곳에 있는지를 끊임없이 자문한다.
물론 자신이 다른 친구들보다 못한다는 야토라의 말에 속아선 안 된다. 도쿄예대가 붓을 잡기 시작하고 고작 1년 반만에 갈 수 있는 만만한 학교도 아니고, 센터시험 잘 봐서 들어가는 학교도 아니다. 야토라는 자신이 보고 듣고 머리로 생각해서 작업하는 것은 잘 하지만 창조적인 부분은 부족하지 않나 생각하기도 하는데, 창작도 일단 입력과 연습이 많아야 나오는 것이고, 미술을 시작하고 1년 반만에 뭔가를 보고 순식간에 분석해서 그만큼 흡수할 수 있으면서 저런 소리를 하면 양심이 없는 거지, 하고 혀를 차고 짜증을 내고 “아이고 저거 또 기만이다.”하고 낄낄거리다가 문득, 내가 왜 이 한밤중에 새벽내내 이 애니메이션을 다시 보고 있나 생각했다. 내가 왜, 고등학생의 치기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족한 시간과, 부족한 시간과 부족한 재능을 착각하면서도 우직하게 그림 그리기를 계속하는 – 야토라는 흔한 예술학도의 방황도 가출도 중간에 그림 안 그리겠다고 집어던지고 나오는 것도 없다. 그는 계속 그린다. 자기 그림으로 다 죽여버리겠다는 기세로. 부족한 시간과 스킬을 그는 그 기세로 뚫고 나간다. 뻔뻔하지만 문득 생각했다. 아직도 국내상 하나 뚫지 못한다고 매번 좌절하고 매번 짜증내면서도 오늘도 내일도 계속 쓰고 있는 나는, 오랜시간 해 온 재능있는 친구들과 나름 이 분야의 서러브레드인 친구들 사이에서 기죽으면서도 그냥 우직하게 그림을 그리는 야토라의 기세에서 나를 찾고 있었구나,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