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여천 범도

홍여천 범도 – 김진, 광복회

이 만화 자체는 2019년 광복절 무렵부터 나왔다. 그 전에 광복회에서도 꽤 신경을 쓰고 공을 들이는 프로젝트라고 소문은 들어 알고 있었다. 프로젝트 시작 전에 작가님들이 만주를 비롯해 독립운동의 역사의 현장들을 둘러보고 오셨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누구나 다들 알고 있는 영웅부터 우리에게 낯선 독립운동가들까지, 100인의 이야기를 만화로 담아내는 프로젝트 자체가 굵직했지만, 그 중에서도 이 만화는 독보적이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홍범도의 일대기를 다루지만, 봉오동 전투도, 김좌진과 함께 싸운 이야기도, 영광스럽고 빛나는 순간이나 그 쓸쓸한 최후도 없다. 이 만화가 다루는 것은 그의 일생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과, 그 극적인 순간 뒤에 자리한 그의 유년기와 소년기다. 아무르 사변, 또는 자유시 참변이라 불린 사건 이후, 이 일에 대한 재판이 진행된다. 본의든 아니든 이 참사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던 홍범도는 중립적인 입장에서 이 일의 재판을 맡고, 김규식과 여운형 등이 배심원으로 선임된다. 군복을 입은 관계자들이 배에 힘을 주고 우렁우렁 울리는 목소리로 서로 저마다의 주장을 말하는 장면은 만화가 김진 특유의 정교한 컷과 컷의 연출 사이에서 연극 무대에서 배우들이 합을 짜서 주고받는 듯한, 대사와 방백과 소란스러운 풍경과 스포트라이트가 떨어지는 집중을 눈 앞에 그려보게 한다. 그리고 대사들 사이사이, 자유시 사변에 대한 의병장들의 포고문이나, 의병대 관계자들이 모낸 보고서나 문서의 인용들이 들어가며 만화는 독자를 순식간에 역사의 한 복판으로 끌어들인다.

일찌기 어머니를 여의고, 마을 아낙들이 젖을 품앗이하여 기른 소년 범도는, 다시 아홉 살도 되기 전에 아버지를 여의고 큰아버지 댁에서 자란다. 그는 열다섯 되던 해에 나이를 속이고 청별기에 들어가, 이곳의 곡호대에서 음악을 배우고, 공부를 하고, 제식 훈련을 하며 비로소 세상에 홀로 고립되어 있지 않음을,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음을 느낀다. 하지만 소년 별기들이 속한 세상은 조선 사람들에게도, 또 청나라 사람들에게도 겉도는 것이었고, 소년 범도는 자신이 속한 시대와 세상을 정면으로 마주보게 된다. 그리고 그 계기가 되는 인물은 청별기의 부위였다. 세도가의 집안 출신으로 똑똑하고 재주가 많으며 일본 유학도 다녀왔다고 하나 그는 어디까지나 서자였고, 범도의 세상 떠난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폐병을 앓고 있었으며, 김옥균과 더불어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불온한 꿈을 꾸고 있었다. 그리고 범도는 부위의 외조부인 의원을 도와, 피를 토하고 쓰러진 부위를 돌보며 다시 생각한다. 자신들의 왕을 죽인 겨울 나라의 이야기와, 개화일 수도, 혁명일 수도, 유신일 수도 있는 불온한 이야기들을. 그리고 그 불온함에 마음이 두근거리면서도, 언젠가 사랑하는 제 가족과 오순도순 살고 싶다는 꿈을 꾸던 소년의 세계는 부위의 죽음과 갑신정변으로 끝난다. 자신이 별기였다는 것을 꽁꽁 숨긴 채, 개화당과 조금이라도 접점이 있는 이들을 모조리 색출해 끌어내고 죽이려는 것을 피해 도망치면서.

하지만 소년 홍범도의, 때로는 비극적이고 때로는 고통스러운 요람기는 앞부분의, 자유시 참변 재판 장면과 연결된다. 가족과 행복하기를 바랐지만, 그는 독립운동 과정에서 아내와 두 아들을 잃었다. 부위가 말했던 세계, 블라디보스토크와 만주와 아무르 강은 홍범도가 나아가려는 세계와 이어진다. 같은 동족이, 청군기와 왜군기로 나뉘어 대립하고, 다시 갑신정변이 실패하며 서로 죽고 죽이는 모습은, 자유시 참변 때 “나는 차마 붉은 군인이나 내 종족 빠르찌산을 죽일 수도 없고 그들에게 죽기도 애원하니 자살하오.”라며 제야강에 투신했던 열아홉 살 난 병사를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다시, 도망치는 소년 홍범도의 모습을 보다가 앞페이지로 돌아가 본다. 참변 이후 피흘리는 시신들을 수습하고, 강에서 투신한 병사들을 건져내며, 살아남은 이들은 생각한다. “다시는 우리끼리 싸우는 일이 없기를…..” 하고.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채 모두 이루어지지 못한 소망들을.

그리고 다시 지금, 육군사관학교에 세워진 홍범도 동상을 두고 러시아와 손잡고 빨치산 활동을 했네(파르티잔은 보통명사며, 홍범도가 러시아와 손잡던 시절은 레닌 시절이고, 북한은 고사하고 김일성도 아직 어린아이였던 시절이다. 무슨.) 어쩌네 하며 뽑아내어 어디 수장고에 처박아 놓겠다는 친일파 쭉정이같은 놈들은 결코 이해치 못할 것들을. 그들이 추앙하는 백선엽이나 박정희처럼 해방 전에는 친일파가 되어 제 민족에게 총칼을 들이대던 인간이나, 전두환처럼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하던 인간들의, 죽여놓고도 죽은 놈이 뭔가 문제가 있었으니 죽었겠지 하고 조롱하는 그 뻔뻔함으로는 결코 알 수 없을 것들을.

PS) 단행본도 있지만, 광복회는 만화를 전문적으로 출간해 온 출판사와는 거리가 멀다보니 웹툰 쪽이 좀 더 보기 편할 수 있다.
연출 면에서는, 내용 빼고 연출만으로도 공부할 포인트가 한두 곳이 아닌 만화. 단행본도 나오자마자 구입했는데, 이번에 국방부에서 하도 같잖은 소리들을 하고 있어서 다시 꺼내서 리뷰했다.

PS2) 다시 읽다 생각해보니 저 부위는 박영효의 서형제 쯤 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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