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오쿠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오오쿠”(요시나가 후미 원작)

넷플릭스판 오오쿠는 좋은 면에서도 나쁜 면에서도 만화책을 그대로 애니메이션으로 옮겼다고 해야 할 것 같은데, 요시나가 후미 덕후들이 입 터는 솜씨들을 생각하면 역시 만화책을 그대로 옮긴다, 연출의 개성을 가급적 추가하지 않는다는 전략이 현답인것 같기도 하면서도 아쉽다. 물론 평면에서 가장 아름다운 요시나가 후미의 인텔리스럽고 박복하며 위장병 앓을 것 같은 미남들은, 그 미남력이 애니화 되면서 좀 깎인 면이 있다. (하지만 실사판에서 깎인 미남력을 생각하면 뭐 이정도는.)

투덜거리는 건 여기까지. 일단은 요시나가 후미는 연출로는 현재 일본의 만화가 중 단연 정점에 선 사람이다. 물론 정석적이고 교과서적인 연출이 아니다. 그리고 함부로 그 연출을 따라하면 100% 망한다. 연출에 대한 이해가 있고, 동양화적인 여백의 미를 감안할 수 있고, 사람의 움직임이 TV나 영화의 화면으로 보일 때 어떤 식으로 움직이는지를 이해하지 않고 따라하면 그냥 대갈치기가 될 뿐이다. 말하자면 주연부터 조연까지 전부 연기파 배우들로 구성된 이들이, 여백과 침묵 사이에서 감정을 그려내는 연기, 를 그대로 만화로 옮긴 것 같은 연출이다. 실사로 보면 연기가 부족하다고 답답해하고, 웹툰 식으로 풀어서 전개하면 100% 망할 수 밖에 없은 연출. 애니메이션은 이 연출을 지루할 정도로 충실하게 따른다. 만화에 그대로 색을 입혀 영상으로 만든 듯한 느낌이고, 꼭 필요한 부분이 아니면(아리코토와 이에미츠의 감정이 격정적으로 폭발하는 장면들) 화면 역시 역동적이지 않다. 인물의 얼굴을 클로즈업해 눈만을 움직이거나, 다른 남자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바라보며 소매 밑으로 손만 내밀어 그 손을 서로 마주잡는 장면 등, 큰 움직임이 아닌 작은 움직임에 신경을 썼다. 애니메이션의, 가급적 충실한 재현이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정지 컷에서는 의외로 요시나가 후미의 그림에 충실한 캐릭터들이 움직일 때는 다소 우리가 알던 그림보다 덜 잘생겨 보이는 것도 이해가 간다. 요시나가 후미의 미남들은 객관적인 미남이라기보다는, 청결하고 단정하며 처연한 맛이 나는, 그 분위기 미남들이 많으니까.

원작에서도 인상적이지만, 연기 면에서나 작화 면에서나 연출 면에서나 서사 면에서나 카스가노츠보네가 매우 인상적이다. 아리코토가 나오는 몇몇 절제된 장면은, 애니메이션이니까 의도적으로 연출을 조금 늘이거나 줄여도 좋았을 텐데.

아리코토는, 무라세가 “그 섬뜩한 교토 말투는 교정해 주십시오.”한 이후로 에도 말투로 말한다는 설정인데, 내가 지금 남의 나라 말을 사투리까지 구별할 리 없겠지만 듣다 보면 독백이나 생각할 때와,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의 말투가 다르다. 그렇게 생각하니 아리코토와 이에미츠의 이야기는, 특히 아리코토의 인생은 원래도 비극이지만 더욱 비극적으로 다가온다.

원작과 이 애니메이션에서 마데노코지 아리코토는 교토의 궁정 귀족 출신으로 학문이 높고 풍류도 뛰어난 미남자였지만, 질병과 기아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고 고통이 가득한 세상에서 사람들을 돕고 싶다는 마음으로 출가하여 승려가 된다. 물론 출신이 출신인지라 열 여덟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주지가 되지만, 그는 기본적으로 사람들을 자애로 대하고, 널리 자비를 베푸는 데 제 몸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다. 젊은 남자만이 감염되는 적면포창 환자가 죽어서 실려나가자, 그 앞에서 몸을 낮추고 경을 읽어주는 그런 사람. 그는 “사랑해야 하는 딸들”에 나오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사람을 차별하는 거잖아.”라는 결론과 함께 수녀가 되는 인물과 비슷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런 인물은 주지로 취임하며 쇼군에게 예를 올리러 갔다가, 쇼군을 모시기 위해 오오쿠에 들어와야겠다는 청천벽력같은 말을 듣는다. 카스가노츠보네는 그를 파계시켜 환속하게 만들 생각으로 유녀와 동침할 것을 명령하고, 이를 거부하자 동행했던 승려 묘케이를 눈 앞에서 살해한다. 결국 아리코토는 자신을 시중들던 어린 승려인 교쿠에이를 구하기 위해 신념을 꺾고, 유녀와 동침하고, 머리를 기르고 환속한다. 주지로서의 명예도, 승려로서 사람들을 위해 살겠다는 결심도 모두 빼앗긴 그는, 아직 소녀인 쇼군 이에미츠에게서 교토 귀족으로서의 이름도 빼앗기고 “오만”이라 불리게 된다. 그가 이에미츠의 고통을 알고, 지금 눈 앞에서 고통받는 이 사람을 구하겠다는 마음으로 그 곁에 남고, 그를 사랑하게 되지만, 이번에는 자신이 불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목숨줄 같았던 연인에게 다른 남자와 잠자리를 하라고 고하는 일을 도맡고, 사랑하는 사람이 자식을 낳아 어머니가 되고, 또 쇼군이라는 이름의 정치생물로 변모하는 모습을 바로 곁에서 지켜보아야 했다. 그 사랑하는 사람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홀로 남겨져서, 그는 요시무네 즉위 코앞까지, 거의 60년을 더 살아간다. 이에미츠가 다른 남자들과의 사이에서 낳은 세 딸들과 그 후손들은 전부 쇼군 또는 쇼군의 어머니가 되지만 다들 후손을 제대로 남기지 못한다. 그리고 이에미츠의 자손들이 전부 대를 잇지 못하고 죽어도, 이에미츠의 말처럼 “도쿠가와는 멸망”하지 않는다. 카스가노츠보네의 말처럼 “몰일”도 하지 않는다. 그저 승려가 되어 세상에 자비를 베풀고자 했던 아리코토는 강제로 환속당해 모든 것을 잃고 또 잃다가 모든 것을 다 잃은 뒤에야 다시 승려가 되어, 사랑하는 사람의 흔적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모습을 천천히 지켜본다. 정말 잔인하기도 하지.

그리고 그런 아리코토는, 그 모든 인생의 격랑 속에서도 끝까지 타인을 선과 자비로 대하려는 사람이다. 독백이나 생각할 때 그의 말투가 변하지 않는 것 처럼, 그의 내면은 오오쿠에 들어오기 전과 변하지 않는다. 아니, 변하지 않으려 한다. 두 사람의 사랑을 가로막았던 카스가노츠보네가 죽고, 이에미츠가 여쇼군으로 사람들 앞에 서고, 그의 세 딸들이 그저 히메에서 쇼군의 후계자가 된 이후에, 대를 잇는다는 이유와 상관없이 이에미츠가 사랑하는 아리코토를 침소로 불러들였을 때, 그는 사랑하는 사람을 독점하지 못하는 번뇌와 질투 속에서 살아가고 싶지 않다며 침소의 소임에서 물러나게 해달라 청한다. 자신의 덕을 덕으로서 지키기 위해, 자신의 사랑을 변치 않는 형태로 지키기 위해. 그는 변치 않는 사람이고, 그런 점에서 “이에미츠(남)에 대한 맹세를 지키기 위해” 약을 입에 대지 않고 고통을 감당하며 죽어가는 카스가노츠보네와는 동전의 앞뒷면같은 인물이다.

그 이야기의 시작을(그렇습니다. 이것은 아직 시작입니다) 이렇게, 애니메이션으로 죽 이어서 보다 보니 정말로 아리코토 기준에서는 이에미츠가 자식을 낳지 못한 채, 두 사람이 함께 “도쿠가와와 함께 멸망”하는 편이 나았을 텐데. (아니, 이런 이야기 좋아한다고요)

…….그건 그렇고 정말 요시나가 후미 선생님 피곤하고 위장병 달고 살 것 같은 인텔리형 가냘픈 미남인데 손마디만은 아 그렇지 이 캐릭터 남자군, 하고 느껴지는 박복한 미남 만드는 데 어쩜 이렇게 천재신가 몰라. 그리고 결국은 오오쿠에 몇 대 걸러 하나씩 아리코토 몰드의 남자들을 넣는 걸 보면 저거 정말 타입이셨군 싶다.

PS) 근데 뭐 사실 아리코토 몰드의 관상을 하고 있어도 에몬노스케와 5대 쇼군 츠나요시 쪽은…….(아직 애니메이션 안 나옴)

얘들아 대화를 하렴. 아니, 너희는 일단 섹스라도 하는 게 낫겠다(……이 사람은 온갖 로판을 보며 제발 섹스를 하지 말고 대화를 해라를 외치는 사람입니다) 라는 느낌임. (먼산) 사실은 이 커플도 좋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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