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수하지만 굉장해! 교열걸 코노 에츠코”라는 드라마의 클립을 본 것이 몇년 전이었다. 소개팅 자리에 나와서 “여자는 뭘 모르지~”하고 거들먹거리는 시대착오적인 남성 캐릭터를, 교열자 특유의 정확한 사실관계 파악으로 자근자근 밟는 장면이었는데, 그 드라마를 언제 보고 싶은데, 하고 생각만 하다가 몇 년이 지나 버렸다. 어차피 드라마 한 시즌을 보는 것보다 책 한 질을 읽는 게 더 빠르지 싶어서 도서관에서 소설을 대출해 오자마자 웃음을 터뜨렸다.
첫째, 고노 에쓰코는 제목과 달리 수수한 타입은 아니다. 그는 어릴 때 부터 경범사의 패션잡지 “라시”를 탐독해 왔고, “라시”를 동경했으며, “라시”의 에디터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경범사에 입사한다. 그러나 그의 생각으로는 이름이 “교열”과 비슷하게 들려서, 실상은 학벌만으로는 떨어질 상황이었지만 면접 중 그의 기억력과 정확성을 높이 산 새송이버섯을 닮은 교열부 부장의 추천으로 그는 교열부에 배속된다. 하지만 가장 수수한 부서인 교열부에서, 그는 혼자 패션 에디터처럼 입고 다니긴 한다.
둘째, 중간중간 에쓰코가 교열하는 작품의 내용이 나오는데, 실제 있는 작품들을 모티브로 한 것이 꽤 보인다. 이를테면 “제석천과 범천, 아수라의 삼각관계를 그린 연애소설”이라니, 이거 클램프냐고! 성전이냐고! 클램프라 소설도 쓰는 평행우주…… 부럽다. 1권 시작하자마자 나오는 에로 미스터리 원고도 그렇다. 죽은 시신을 보고 맥을 짚는 것도 아니고 가슴을 만지며 가슴은 아직 부드러웠다고 묘사하는 내용이라니, 제정신인 인간이라면 저런 걸 쓸 리 없잖아 하고 기막혀 하다가도, 과거 1세대 추리소설에서 실제로 그런 작품들을 봤던 걸 떠올리고 한숨…….. 사실은 작가들도 실제 작가를 모델로 한 인물도 있고, 잡지도 마찬가지다. 아니, 소년만화 잡지 이름이 “고무고무”라니 너무 노골적이잖아. 20년 전에 나왔으면 “에네르기”였겠네.
셋째, 은근히 코지 미스터리스러운 요소들이 많아서 재미있다. 특히 혼고 다이사쿠 작가의 헌신적인 부인이 가출한 뱀장어 사건이라든가, 카루이자와로 연인과 놀러갔다가, 원고 속에 숨어있는 힌트에서 작가의 이름 뒤에 숨어 있는 진짜 작가를 찾아내거나 하는. 애초에 관찰력이 좋고, 오타쿠처럼 집요하고, 기억력이 좋아서 십년 전 보았던 잡지의 기사 같은 것을 기억하고, 다른 사람에게 큰 관심이 없고, 질투의 감정 같은 것에 무신경한 에츠코의 속성들은 사실 탐정 캐릭터의 속성에 가깝기도 하다.
여러 서브컬처적 요소들(탐정 캐릭터, 코지 미스터리, 기존 작품과 실제 상황에 대한 덕후적 패러디)과, 웃음을 주는 캐릭터성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는 사뭇 진지하다. 사회 활동을 하는 여성에 대한 편견, 출신 대학에 대한 편견, 남성 작가의 방탕함과 무능함, 사축이라고 자조할 만한 회사원들의 일상 등 현실적인 이야기가 이어지는 가운데, 교열 분야에서 맹활약을 하던 에츠코는 자신의 꿈(“라시”의 에디터가 되는 것)에 다가갔다가 다시 교열이 자신의 적성이었음을 깨닫는다.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도쿄대를 졸업한, 외모를 꾸미지 않던 후지이와는 일을 통해 자신의 세계를 확장해 나간다. 동성애자인 요네오카는 사람들을 상대하고 자신을 드러내고 때로는 작가들의 횡포 앞에 노예처럼 설설 기어야 하는 편집자 대신, 원고 뒤에서 일하며 자신을 감출수 있는 교열의 길을 택한다. 독자 모델 출신으로 패션잡지의 유능한 에디터로 활약하던 모리오는 자신이 진짜 하고 싶은 기획들을 찾아 이직한다. 초반에는 무신경하고 개저씨 상사처럼 보이던 가이즈카도, 사실은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무명작가들을 데뷔시키겠다는 꿈을 위해 일단 대박을 내고 자신이 추천하는 작가의 책을 낼 기회를 잡고 있었고, 결정적으로 아직 나이도 얼마 안 먹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갑자기 마음이 너그러워진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있는 일 사이를 오가며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사회초년생 20대의 분투가 대견하다가도, 우리와 똑같아서 문제인 부분과, 우리에게는 없는 또 다른 문제들을 보고 그 불합리에 치를 떨게 되기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교열 담당이 따로 있는 것이 당연한 분위기인 것이 부럽다. (아니, 본문에도 나오지만 모든 출판사에 교열 부서가 있는 것은 아니다. 요네오카가 어렸을 때 엽서를 보냈던 만화 잡지가 속해 있는 출판사에는 교열부가 없다.) 편집자가 교열도 함께 보는 것이 당연하고, 때때로 잡지 같은 데서는 편집자 인원이 너무 적어서인지 아래아 한글의 맞춤법 검사기만 한번 휘 돌린 듯한 교정지가 날아오기도 하는 상황에서, 교열 부서가 있어서, 신칸센 열차 시각 같은 것을 확인해주는 시스템에서는 또 얼마나 정교한 미스터리 소설을 만들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중간중간 하며 읽었다. 꼭 예전에 “바쿠만”을 읽으면서 부러워 했던 것 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