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평연간의 격정

화평연간의 격정 – 김혜량, 북레시피

“내상, 이곳 차 맛이 왜 좋은 줄 아세요? 찻잎이 좋아서가 아닙니다. 차를 덖고 찌는 솥이 진나라 정鼎을 녹여 만든 것이랍니다. 불세출은 내상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내상 덕에 폐하께서도 제 몫을 해내시는 거지요.”

송나라 황제 조융은 성실하고 알뜰하며 일을 잘 하는 황제다. 그는 자신의 업적을 남기는 대신 선황들이 벌여놓은 일들을 수습하며, 한달 급여 천이백관, 만이천냥을 아껴서 쓰고 남은 것은 좌장고에 모아놓는 근검절약하는 인물로, 자기 자신을 위해 짓는 행궁에는 국고에 손 안 대고 오직 내탕금만으로 충당한 것을 뿌듯하게 여기는 이다. 문 귀비의 아들이자, 장남도 아니었던, 옥좌가 한없이 멀어 보이던 어린 책벌레 벽왕은 형님인 회인태자가 세상을 떠나고, 또 다른 형님인 노국공이 음모에 휘말려 몰락하자 스승이자 환관인 추신의 헌신적인 보좌를 받으며 보위에 올랐다. 조융은 환관이지만 사대부와 같은 긍지와 학식을 갖추고 유교적 이상국가를 만들려 하는 추신과 손을 잡고 25년동안 천자 노릇을 했다. 조융이 정해주는 대로 육궁을 드나들며 꼬박꼬박 잠자리를 하고, 자식들도 여럿 얻었다. 그렇게 불혹이 된 조융은 어느날 갑자기 격정적인 사랑에 빠진 듯, 아름답고 천진한 태학생 유가경을 시험한 뒤, 그를 새장같은 밀원에 가둔다. 그리고 유가경에게 자신의 지아비가 되어달라 청한다.

추신은 한쪽 고환을 잃고 환관이 된 사내다. 무척이나 아름다운 얼굴과 빼어난 글씨, 여기에 끝없이 공부하는 마음과 우아우미한 성정이 더해진 그는 (남아있는 한쪽 고환 덕에 다른 환관들과는 달리 남성적인 면모를 갖고 있는) 송대 유교정신이 빚어낸 사대부의 정수와도 같은, 그러나 (망가진 한쪽 고환 탓에) 온전한 몸을 갖지 못하고 자손을 남길 수 없는, “결핍”된 이다. (잠깐, 그렇다면 역시 사대부다움, 사내다움, 유교의 이상을 구현하는 요체는 고환에 달렸다는 이야기인가. -> 절대 아닙니다.) 격정같은 말과는 거리가 먼 듯한 그의 삶은, 조융을 문치주의의 이상과 같은 군주로 가꾸어 나가는 데 온전히 바쳐졌다. 혼인을 하고, 후궁들을 맞이하고, 자식들을 낳아도, 조융에게 있어 추신은 떼어놓을 수 없는 생의 일부이며, 추신 앞에서만큼은 어린애처럼 떼를 쓰고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고집을 부리며 남들 앞에서 보이지 않는 모습들을 드러낸다. 자신이 조융의 유일한 사람이라는 그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야말로 추신에게는 은밀한 기쁨이다. 일면 무감해 보이는 추신에게 있어 그 고집센 소년왕을 사랑하고 아버지처럼 이끄는 것은 그것은 자신의 결핍을 채우는 비뚤어진 정념이지만, 스스로는 그 사실을 결코 깨닫지 못한다. 그렇기에 추신만을 바라보던 조융은 강철처럼 냉담한 그의 질투를 불러일으키듯, 추신 본인은 깨닫지 못했지만 마치 젊은 날의 추신처럼 아름다운 유가경을 사랑한다. 머리에 꽃을 꽂고, 자신의 자식 뻘이나 되엄직하게 어린 청년에게 사랑을 구걸하고, 뜻대로 되지 않자 그를 감금하고, 그를 둘러싼 환관 누구도 유가경에게 말을 걸지 못하게 한다. 유가경의 귀에 오직 자신의 목소리만이 들릴 수 있도록.

과거 시험을 준비해야 할 사대부가 황제의 밀원에 감금되고, 그것도 모자라 음양의 법도를 넘어 황제의 지아비가 되어야 하고, 그 황제는 자신에게 영원한 사랑을 요구하는 상황에서, 유가경은 밀원이라는 아름다운 감옥에서 나가 가족들에게 돌아가기 위해 조융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증명하려 한다. 편지를 쓰고, 능금을 따고, 연자의 껍질을 벗긴다. 그리고 사랑을 증명하기 위한 행동이 반복되며 유가경의 감정은 점점 순정한 사랑의 형태를 갖추게 된다. 정작 그를 사랑한다며 밀원에 감금한 조융은, 유가경이 원하는 것은 단 하나도 이루어주지 않으며, 그의 앞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있는데도. 이야기의 중후반까지, 그의 사랑은 유가경이 아니라, 유가경이라는 필터를 거친 추신에게 향해 있다.

한 마디로 아주 아름답게 망한 사랑이다.

“밀원은 네 것이다. 너를 위해 지었지.”

무감한 연상의, 아버지와 같은 아름다운 스승과, 격정을 감추고 25년동안 사랑하는 사람이 원하는 모습이 되려 했던 황제, 그리고 그 비뚤어진 사랑에 희생되었으나 역시 사랑에 빠지고 만 청년의 정념은, 누구를 태자로 정할 것이냐를 결정하는 입태자의 과정과 맞물린다. 황제가 될 것을 기대받지 않았으나 끝내 옥좌에 오르고 만 조융과, 그와는 달리 긍휼한 마음을 가지고, 군주의 도리란 천하에서 가장 큰 거짓말이 이냐나 의문을 품는 그의 아들 숙왕은 자신을 제위에 올리기 위해 노국공에게 없는 죄를 뒤집어 씌우고, 제 손으로 사람을 죽이던 추신의 죄를 직면한다. 그리고 그들의 갈등 속에서 파국의 전조처럼 황태후는 숨을 거둔다.

“추신인들 그런 짓 하고 싶었겠는가. 그는 권력에 눈이 먼 사람이 아니다. 공맹의 말씀을 주저 없이 행했을 뿐이다. 나처럼 허술한 이가 군주가 되는 걸 막으려 천명을 따랐을 뿐이다. 제 타고난 것을 펼쳤을 뿐이다. 내가 개봉에서 쫓겨나올 때, 추신이 남훈문에 나와 절을 했다. 추운 버드나무 가지 아래서 끝까지 지켜보더구나. 생각해보아라. 그 꼴을… 너는 판을 그리 만들지 말라. 태자가 되면 황제가 되기 전엔 죽지 말라. 일찍 죽을 거면 황제가 되지도 말라. 회인태자께서, 일찍 붕하신 탓에 우리 형제들은 이 모양이 되었다. 태자가 되지 못하면 생업을 가져라. 그래야, 혼탁에 먹히지 않고 너의 삶을 살 수 있다.”

숙왕을 태자로 삼고 양위한 뒤 유가경과 함께 소주 행궁에 내려가 행복하게 살고 싶었던 조융과, 궁을 떠나고 싶었던 유가경, 그리고 유가경을 떼어놓아서라도 조융이 양위하는 일만은 반드시 막아야 한다고 생각한 추신의 갈등 속에서, 유가경은 추신에게 속아 영원을 상징하는 옥환 대신 인연의 끊어짐을 상징하는 옥결을 받는다. 조융이 끝내 자신을 내쳤다고 생각한 유가경은 조융이 내려준 상아 비녀로 자결한다.

“짐이 그대에게 주었던 마음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저와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네 살, 너무 어렸을 떄 부터 추신을 사랑했던 조융과, 너무 늦게, 그 모든 파국이 지나고 다시 다섯 해가 지나도록 그 마음을 알지 못했던 추신은, 이제 예전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유일한 존재이자 생의 일부가 될 수 없다. 조융은 추신을 닮아서가 아니라 자신이 누려보지 못한 청춘을 가졌던 유가경을 사랑했다. 그리고 추신에게 그 모든 마음을 고백한 뒤, 자신이 죽은 뒤 유가경과 함께 묻으라고 명한다.

“사실 짐은, 그대가 짐의 무덤이길 바랐다. 살아서 이루지 못했으니 죽어서라도 함께 있고 싶었달까.”

조융은 정말로 유가경을 사랑했을까. 추신은 조융을 아득히 높은 자, 후안무치가 적용되지 않는 자, 도리를 정하는 자이자 유교적 이상향을 구현하는 인간, 성군으로 만들었고, 유가경은 조융을 울고 웃게 만들었다. 그에게 있어 유가경은 자신이 잃어버린 청춘이자, 어릴 적 자신이 사랑했던 추신의 젊은 시절을 투영한 그림자와 같다. 그는 마지막에 자신이 죽은 뒤 유가경과 합장하라고, 죽은 뒤에는 상냥한 유가경과 함께 있을 테니 너는 자식같은 나만이라도 행복한 걸 위안 삼으라고 모질게 말하지만, 그의 마지막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전부, 너는 나를 잊지 말아라. 잊어서는 안 된다. 내 사랑을 알아주지 못한 것을 죽는 날까지 후회하고 회한하거라. 나는 너를 잊고, 이 번뇌에서 벗어날 것이다, 그러길 바란다는 말 뿐이다. 그의 사랑은 여전히 추신에게 매여 있지만, 그는 자신을 사람으로 되돌려 놓았고, 자신에게 안식을 주었고, 자신을 사모하다가 끝내 과거의 자신이 하지 못했던, 지극한 사랑으로 인해 끝내 목숨을 버리는 일을 하고 만 청년에게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그야말로 아주 아름답게 망한 사랑이다.

이야기의 전반에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들이 구석구석 배어 있다. 총명한 어린 황자를 맡아 기르며 처음으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고, 그를 이상적인 군주로 키워내는 추신, 아들들을 비교하고 의심하고 때로는 성에 차지 않아 답답해 하며, 그 아들들 중 가장 좋은 패를 골라내어 옥좌로 이끄는 조융, 의심하는 부황과 의심받아 내쫓기는 아들, 사라진 아들을 걱정하는 아버지와 밀원에 갇혀서도 아버지를 걱정하는 유가령, 말 한 마디 나눌 수 없었지만 아름답고 상냥한 그 청년을 마음을 다해 먹이고 입히고 사랑하며 처음으로 누군가의 아비가 되는 감정을 맛보았다가 그 청년을 자신들의 손으로 장사지내야 했던 밀원의 환관들, 그리고 유가령의 아버지인 유렴에게, 머리를 숙이며 사랑과 죽음을 이야기하는 조융. 그리고 유사부자 관계였기에 어긋나고 만 조융과 추신의 사랑까지.

송나라의 수도 개봉의 구석구석이 상당히 높은 해상도로 구현된 가운데 벌어지는 이 격정적인 치정극을 보다 보면, 대체 작가님은 뭘 어쩌다가 송나라에 잘못 치어 이런 애정사를 그려냈는가 싶다가도, 송 인종 때를 배경으로 한다면 당연히 이런 이야기도 나올 수 있지 하고 납득했다. 무엇보다도 포청천도 나오고. 온갖 인물들에 그에 걸맞는 이름이 붙어 있는 주제에 개봉부윤은 이름이 안 나온다. 당연하다. 이 시대의 개봉부윤을 이야기하려면 포청천 이야기를 해야 하고 그러면 갑자기 이 이야기가 현실로 확 끌려들어오고 어쩐지 개작두를 대령해야 할 것 같고. 송나라에 치어 이런 절절하게 망한 사랑 이야기를 그린 작가님을 애도하는 한편으로, 다음번에 출판사와 웹소설 기획을 이야기할 때 이 작품을 근거로 들어야겠다는 현실적인 생각도 했다. 전에 송 인종 시대를 배경으로 로판을 쓰려고 하다가 출판사에서 송나라는 무슨 송나라냐고 뜯어말려서 못 쓴 적이 있는데, 아무래도 선례가 있으면 설득하기 쉬워지니까. 그리고 다 읽고 나서 다시 한번, 이건 정말 클래식한 감성이구나, 하고 한숨을 짓게 된다. 아름답고 고결하며 거인같은 인물들이 망한 사랑으로 서로를 바라보다 끝끝내 같이 비극 속으로 무너지는 이야기라니, 너무나 고전적이어서 더욱 사랑스러웠다.

PS) 근데 아무리 봐도 정말, 작가님이 송나라 덕질을 하다가 나의 이 크고 아름다운 덕질을 봐줘 하면서 독자들에게 영업, 아니 구애의 춤을 추는 듯한 대목이 한두 곳이 아니고. 작가님은 대체 송나라에 무슨 일을 당하신 건가. 조윤의 추신에 대한 사랑만 망한 게 아니라 작가님도 망하신게 아닌가.(덕후적으로)


게시됨

카테고리

,

작성자

Translat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