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퍼스트 슬램덩크

더 퍼스트 슬램덩크

칼럼니스트 위근우는 2023년 1월 6일자 경향신문 “위근우의 리플레이”에서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감상을 다루며 이렇게 말했다. “송태섭은 한번도 자신보다 작은 상대와 맞붙어 본 적이 없다”라고. 정말 그 말 그대로다. 고등학교 2학년, 170cm가 되지 않는 키(그래서 박치기로 정대만의 앞니를 날려버리기 수월한 높이)로 도내 최고의 선수들과 맞붙으며 북산의 사령탑 노릇을 하는 송태섭은 원작에서도, 한 번도 수월한 싸움을 해 본 적이 없는 인물이다. 그리고 “슬램덩크”의 원작자이자 이번 극장판의 감독을 맡은 이노우에 다케히코는, 아직 한번도 영상화가 되지 않았던 산왕공고와의 일전을 배경으로, 원작에서 그려지지 않았던 송태섭의 과거를 통해 이 애니메이션을 “농구가 나를 (제대로 된)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다”고 요약 가능한 농구에 바치는 청춘의 헌사로 만들었다.

사실 송태섭의 이야기는 이미 90년대 말, 단편인 “피어스”에서 다루어 진 적이 있다. 바닷가의 비밀 아지트(동굴)에서, 바다에 피어스 상자를 던지려던 아야코(한나)와 싸우던 초등학교 6학년의 료타(태섭)는, 자신의 동굴로 한나를 데려가고, 옷핀을 달궈 귀를 뚫으며 3년 전 바다에 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형을 기다리고 있다고, 같이 농구하기로 약속했으면서 친구들이랑 낚시하러 가길래 돌아오지 말라고 소리쳤는데, 정말로 돌아오지 못했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이번 “더 퍼스트 슬램덩크”에서 오키나와에서 농구 유망주였던 형 송준섭(미야기 소타)이 친구들과 낚시하러 갔다가 세상을 떠난 이야기로 다시 돌아온다. 그는 형이 달고 있던 7번을 달고 오키나와에서 주니어 선수로 활동하지만, 형과는 다른 작은 몸집 때문에 두각을 나타내진 못한다. 그런 태섭을 보며 괴로워하던 어머니는, 태섭과 막내딸 아라를 데리고 카나가와로 이주한다.

태섭이 농구를 계속 하는 것은, 어머니에게는 죽은 준섭을 생각나게 하는 괴로운 일이다. 사람들은 유망주였던, 그러나 죽은 준섭과 지금 여기에서 농구를 하고 있는 태섭을 계속 비교한다. 태섭은 형과 같은 7번을 달고, 형이 쓰던 축제 가면을 쓰고, 형의 티셔츠를 입고, 형이 동경하던 농구선수들의 모습에 자신의 모습을 덧씌운다. 그야말로 자신의 영웅이었던 형을 입는 듯한 행위다. 준섭이 죽은 후 태섭은, 그야말로 생과 사 사이에 걸쳐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어머니는 태섭이 농구를 계속 하는 것을 원치 않고, 준섭의 유품이 된 사진이나 트로피를 치우고, 고향인 오키나와를 떠난다. 집 근처에서는 드리블할 곳도 없고, 아무도 그의 형을 알지 못하는 곳에서, 태섭은 어머니와 갈등하면서도, 농구를 계속 하는 것을 포기하지 못한다. 그에게 있어 농구는 가족들에게 죽은 형의 기억을 되새기게 하는 고통스러운 일인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살게 하는 힘이다. 드리블 연습을 하던 태섭은 자신보다 1살 위인 중학 MVP, 무석중학교의 정대만에게서 형의 모습을 겹쳐 보지만, 그 정대만은 무릎 부상을 극복하지 못하고, 자신이 계속 하지 못하는 그 농구를 계속하는 북산고 농구부를 보며 고통스러워하고, 태섭에게 시비를 건다. 그는 태섭의 농구화=농구를 계속 하고 있다는 증거를 일부러 짓밟고, 운동부는 싸움에 휘말리면 시합에 출전하지 못할 수 있기 때문에 참으려던 태섭은 대만이 농구화를 걷어차자 덤벼들어 싸운다. 그는 자신이 농구를 계속하지 않으면 그들과 마찬가지로 폭력을 휘두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한다. “심장이 뛰었다”며, 그 순간 겁을 먹었지만 맞서 싸우고, 농구화가 짓밟히는 것을 보고 순간 이성을 잃고 덤벼들었던(원작에서 그는 철이가 한나를 위협하자 이성을 잃고 덤벼든다. 농구와 한나 모두 그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고, 태섭에게 있어 농구에 대한 사랑과 한나에 대한 사랑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는, “쓰레기 같다”며 자조한다. 그런 쓰레기같은 자신에게 농구를 계속할 자격은 없기에, 그는 농구화를 상자에 봉인한다. 그리고 바이크를 몰고 달려가다가 사고를 당해 죽을 뻔 한다.

사고를 당하는 순간 그가 본 것은 카나가와가 아닌 오키나와의 바다다. 요절을 통해 이상화된 형과 달리 약함과 추한 자신을 직시한 순간, 그는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게 낫다”는 감정으로 달려나간다. 헬멧은 썼지만 생명줄인 버클은 채우지 않은 채 질주하던 그는 자신의 심연이자 죽음, 형이 깃들어 있는 세계를 마주한다. 그리고 바닥을 박차듯 생으로 돌아온다. 살아난 그가 제일 먼저 마주한 것은 어머니와 여동생이다. 아버지 대신 가장(주장)이 되겠다고 했던 형과 달리, 어머니를 괴롭게 만드는 자신에게 태섭은 다시 환멸을 느낀다. 그러나 그는, 농구를 할 수 밖에 없다. 그것만이 자신을 인간으로서 살게 하기 때문에.

똑같이 부상을 당했지만, 정대만은 그 부상 이전의 실력을 보이지 못하는 자신에게 좌절해 농구코트로 선뜻 돌아가지 못한다. 같은 상황에서 태섭은 자신이 농구를 계속하게 만들었던 뿌리, 오키나와로 향한다. 그곳의 바닷가 동굴은, 과거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고 식민지가 된 데다 태평양전쟁 때는 가장 먼저 연합군의 공격을 받았던 오키나와의 공습 대피용 방공호였고, “피어스”에서 한나와 만났던 동굴이자, 형과의 추억이 남아있던 공간이다. 아버지를 여의고 집에서 울 수 없었던 형은 그 동굴에서 눈물을 흘렸다. 형은 산왕공고가 실린 농구잡지를 보며, 언젠가 산왕공고에 입학하는 게 아니라 산왕공고를 쓰러뜨릴 꿈을 꾸었다. 산왕공고가 표지에 실린 그 잡지는 바로 채치수가 초등학교때 구입해서 낡아 너덜너덜해지도록 보았던 것과 동일하다. 집안의 ‘주장’이 되겠다고 맹세했던 형과 태섭이 ‘주장’이라고 부르는 채치수, 두 사람의 꿈은 그렇게 낡은 잡지를 통해 겹쳐지고, 죽은 형이 낚시를 가기 전 형이 두고갔던 농구공과 아대는 그가 물려받는 성배와 같은 유품이다. 이 동굴은 형의 유품과 함께 그 꿈과 의지를 이어받는 레거시의 공간이고, 형의 그림자를 좇으며 방황하다가 교통사고로 죽었다 살아난 태섭은 그 동굴에서 형이자 가장이자 주장의 마음을 이어받으며 농구선수로 다시 태어난다. (동굴은 종종 죽음과 재생, 자궁의 메타포이며, 단편 “피어스”에서 그가 나름의 성인이 되기 위한 통과의례를 거친 곳기도 하다)

태섭은 형의 유품이 되어버린 빨간 아대를 끼고, 바람빠진 농구공에 다시 바람을 불어넣고, 바닷가를 맨발로 질주하고 드리블 연습을 한다. 사고로 다쳤다가 갓 회복한 그는 원작에서 강백호가 지루하게 여겼던 기초연습을 통해 농구코트로 돌아갈 준비를 마친다. (아마도 원작 이후 강백호가 할 일도 이것일 것이다) 전국제패를 하겠다는 채치수의 꿈을 비웃으며 적당적당히 놀다가 가던 선배들이 은퇴하고, 태섭은 형의 등번호였던 7번을 받아 코트에 선다. 산왕공고를 쓰러뜨리는 것이 태섭의 목표가 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예전에 이노우에 다케히코가 그린 시세이도 광고 애니메이션에서, 송태섭은 주장의 번호인 4번을 달고 나온다. 강백호가 부상에서 회복하고 돌아온, 본편 기준 미래의 모습이다. 송태섭이 주장이 되고 4번을 달기 전에, 그는 죽은 형의 등번호를 짊어지고, 죽은 형의 아대를 손목에 찬 채 그의 꿈을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그 자신으로 서서, 채치수의 뒤를 이어 주장이 되고, 그가 꾸었던 전국제패의 꿈을 꾸고 또 이루기 위해서. 그리고 마침내 산왕과의 일전을 앞둔 새벽, 아직 자신을 믿지 못하는 태섭의 곁에, 형은 바람소리와 함께 머무른다. (산왕전에서 송태섭이 활약할 때, 새벽의 그 바람소리가 다시 들린다)

송태섭 시퀀스에서 정말 심금을 울렸던 것은 어머니를 위로하려고 했지만 역시 울고 있었던 (기껏해야 초등 고학년이었을)형을 지나, 성장하여 산왕전을 앞둔 송태섭이 어머니를 끌어안는 장면. 송태섭은 죽은 형만을 생각하는 어머니를 위로하고, 농구를 통해 자신의 길을 걸어갈 만큼 성장했다. 뒤늦게 그의 어머니가 산왕전 응원석에서, 자신보다 한참 키가 큰 상대들 사이에서 고전하던 송태섭에서 “가라”하고 말하지만 그 목소리는 한나의 목소리에 묻힌다. 그는 이제 어머니의 위로가 필요 없는 성인 남자가 되었고, 미국으로 진출해 자기 길을 갈 것이다. 그 과정에서 어머니를 위로하고 화해할 수는 있지만, 굳이 어머니에게 기대고 위로받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살아남은 쪽이 저여서 죄송했습니다”라는 피 흘리는 속내를 내비치고 서로 할퀴고 끝나는 대신에, 그 자리에 내려둘 것을 내려두고 앞으로 나아가는 소년. 문득 “피어스”에서 어머니의 재혼에 상처입은 소녀와 형의 죽음에 상처입은 소년이 그 동굴에서 싸우고 물어뜯고 서로를 위로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때의 답이 그것이었다면, 이노우에 선생은 그 20년 남짓한 기간동안 송태섭을 성장시키고 또 다른 답을,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같은 답을 찾아주었던 거겠지.

마지막에 산왕의 정우성은 미국에서 농구를 하고 있다. 일본에서와 달리 신장이 열세가 된 그는 가드를 맡았고, 그리고 이곳에는 또 한 사람의 일본인 가드가 있다. 바로 노란 색 유니폼을 입은 송태섭이다. 현실에서 이노우에 다케히코는 슬램덩크 장학재단을 만들어 농구가 하고 싶지만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후원하고, 미국 애리조나 웨스턴 대학으로 농구 유학까지 보내주었다. (그 첫 번째 수혜자는 오키나와 출신 선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 마지막 장면에서, 태섭은 바로 그 대학의 유니폼을 입고 있다. 작가는 슬램덩크를 통해 농구 붐을 일으키고, 슬램덩크로 얻은 수익으로 현실의 송태섭들을 응원해 미국까지 보내주었고, 이제 이번 극장판을 위해 자신의 송태섭을, 미야기 료타를 미국으로 보내주었다. 오키나와라는 지역의 역사와 오키나와 출신이 일본에서 받는 차별에 대해 생각하면 더, 그 마지막 장면에 대해 계속 생각하게 된다.

한편 연출 면에서도 재미있는 부분들이 눈에 띈다. 우선 인물들의 화려한 움직임에 비해 배경을 무척 절약해서 쓰고 있다는 것. 그러나 정교한 인물에 비해 단순하고 반복되는 배경들을 알뜰하게 사용하면서도, 채도를 톤다운시켜 자연스럽게 보이게 하는 한편, 조명을 이용해서 지루한 감을 없앴다. 인물들의 경기 장면은 모션 캡처를 사용해서 정교하게 구현한 위에 만화적 리터칭을 입혔다. 또한 농구장 크기가 현실적인 것도 마음에 든다. TV판의 경기장은 때때로 선수들이 몇 분을 달려가며 이야기를 주고받아도 끝이 안 나고 가끔은 지평선도 보인다. 이게 슬램덩크인지 캡틴 쯔바사인지 헛갈릴 정도다. 하지만 극장판의 경기장은 현실적이다. 동시에 많은 생각과 대사가 오갈 때에는 확실히 슬로모션을 걸어준다. 송태섭이 얼마나 빠른지를 보여주기 위해, 순간 그가 몸을 숙이며 움직일 때 유니폼이 둥실 떠올라 잠시 멈추는 듯한 연출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고작 고교농구 전후반전인데도 어찌나 밀도가 높았는지 경기 하나를 보는 데 몇 개월의 연재가 필요했던 만화다. 적절한 슬로모션을 통해 동시다발적인 정보처리를 보여주는 연출이 인상적이었다.

교실에서 매주매주 소년챔프를 모여서 보던 시절부터 내 최애캐인 안경선배 권준호의 에피소드는 거의 나오지 않지만, 그들의 승리에 권준호가 필수불가결했음을 언급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서태웅도 과거사는 나오지 않지만, 어떤 장면에서도 속눈썹 하나 빠지는 법이 없이 아름답게 그려져서 “역시 이노우에 선생님은 송태섭에 이입하고 강백호처럼 되고 싶고 서태웅을 사랑하시는구나.”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누구 말마따나 서태웅 그릴 때만 다른 펜을 쓰시는 것 같을 정도지.) 정대만의 명대사들 “농구가 하고 싶어요”, “이럴 때일수록 나는 더 불타오르는 남자였다” “내 이름은 정대만, 포기를 모르는 남자지”같은 게 나오지 않은 것을 서운해하는 분들도 물론 계시지만, 이 대사들이 정대만 본인의 회상으로, 혹은 목소리로 나온다면 굉장히 뻘쭘해졌을 것이다. 저 “농구가 하고 싶어요”는 차라리 안선생님이나 권준호의 회상 속에서 나와야 옳다. 대신 “이 소리가 몇 번이나 나를 되살아나게 한다”는 아주 적절하게 나와서 좋았다. 송태섭, 정대만, 그리고 막판에 등을 다치고 잠시 기절한 강백호가 회상한 과거사가 공통적으로 농구가 나를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다(절망에서 벗어나고, 주먹을 쓰고 사람을 치는 대신 농구를 통해 더 나은 사람이 되게 해 주었다)는 것이었던 게 좋았다. 보다가 소리죽여 울었고, 주변에는 흐느끼며 보는 내 또래의 남자들도 군데군데 보였다. 아이들 재우고 가서 보느라 그야말로 심야시간에 보고 왔는데도.

PS) 시합 전 산왕공고의 정우성은 “미국에 가기 전에 제가 못해본 경험을 원한다”고 신사에서 소원을 빈다. 패배를 모르는 무적의 산왕공고+정우성이었으니 만큼, 언제나 이기는 팀에서 저런 소원을 비니까 북산에게 지는 거지. 원래 잘못된 시간에 잘못된 소원이 이뤄지는 법이다……

PS2) 어째서인지 정대만의 사랑은 안선생님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사실 원작에서 보다보면 좀 그런 면이 매우 많지요. 그렇다면 역시, 정대만은 마음은 안선생님을 사랑하고 몸은 권준호를(요시나가 후미 선생님 죄송합니다) 사랑하는 쪽이었나!!!! 그런 거였냐!!!!! (아님)

PS3) 자막판과 더빙판을 둘 다 보는 쪽을 권한다. 자막에서 보이는 디테일과 더빙에서 보이는 디테일이 조금 다르다. 경기 외 장면의 정보값은 자막이 더 좋고, 경기 장면은 초 단위를 촘촘히 나누어서 정보값이 정말 어마무시하게 쏟아지다보니 자막을 봐 가면서 보기보다는 더빙을 들으면서 볼 때 더 잘 보인다. 특히 송태섭은 무척 움직임이 빠르고, 그 속도감을 영상에서도 강조하다 보니 더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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