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저 새끼.
다리를 하나만 부러뜨릴 게 아니라 두 개 더 부러뜨렸어야 했는데.
어떻게 된 인간이면 여자가, 자기 말에 대꾸라는 것을 하자마자 “아, 쟤도 공략대상이지”하는 눈빛으로 들이댈 수가 있어. 혐오감과 역겨움 속에서 나는 확신했다. 저 새끼에게 당한 여자들 대부분은, 그를 사랑한 게 아니라 그가 ‘공작님이라서’ 저항하지 못했거나, 혹은 ‘유부녀여서’ 세상에 알려지는 게 두려워서 가만히 있었던 것이었겠지. 소설 속에 묘사된, 와카를 짓고 꽃보라 아래를 걷고 반딧불을 날리고 퉁소를 부는 히카루 겐지는 나름대로 그 시대의 우아함을 이상적으로 구현한 아이돌 같은 면이 있었다. 하지만 인기 절정의 아이돌을 동경하고, 자신과의 알콩달콩 연애 같은 것을 상상할 수는 있어도, 그 아이돌이 현실에서 온갖 여자들을 건드리고 다닌다는 것을 알아도 그런 상상을 하긴 어려운 법. 소위 천년의 애정이 식는다는 말이 그런 것이 아닌가.
“그거 아십니까, 서룬도라스 영애.”
하물며, 저 헬리오스는.
“제가 마음만 먹는다면, 영애같은 철없는 어린 아가씨 정도는 시집도 못 가게 만들어 버릴 수가 있어요.”
정말로 역겨웠다. 하는 짓거리 하나하나가.
“아, 그건 말하자면 반역을 꾀하고 계신다는 뜻인가요?”
“설마, 아가씨 하나를 건드린다고 반역이라니.”
“옛 기사들 중에는 주군의 아내를 향해 연심을 고백한 것도 아니고, 창가 아래에서 노래를 불렀다는 이유만으로도 불경한 자라 추방된 이들이 있었다죠. 하물며 황태자 전하와 짝지워질 사람을 범할 생각이나 하고 있다니, 충분히 반역 소리를 들을 만 하지 않나요?”
“아아, 우리 포이닉스. 그 아이는 아직 주군 같은 게 아니죠.”
“그러니까 당신은, 다른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 거네요? 우리 서룬도라스 가문과 마찬가지로, 계승권도 없는 공작이면서?”
“똑같이 계승권 없는 공작이라도, 나와 서룬도라스 공작은 다르지.”
헬리오스가 지팡이를 짚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나와 아델라이드 님 사이를 비집으며 않았다. 아델라이드 님이 당황하여 헬리오스, 하고 불렀지만, 헬리오스는 그쪽을 향해 상큼하게 웃었다.
“죄송해요, 아델라이드 님. 제가 지금 다리가 불편해서 균형을 잘 잡을 수가 없네요.”
…정말 뻔뻔하기도 하지.
그는 우리 사이에 비집고 앉아, 한 손은 아델라이드 님의 손을 꽉 눌러 붙잡고, 다른 손으로는 내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남들이 본다면, 마치 애정 행각이라도 벌이는 듯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아델라이드 님이 일어나려 하자, 그는 한쪽 다리로 아델라이드 님의 다리를 걸어 누르며 못 일어나게 했다.
“이게 무슨 무례한…”
“잠시만 기다려 주시죠, 아델라이드 님. 저는 이 황족 무서운 줄 모르는 어린 영애에게, 인생의 쓴 맛을 좀 가르쳐 줘야 하니까요.”
“당신은 황족이 아니야, 헬리오스 공작.”
“명목상은 그러하지요, 영애. 아버지가 이 나라의 황제인 사람과, 아버지가 어디 먼 방계 중에서 제법 똘똘한 사람을 골라 들인 데릴사위인 사람이 같다고 보나요?”
그가 나를 비웃듯이 내려다보며,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서룬도라스 공작가가 워낙 손이 귀해, 딸에게도 계승권을 부여하도록 허락을 받았다고요? 그게 무슨 뜻인지 압니까? 서룬도라스 공작가란, 그저 공작가의 영토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허상일 뿐이지. 애초에 여자를 통해 이어지는 계승권이라니, 편법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그의 손가락이 내 맨 어깨에 닿았다. 그가 드레스를 찢어발길 듯이 옆으로 밀어냈다. 나는 온 힘을 다해 그를 밀어내며 소리쳤다.
“여자를 통해 이어지는 계승권은 무시하면서도, 그걸 이용할 생각인 당신이 할 말은 아니죠.”
“오.”
그가 입가만 비죽 당기며, 비열하게 웃었다.
“어떻게 눈치를 챈 건진 모르겠지만.”
“아델라이드 님도 알고 계십니다. 당신이 그런 비열할 수작으로 아델라이드 님께 계속 접근해 오셨다는 것을.”
“정말 유감인데.”
내 옷을 벗기려던 손이, 내 목을 졸랐다. 겨우 헬리오스의 손에서 벗어난 아델라이드 님이, 구석에 놓인 도자기를 집어 헬리오스의 뒤통수를 쳤다. 그리고 요란한 소리가 울리자마자, 가벽이 열렸다. 사람들이 바라보는 가운데, 헬리오스는 내 목을 조르고 있었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포이닉스의 작전은 성공한 셈이었다.
“헬리오스, 네 이놈!”
복도 쪽 문이 열리고, 포이닉스가 뛰어들었다. 그는 헬리오스와 엎치락 뒤치락 하며 싸웠다. 헬리오스가 키가 좀 더 크고 나이도 더 많았지만 한쪽 다리를 제대로 못 쓰는 상태였고, 포이닉스는 순식간에 헬리오스를 제압해 쓰러뜨렸다.
“황태자 전하께서 공작 영애를 구하셨어!”
“헬리오스 공작이 바로 며칠 전에도 공작 영애를 노렸다고 하더니, 이번에도 제 뜻대로 되지 않자 죽이려 했던 건가?”
“아무리 그래도 동생과 혼인할 사람을…!”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오늘 무도회에 온 사람들은 어머니의 철저한 안배로, 서룬도라스 가에 유리한 증언을 할 수 있는 사람들, 포이닉스 황태자의 강력한 지지자들, 그리고 말이 많아 입소문을 확실하게 내 줄 만한 사람들로 골라 모았으니, 이 소문이 전 수도에 퍼지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그리고 포이닉스가, 정신을 잃어가던 내 몸을 부축했다. 그는 망토를 벗어 드러난 내 어깨를 가렸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게 눈을 찡긋해 보이며 엄지손가락을 쳐들었다.
아, 그래.
아주 조금 멋질 뻔 했는데 마지막에 그 찡긋 하는 게 재수없었어.
나는 생각해며, 정신을 잃었다.
깊은 어둠 속으로 빠지는 듯한 아득한 감각 속에서, 나는 마지막으로 바이올렛을 본 것 같았다.
어머니가 준비해 주신 새 드레스를 입은 바이올렛이 단도를 높이 들어올려, 쓰러진 헬리오스의 고간 사이로 푹 찌르는 모습을.
***
“깨어나서 다행이에요, 다이애나.”
내가 잠들어 있는 동안, 황태자 전하는 하루에 두 번씩 우리 집으로 찾아오셨다.
“하마터면 당신이 죽는 줄 알았어요.”
목이 졸리고 머리를 부딪친 탓이었을까. 솔직히 말하면, 사교계에 데뷔했을 때부터 바로 며칠 전 까지, 그 두세 달 정도의 기억이 희미하다. 조금 전 내 주치의는, 이제 막 정신이 들었을 뿐이고 곧 괜찮아질 거라고 말했다. 한동안 정신을 잃었던 사람이 의식을 되찾으면 한동안 많은 혼란을 느끼게 되는 법이라고, 좀 더 쉬고 마음을 차분히 하면 괜찮아질 거라고.
하지만 그것과는 조금 다르다. 기억이 안 나는 것도 아니고.
이건 마치… 다른 누군가가 내 안에 들어갔다 나간 듯한 기분일까.
일단 평소의 나라면, 헬리오스 공작같은 평판 나쁜 남자가 부인으로 맞이했다는, 턱없이 어린 여자아이라고 한다면 일단 기분 나쁘게 생각하고 피해 다녔을 테니까.
하지만 내 기억이 희미한 그 기간 동안 나는, 바이올렛의 일을 걱정하고, 레이디 블루벨의 일을 걱정하고, 또 아델라이드 님을 지켰다. 아마도 그 기간동안의 나는, 원래의 나보다 더 용감하고 사려깊은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누군가 깃들었다 나갔다고 해도 그다지 두렵진 않다. 아마도 그건 천사였을 테니까. 저 헬리오스의 손에서 바이올렛을 구하고, 아델라이드 님을 구하기 위해 나타난 천사 말이다.
“이제는 괜찮아요, 황태자 전하.”
나는 황태자 전하를 향해 달콤하게 미소지었다. 황태자 전하는 나를 보고 새삼 놀란 듯 뺨을 붉히다가, 내 곁에 가까이 다가와 앉았다.
“원래대로 돌아온 것 같아 기뻐요, 다이애나.”
“원래대로…?”
“응, 바이올렛 헬리오스의 일을 걱정하면서, 한동안 당신은 좀 다른 사람 같았거든요.”
“아…”
“아마도 이제 걱정거리가 해결되어 그런 것이겠죠.”
아, 다행이다.
황태자 전하는, 내 다른 모습에 너무 실망하지도 않았고, 또 지금과 다른 나에게 더 매혹된 것도 아니었다. 그가 좋아하는 것은 지금의 나다. 어차피 황후 폐하와 우리 부모님이 결정한 약혼이라고 해도, 기왕이면 약혼자와 좀 더 사이좋게 지내며, 행복한 결혼을 하고 싶었다. 나는 황태자 전하의 어깨에 머리를 살짝 기대며 한숨지었다.
“그동안의 일들이 좀 궁금했어요. 우리 집 사람들은 나를 걱정해서, 내가 궁금하다는 데도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았거든요.”
“아아, 그건 아무래도 황실의 이런저런 일이 얽혀 있으니까…”
“말해줄 수 있어요?”
“물론이에요.”
황태자 전하는 내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내가 목이 졸려 기절하고, 황태자 전하는 나를 위기에서 구해냈다. 사실 황태자 전하의 입장에서도 헬리오스 공작은 늘 신경쓰이는 존재, 언젠가 자신의 지위를 확고하게 만들기 위해 반드시 몰아내야 하는 존재였지만, 부황의 총애를 받고 있는 헬리오스를 실각시킬 명분이 없었던 상태였다.
하지만 그 가벽이 열리며, 헬리오스 공작이 서룬도라스 공작 영애를 살해하려 했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게 되었다. 약혼자의 위기를 보고 황태자 전하가 뛰어든 것은 당연하고 기사다운 일이었으며, 피해자는 이 나라 최고의 귀족가문인 서룬도라스 공작의 딸이었다. 이 상황에서 헬리오스 공작을 편들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게다가 헬리오스 공작에게 딸이나 아내가 농락당한 귀족들이 너도나도 헬리오스 공작의 실각을 요구했다. 그렇다고 그를 멀리 보내거나 외국으로 보낸다면 또 다른 여성들의 피해가 발생할 게 뻔했기 때문에, 헬리오스 공작은 결국 모든 실권을 잃고 저택 안에 감금되는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어요. 헬리오스는 정말 치명상을 입고 죽을 뻔 했으니까.”
“설마, 전하께서 헬리오스 공작을…”
나는 바이올렛이 단도를 들어올린 것은 꿈이었을까 생각하며 물었다. 황태자 전하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어린 공작부인요. 아니, 헬리오스 공작의 손에서 도망쳐 당신 어머니가 보호하고 계셨으니 더는 바이올렛 헬리오스가 아니라고 했지요.”
“에버윙이죠. 바이올렛 에버윙.”
“아아, 칼로 사정없이 내리 찍어 버렸어요. 한껏 피가 몰려 있었는데, 불쌍하게도 그 하얀 바지가 전부 피로 물들어 버렸지요. 아, 갓 정신이 든 당신에게는 너무 잔인한 이야기였을까요.”
“피가 몰…”
“그런 게 있어요, 아름다운 다이애나. 이게 다, 당신이 너무 아름다운 탓이죠. 아마도 헬리오스 공작은, 이제 평생 여자들을 괴롭히지 못하게 될 거예요.”
“그럼 바이올렛은요?”
“당신 어머니가 폐하 앞에 직접 나아가 변호하시고, 황후 폐하, 에르도스 공작부인, 그리고 레이디 블루벨 등등이 연달아 간청하셨어요. 어린 나이에 헬리오스 공작에게 납치되어 그런 일을 겪었다고. 위스테리아 후작가에서는 잃어버린 딸을 마침내 되찾았다고 폐하께 아뢰었고, 무엇보다도 아델라이드 님께서 말씀하셨지요. 바이올렛을 수녀원으로 데려가 보호하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요.”
나는 안도했다. 그 정도라면 폐하께서도 바이올렛을 심하게 처벌하시진 않을 것이다. 그때 황태자 전하께서 말씀하셨다.
“여자의 원한은 정말 무서워요.”
순간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황태자 전하를 밀어내며 고개를 들었다. 황태자 전하는 나를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그때, 내 안에 깃들었던 천사가 무슨 생각을 했더라.
– 이 변태, 사이코패스, 치사하기 그지없는데다 방식만 달랐지 여자를 자기 필요한대로 이용해 먹는 악당 같으니!!!
문득 생각했다. 그 천사가 바이올렛을, 그리고 아델라이드 님 뿐 아니라, 혹시 나를 구하러 온 것은 아니었을까 하고.
나는 눈을 몇 번 깜빡거렸다. 그러다가 병상에 누워 있느라 바싹 메마른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입을 떼었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