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의 백미는 역시 제갈공명이 지략을 쓰는 장면들이다. 코에이에서 나온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의 백미는 일기토다. 금욕적인 영국 신사든, 하이펑셔널 소시오패스든, 혹은 왓슨에 대한 사랑으로 몸부림치는 약쟁이든 상관없이, 셜록 홈즈의 백미는 그의 추리가 포텐셜이 터지는 순간이다. 명탐정 코난이라면 유명한 탐정이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는 순간부터일 것이다.
그리고 로맨스 판타지의 백미는, 역시 무도회다.
그것도 자신이 주인공이나 혹은 주빈이 되는 무도회. 이 시대의 영애들이라면 당연하게도, 명문가의 안주인이 되어 자신의 이름으로 이런 무도회를 주관하기를 바랄 것이고, 그를 위한 훈련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로맨스 판타지의 독자들은 체감하지 못하지만, 이 과정에서 돈도 어마무지하게 들고, 사람의 노동력도 말도 안 되게 들어간다. 그동안에는 노동 문제나 부의 불평등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이라도, 한번 무도회를 직접 주관해보고 나면 이 문제에 눈을 뜨는 게 맞지 않나 싶을 만큼.
물론 처음부터 이 시대에 태어난 사람이라면 이야기는 다르겠지만 말이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타임머신은 발명되지 않았고 사람이 죽는다고 로맨스 판타지의 세계에 빙의하지 않는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가 아닐까. 현대인이 과거로 돌아가 이런 무도회를 준비해 보고도 혁명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는다면 그것도 그 나름대로 문제일 것 같은데.
어쨌든 이 무도회는, 내 이름으로 주관하고, 어머니께서 도와주시는 형태로 준비되었다. 황태자와의 약혼을 앞두고, 서룬도라스 공작가문에서 준비한 브라이덜 파티 같은 느낌이었다. 주빈은 바로 아델라이드 전하였는데, 그 소식만으로도 수도의 모든 귀부인들과 영애들을 설레게 할 만 했다.
“아델라이드 전하께서요? 봉쇄 수녀원에 들어가셔서 어지간힌 일에는 편지 한 장 보낼 수 없는 상태라고 들었는데… 혹시 이번에 환속이라도 하시는 걸까요?”
“그럴리가요, 계승 서열 1위인 황태자 전하께서 혼인을 하시는데, 아이를 낳는다면 그 아이가 계승 서열 2위가 되시는 분께서 하필 지금 환속을 하실 리가 없지요.”
“아아, 그렇군요…”
“하지만 아델라이드 전하께서 몸소 참가하여 자리를 빛내주시는 약혼이라니, 서룬도라스 공작 영애의 지위는 결혼 전부터도 확고하겠어요.”
“어머니는 이 나라 제일의 공작부인, 언니는 황후 폐하, 여기에 아델라이드 전하께서도 지지해 주신다니, 그렇게 사랑과 축복을 받으며 결혼하는 신부도 있을까요. 공작 영애가 부럽네요.”
누구나 공작가의 무도회에 오고 싶어 했다. 어머니는 엄선해서 초대장을 보냈고, 그 중에는 헬리오스 공작도 있었다.
“헬리오스 공작에게 본때를 보여 줘야 겠다는 건 알겠다. 무도회 때 그 자가 하는 짓을 만천하에 공개해서 세상에 얼굴을 못 들고 다니게 하면 좋겠다는 것도 알겠고.”
“무도회 이야기는 어머니가 꺼내셨잖아요.”
“당연하지 않느냐. 결혼을 앞둔 내 딸을 헬리오스 공작에게 미끼로 쓸 수는 없는 일. 밀실인 줄 알고 들어갔는데 사실은 방이 아니라 상자였다, 그 정도는 되어야 헬리오스 공작을 궁지로 몰 수 있겠지.”
어머니의 계획은 간단했다. 발코니 쪽에 새로 방을 만들 듯이 가벽을 연결하는 공사를 하고(어머니는 그걸 간단한 공사라고 말씀하셨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나와 아델라이드 전하의 살롱을 그쪽으로 연결시켰다. 그리고 헬리오스 공작이 나타나면 그 방으로 유인한 뒤, 가벽을 열어 그 작자의 행각을 만천하에 드러낸다는 것이다.
“황태자 전하께서 아무리 철두철미하게 대비를 한다고 해도, 아직은 어려.”
“어머니…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이 그거였어요.”
“생각하는 게 유치해서는. 너를 궁지에 빠진 숙녀로 만든 뒤, 자기가 짠 하고 나타나서 구해 주는 역할을 하고 싶다 이거겠지. 뭐, 젊은 남자가 자기 약혼자 앞에서 한번쯤 멋있게 보이려고 그런 기사 노릇을 해 보고 싶은 마음도 알겠지만, 자기가 기사 놀이를 하고 싶다고 어디 내 딸을 그런 위험에 노출시키려 들어.”
그러게나 말입니다.
그리고 포이닉스는, 딱히 기사 놀이를 하고 싶어서 그러는 것도 아닐 테고요.
나는 어머니의 팔짱을 끼며 공연히 웃었다. 어머니는 무도회가 준비되는 것을 돌아보시다가, 고개를 갸웃거리셨다.
“그런데 헬리오스 공작은 다리가 부러졌다고 들었는데.”
“저도 그렇게 듣긴 했어요.”
“그런데 이 무도회에 올까. 아무리 아델라이드 님이 오신다고 해도.”
“그러게요. 하지만 다리까지 부러진 사람이 와서, 아델라이드 님을 유혹하려 든다고 치면.”
“정말 대책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이 나라의 모든 사람들이 알게 되겠구나.”
“안 오면 다행이고요.”
하지만 나는 확신하고 있었다. 이 세계에서 직접 헬리오스 공작과 단독으로 대면한 것은, 그 미친 놈이 마차에 매달렸을 때, 단 한 순간 뿐이었지만.
나는 겐지 이야기로 대학원 논문도 쓴 사람이다.
이 세계에서, 적어도 헬리오스 공작놈의 ‘내면’에 대해서는, 나보다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 겐지 이야기의 작가인 무라사키시키부가 살아 돌아오기라도 하지 않는 이상에야 말이다.
아니, 히카루 겐지를 아름답고 빛나는 황자, 당대 최고의 풍류인, 덴노 이상의 지위에 오른 천하인으로 묘사했던 무라사키시키부가 나타나더라도, 그것 하나만은 내게 격렬하게 동의해 줄 것이다. 그 작자는, 적어도 여자 문제에 있어서는, 자기 다리가 부러졌다고 해서 기회를 놓칠 인간이 아니라고.
***
무도회가 시작되었다.
내가 이 세계에 떨어지고, 세 번째의 무도회다. 첫 번째 무도회 때, 나는 바이올렛을 만났다. 헬리오스와 결혼한, 너무나도 어린 신부. 배려받지 못하고 구석에 우두커니 서 있던 그 어린 소녀는, 히카루 겐지가 자신의 형과 혼인할 예정이었던 오보로즈키요와 밀회를 하다가 거하게 들킨 뒤 스마로 유배를 가고 나서, 혼자서 이조원을 지켜야 했던 무라사키노우에의 쓸쓸함을 떠올리게 했다.
두 번째 무도회 때, 바이올렛은 나와 어머니와 함께 헬리오스에게서 도망쳤다. 처음에는 친아버지가 구원이 될 줄 알았지만, 결국은 자신을 남편에게 돌려보내려는 아버지를 피해 우리와 함께 공작 저택으로 왔다. 그리고 이제, 세 번째 무도회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바이올렛.”
그 세 번의 무도회는, 바이올렛 헬리오스가 바이올렛 위스테리아로, 다시 바이올렛 에버윙으로 돌아오는 과정이기도 했다. 강제로 결혼한 남편과, 자신을 돌보지 않은 아버지의 이름을 버리고 어머니의 이름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걱정스레 나를 바라보는 바이올렛을 꼭 안아주었다.
“우리 어머니 곁에 있는 한, 헬리오스는 절대로 당신에게 해코지 같은 것은 못 할 테니까.”
무도회에 나갈 엄두도 못 내던 바이올렛에게, 어머니는 당신께서 샤프롱이 되어, 바이올렛 에버윙으로서 사교계에 다시 나가자고 권해주셨다. 다른 누군가가 입었던 드레스가 아닌, 바이올렛만을 위한 새 드레스도 마련해 주셨다. 자신의 몸에 꼭 맞는, 제 나이에 딱 어울리는 호화로운 드레스를 받고 기뻐하는 바이올렛을 보니 마음이 이상했다. 그래도 잠시나마 사교계에 나왔고, 공작부인이라 불렸던 사람이었는데. 그런 사람이 처음으로 무도회에 나가게 된 어린 아가씨처럼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저 헬리오스 공작의 악행에 대해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곱씹게 되었다.
모든 준비는 완벽했다. 하지만 뭐, 만에 하나 일이 꼬인다 하더라도 상관없지 않을까. 황태자와 공작가 막내 영애의 혼인이란 누가 보기에도 이상적인 결혼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기껏해야 고등학생밖에 안 된 포이닉스 황태자와 진심으로 결혼이라는 것을 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내 껍데기는 이제 막 사교계에 데뷔한 열 여섯 살의 공작 영애라 해도, 내 알맹이는 그 두 배 가까이 살아온 사람이니까. 사람이 양심이 있다면 어떤 시대에도, 나이 먹을 만큼 먹은 어른이 그런 어린애와 장래를 계획하면 안 되는 거다. 헬리오스 같은 새끼가 아니라면 말아다. 사실은 헬리오스의 핑계를 대어서라도 수녀원에라도 들어가야 하는 게 아닐까, 이 결혼이 이루어져선 안 되는 게 아닐까 내심 생각하고 있기도 했다.
그리고 뭐, 설사 헬리오스가 나를 유혹하는 데 성공한다 하더라도, 애초에 나는 겐지 이야기로 논문도 쓴 사람이다. 이도저도 안 되면 뭐, 막말로 최애캐를 먹고 버렸다고 생각해야겠지. 이제와서 히카루 겐지가 최애캐가 될 수 있느냐는… 그건 어느 정도는 비위의 문제에 가깝다고 생각하지만 말이다.
“아델라이드 님.”
그리고 역시나, 이 세계의 히카루 겐지, 헬리오스 공작은 한쪽 다리에 붕대를 감고, 지팡이를 짚고는 무도회에 나타났다. 그는 아델라이드 님께 다가가 공손히 절하고는, 고개를 들고 아델라이드 님의 기척을 살폈다. 아델라이드 님이 미소짓자, 그는 반갑게 아델라이드 님을 끌어안으며 그 목덜미에 코를 묻었다.
“보고 싶었어요, 아델라이드 님.”
“…헬리오스 공작.”
“정말이에요. 제게 그동안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 아신다면, 아델라이드 님도 저를 딱하다, 안됐다고 말씀해 주실 거예요. 제 다리를 좀 보세요.”
그는 마치, 이 자리에서 나를 일러바치기라도 하려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아델라이드 님의 표정에도 곤란한 듯한 미소가, 그리고 희미한 경멸의 빛이 떠올랐다. 상황파악을 못하는 것은 여전히, 이 헬리오스 공작 뿐이었다.
“…좋아요. 잠시 이야기라도 들어 보죠.”
아델라이드 님이 미소를 지으며 손을 건넸다. 그러다가 아델라이드 님은 나를 돌아보았다.
“사교계에 나온지 너무 오랜만이라, 누군가 내가 실수하지 않도록 같이 있어주었으면 해요. 도와주겠어요?”
“물론입니다, 아델라이드 전하. 모시게 되어 영광이지요.”
나는 웃으며, 아델라이드 님의 다른 쪽 손을 잡았다. 등 뒤 저편에서, 집요한 시선이 느껴졌다.
어머니의 시선, 바이올렛의 시선, 그리고 포이닉스 황태자의 시선이었다.
됐어, 걱정 말라고. 아무리 헬리오스 공작이라고 해도 나에게는, 종이인형만도 못하다니까.
정말이라니까.
2D남이 별 것이겠어. 아무리 천 년 전 고전이라도, 텍스트로만 속속들이 알 만큼 만났던, 실체없는 캐릭터일 뿐인걸. 나에게는 그저, 차원이 다른 놈팽이일 뿐이야. 어떤 의미에서든.
***
잠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안쪽으로 들어가자마자, 헬리오스는 아델라이드 님에게 집요하게 구애하기 시작했다. 내가 무어라 끼어들면, 그 자는 자신의 부러진 다리를 가리키며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제 다리를 부러뜨린 숙녀분이 저를 이렇게 핍박하고 있군요. 아델라이드 님.”
명백히, 너는 지금 방해가 되니 제발 좀 꺼져 달라는 신호였다. 하지만 나는 그를 노려보며 아델라이드 님의 곁에 바싹 달라붙어 있었다.
“저는 폐하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지금은 신하로 강등되어 계승권조차 갖지 못한 사람일 뿐인데요. 저 아가씨는 자기가 곧 포이닉스와 혼인할 사람이라고 기세가 등등해서, 저 같은 사람은 안중에도 없는 모양입니다.”
“제가 공연히, 아무 잘못도 없는 분께 그러겠어요?”
“포이닉스의 신부가 될 사람이니까, 잠시 이야기를 나누려던 것 뿐이었는데.”
“공작께서 그동안 하고 다니신 일들을 생각해 보시죠. 황태자 전하를 동생으로 여기신다면, 그 동생과 혼인할 아가씨에게 접근하시는 게 과연 괜찮은 일일지.”
나는 딱히 도발을 하려고 한 것도 아니고, 그냥 당연히 그에게 할 만한 말들을 한 것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 말을, 도발로 받아들인 것 같았다.
조금 전까지 아델라이드 님께 구애하던 그가, 입술을 핥으며 내 쪽으로 가까이 다가앉는 것을 보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