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 리가요.”
포이닉스는 내게 친근한 척 가까이 다가앉으며 말했다.
“제가 헬리오스를 왜 감싸겠어요?”
“글쎄요, 아버지가 같은 형제이니까요?”
“서룬도라스 공작부인, 세상 사람들이 권력은 아버지와 아들 간에도 나누는 게 아니라는데, 하물며 어머니도 다른 형제는 그냥 걸림돌이에요. 아시잖아요?”
“세상에, 아직 한참 어리신 줄 알았는데. 벌써 다 자라셨습니다, 전하.”
“그럼요. 다 자라지 않았으면, 황후 폐하께서 소중한 여동생을 저와 혼인시키실 리 없지요.”
포이닉스는 방긋방긋 웃으며 나를 돌아보았다. 이거 참, 나는 표정 관리가 잘 되지 않아 무척 곤란했다. 글로 읽으면 나름 두근두근한 장면일지도 모르겠는데. 한국 나이로는 고등학생일 어린애가 눈 앞에서 그런 소리를 하니까 징그럽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저야말로, 헬리오스 공작을 몰아내야 할 이유가 한 손으로 다 꼽지 못할 만큼 있겠네요. 먼저 첫째, 저와 약혼할 예정인 서룬도라스 공작 영애가 그에게 모욕을 당할 뻔 했어요. 저와 혼인할 사람이 그런 곤욕을 치렀는데도 헬리오스 공작을 내버려둔다면 제가 웃음거리가 되겠지요.”
어머니나 다른 귀부인들은 약간 감탄한 듯 포이닉스를 바라보았다. 권력 이야기를 하면서도, 이 문제에서 내 일을 먼저 거론하는 것이 신사적이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아들이나 남동생 뻘 되는 귀여운 남자아이가 제법 똘똘하게 말을 하고 있으니 점수를 더 주고 싶은 마음도 이해는 갔다. 하지만 나는, 저분들처럼 포이닉스에게 무조건 점수를 퍼다 주고 싶은 상황은 아니었다. 곤경에 처했던 것은 나인데 자신이 웃음거리가 되는 것을 걱정하고 있으니, 10점 만점에 7점쯤 주면 될까. 아직 고등학생 나이면,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것도 어쩔 수 없겠지만.
“두 번째, 저의 이모가 되시는 엘리자베스 수녀님의 일입니다. 헬리오스는 저와, 저의 모후이신 전 황후 폐하를 모욕하기 위해 그분을 유혹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아델라이드 전하를 모시러 가기 전, 저는 황후 폐하께 들었습니다. 수녀님께서 헬리오스에게, 당신의 사촌 뻘이 되는 어린 아가씨의 후견인이 되도록 도우셨다고요.”
포이닉스는 구석에 앉아 있던 바이올렛을 바라보며 눈인사를 했다. 바이올렛은, 아름다운 황태자가 자신을 바라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저, 그건… 수녀원장님은…”
“저의 외가인 에르도스 공작 가문… 제 외조모님의 친정 되시는 위스테리아 후작 가문. 위스테리아 후작께서, 기사 신분인 에버윙 가문의 딸이 낳은 소녀를 그 수녀원에 맡기신 것은, 엘리자베스 수녀님께서 그 소녀를 보호하고 돌봐 줄 거라 믿으셨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수녀님은 그리 하지 못하셨지요. 헬리오스의 세 번째 죄는, 신을 섬기기로 맹세한 그분을 죄의 길로 들어서게 하신 것일 것입니다. 네 번째 죄는, 저 어린 소녀를 납치하고, 간교한 말로 속이고 길들여 친아버지에게 돌아가지 못하게 하고, 끝끝내 결혼한 일이고요. 다섯 번째는…”
…진실을 말하자면, 그나마 결혼이라도 했으니까 바이올렛이 친아버지를 만나고, 다시 우리집으로 도망칠 수 있었던 것이지만. 나는 굳이 포이닉스에게 그 점을 설명하진 않았다. 의욕 넘치는 청소년이 혈기방자하게 그의 죄를 낱낱이 요약 정리하고 있는데, 굳이 그 기세를 꺾을 만큼 분위기파악을 못 하는 쪽은 아니니까 말이다.
“다섯번째는 여기 와서야 알았습니다. 그가 돌아가신 모후 폐하를 모욕하기 위해, 마땅히 제가 물려받았어야 마땅한 그분의 유품들을 빼돌렸다는 것을. 황태자인 제가 마땅히 물려받아야 하는 어머니의 유품들을 훔쳐낸 죄에 대해서도 물을 것입니다. 그 다음, 수많은 여자들을 겁간한 죄와, 황실의 계승권을 갖고 계심에도 혼인하지 않고 수녀가 되신 아델라이드 누님을 노려, 계승권을 가진 자손을 낳으려 하는 야욕에 대해서도 마땅히 고발해야 합니다.”
“청산유수네.”
“진작 황태자 전하를 끌어들일 걸 그랬어.”
귀부인들이 수군거리는 가운데, 포이닉스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그를 고발한들, 황제 폐하께서 헬리오스 공작을 비호하시는 한 한계가 있지요. 만약 헬리오스 공작이 아델라이드 누님께 몹쓸 짓을 한다면, 황제 폐하께서는 그 추문을 무마하기 위해 아델라이드 누님을 헬리오스 공작부인으로 만드실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헬리오스 공작은 이미 결혼했는데도요?”
“다이애나 영애, 공작부인이 도망친 건 현명한 선택이었지만, 바로 그 이유로 폐하께서는 헬리오스 공작의 혼인을 무효로 만드실 수도 있어요. 그리고 그는 바로 내 자리를 위협하겠죠. 그러니, 제가 그 자를 죽여버려도 할 말이 없을 만한 상황을 유도해 놓고 현장을 잡은 뒤, 제 명의로 사적인 복수부터 한 다음, 그 다음에 국왕 폐하께 용서를 구하는 쪽이 빠를 겁니다.”
포이닉스가 나를 빤히, 아주 한참동안, 뚫어지도록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나는 그 빌어먹을 자식의 표정에서, 그 새끼가 의도하는 바를 120% 이해했다.
그러니까 현장에서 잡아서 사적인 복수를 할 수 있도록, 내가 같이 나서야 한다는 거잖아.
약혼자를 덮치려는 것을 보고, 순간적으로 분을 참지 못하고 죽였다거나 뭐 그런 변명이라도 하려면!
내가 반사적으로 입을 딱 벌리자, 포이닉스는 웃었다. 아주 상큼하게.
“영애께서는 제 뜻을 아시겠지요.”
…개새끼.
지가 나를 언제 봤다고, 잘난 척은 혼자 다 한 뒤, 주인공 노릇은 자기가 독차지하면서, 나를 미끼로 삼으려 들어. 이쯤 되니 사실은 헬리오스나 포이닉스나 그 밥에 그 나물이 아닌가, 누가 이 나라를 망치기로 작정하고 황실 유전자에 뭐라도 뿌렸나 싶어지기까지 한다. 이 변태, 사이코패스, 치사하기 그지없는데다 방식만 달랐지 여자를 자기 필요한대로 이용해 먹는 악당 같으니!!!
“…물론 도와드려야지요.”
하지만 그와 별개로, 이건 기회였다.
로코코 풍의 드레스를 입었을 뿐, 어디로 보나 “겐지 이야기”인 이 로맨스판타지의 세계관을 아주 뿌리부터 뒤엎을 찬스.
내가 살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다면 모를까, 꼼짝없이 여기서 살아야 하는 거라면, 남은 평생 저 색욕마인이 수많은 여자들을 궁지로 몰아넣는 꼴을 보느니, 여기서 치명타를 날리는 게 옳다. 사실 그 생각으로 이 사람들을 다 불러모은 것이기도 했다.
“정말인가요?”
“황태자 전하께서 구해주실 것 아니었나요?”
“잠깐, 다이애나. 젊은 사람들끼리는 뭔가 사전에 이야기가 된 거였니?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거냐.”
“별 일 아니에요, 어머니.”
무엇보다도.
나는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을, 그리고 포이닉스가 언급한 사람들을 떠올렸다.
황태자와 혼인하고 장차 중궁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받았지만 겐지에게 유혹을 받으며 모든 일이 뒤틀렸던, 그러나 히카루 겐지와 스자쿠 덴노 양쪽의 사랑을 받았다는 오보로즈키요.
평생 겐지의 집요한 연문을 받았고, 그의 정실이 될 뻔 한 적도 있었지만 결국 한 번도 겐지와 맺어지지 않은 채 고고하게 살아갔던 아사가오.
어린 시절 겐지에게 납치되고, 겐지의 취향대로 길러졌으며, 성장하자마자 겐지에게 강간당한 뒤, 겐지에게 가장 사랑받는 아내는 자신이라는 마음으로 평생을 살아갔다가 끝내 배신당했던 무라사키노우에.
그리고 의붓아들에게 강간당하고 아들을 낳게 된 후지츠보, 질투와 잘못된 사랑으로 그릇된 길을 가고 만 로쿠죠노 미야스도코로, 그 많고 많은, 겐지 이야기 속 여자들의 모습을 한 조각씩 품고 있는 우리들을.
“황태자 전하는 아델라이드 전하 뿐 아니라, 저도 그 자리에 동석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아니, 하지만…”
“이미 한 번 저를 노렸던 사람이지요. 어떤 식으로든 저나 아델라이드 전하, 혹은 두 사람 모두에게 접근하려 들 겁니다. 황태자 전하께서는 만약 그가 제게 부적절하게 접근한다면, 그 즉시 뛰어들어와 제 명예를 더럽히려 한 죄를 묻겠다는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나는 포이닉스를 돌아보며, 서늘하게 웃었다.
“그렇죠, 황태자 전하?”
“그렇습니다.”
“물론, 제가 명예를 잃기 전에 딱 맞춰 나타나 주셔야 하고요.”
“실패한다면 저야말로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 없는 일입니다. 당연히 지켜드리고 말고요.”
어휴, 말이야 잘 하지. 누가 누구를 지킨다는 건지.
나는, 포이닉스도 포이닉스지만 나야말로 달리 수를 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며 웃었다. 포이닉스는 내가 그런 무리한 제안을 선뜻 승낙하는 것이 의외였는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왜 그러세요, 전하.”
“아니… 나와 약혼하는 사람은 이런 분이었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똑똑하고 영리하고 담대하죠. 황후 폐하를 닮아서요.”
귀부인들은 나와 포이닉스가 잘 어울린다며 덕담 아닌 덕담들을 했다. 아니, 덕담이 맞을 것이다. 내 기준에서 포이닉스가, 영악한데다 어떤 면에서는 헬리오스 못지 않게 악랄한 점도 있는 어린애일 뿐인 것이지. 그런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에르도스 공작부인이 어머니를 놀리듯이 말했다.
“레이디 다이애나까지 결혼시키고 나면, 공작부인께서도 적적하시겠어요.”
“뭘요, 양자가 있으니 그 아이가 공작 가문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도록 훈련시키는 데만도 몇 년은 더 걸릴 텐데요.”
“아아, 클라우스 서룬도라스 영식 말씀이시죠.”
“사실 명문 귀족 가문의 자제들은 진지하게 대학에 다니진 않는 편이죠. 클라우스 영식은 대학에서도 진지하게 공부하는 것으로 유명하더군요. 마치 학자가 될 사람처럼 공부를 한다던가…”
에르도스 공작부인은 클라우스 오빠가 대귀족답지 않다는 뜻으로 비꼬아 말했지만, 어머니는 그게 뭐 별 일이나 되느냐는 식으로 대답했다.
“사실 저는 저희 가문의 데릴사위나 양자, 사위들에게 기대하는 바가 크답니다. 클라우스가 성실하게 자신을 증명해 나가고 있으니, 저로서는 안심이 되는 일이지요.”
“과연 서룬도라스 공작 가문 쯤 되면, 그런 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말씀이신지…”
“후계자가 똑똑하면 노년에 발 뻗고 잘 수 있는 법이지 않겠습니까. 다만 클라우스가 좋은 혼처를 만나야 할 텐데, 그것 하나가 고민이랍니다. 딸들을 전부 황실이나 왕공들에게 여의지 않았으면, 클라우스를 양자가 아니라 데릴사위로 들여도 되었을 일인데.”
에르도스 공작부인은 이번에도, 먼저 시비를 걸었지만 본전도 찾지 못한 채 입을 다물었다. 문득, 레이디 블루벨은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헬리오스와 약혼하고 4년이나 지났다고 하나 이제 겨우 스무 살이 조금 넘은 사람이고, 클라우스 오빠와는 나이도 비슷할 테다. 황태자비 후보로 여겨지며 자란 사람이니 학문이며 기품, 한 가문의 안주인 노릇 정도는 아무것도 아닐 테고, 무엇보다도 언니인 황후 폐하의 측근 시녀로, 우리 가문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으니까.
언제 어머니께, 말씀을 드려 볼까.
나는 곰곰 생각하다가, 포이닉스가 뭔가 말을 걸자 거의 조건반사적으로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교수님의 말씀에 영혼없이 반응하는 대학원생의 애티튜드가, 로맨스 판타지의 세계에서도 쓸모가 있을 줄은 몰랐는데.
하지만 슬픈 것은, 이 세계에서 제일 쓸모있는 것들은 전부 대학원에서 배운 것들이라는 점이었다. 겐지 이야기와, 영혼없는 맞장구 치기. 나는 문득, 역사적으로 귀부인들은 거의 노동을 하지 않고 한가하게 지냈다는 점을 생각하며, 왜 나는 로맨스 판타지의 세계에 떨어져서도 대학원생같이 살고 있는 걸까 생각했다.
딱히 누가 시켜서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매우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