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델라이드 님.”
어머니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녀의 베일은 쓰지 않았지만, 머리카락을 검은 그물망으로 꼼꼼히 감싸고, 어두운 빛깔의 드레스를 입은 아델라이드 님은, 황실의 공주님이라기보다는 금욕적이고 지적인 가정교사같은 분이었다. 그는 다가와 어머니를 끌어안고 인사를 나누고, 에르도스 공작부인과도 친근하게 인사를 나누었다.
다른 분들과 인사를 다 나누신 뒤에, 아델라이드 님은 마침내 나를 바라보셨다.
“이 아가씨군요. 황후 폐하의 동생이라는.”
“전하.”
“그대는 공작부인의 따님이자 곧 황태자와 혼인하여 나와 한 가족이 될 사람이지요. 그렇게 어렵게 대하지 않아도 된답니다.”
아델라이드 님은 부드럽게 웃어 주셨지만, 나는 마음이 심란했다.
분명히 조금 전, 저 문을 열고 들어오시면서 아델라이드 님은 말씀하셨다.
헬리오스 공작을 유혹하는 일이라면, 자신이 하겠다고.
어디로 봐도, 머리부터 밭끝까지 정숙해보이는, 현재 수녀원장을 역임하고 있는 황녀 전하의 입에서 나올 만한 말씀이 아니었다.
단 한 가지 경우를 빼고…
“전하, 외람되오나… 혹시 헬리오스 공작이 전하께도 구애를 하고 있습니까.”
“구애… 라기보다는.”
아델라이드 님은, 곤란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글쎄… 내가 사교계에서 남성과 교제를 하거나, 청혼이나 구애를 받거나, 약혼과 결혼을 하며 내 나이의 보통 여자들이 겪을 만한 일을 두루 겪은 사람은 아니다 보니,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뭔가 받으신 거군요.”
레이디 블루벨이 한숨을 쉬었다.
“그것도 아주 집요하게.”
“그렇다고 봐야 할 것 같군요, 레이디 블루벨.”
아델라이드 님은 정말, 미소라고 불리기에는 너무나 억지로 지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웃으려 했지만 웃음이 나오지 않는, 진저리가 나고 경멸마저 느껴진다는 듯한, 그런 표정. 문득 이전에는 생각하지 않았던 어떤 것이 머릿속에서 불쑥 떠올랐다.
히카루 겐지는 해처럼 빛나는 황자였다. 그는 풍류와 시문에 능하고, 수많은 여자를 사랑하고 유혹했다. 마치 자신의, 채워지지 못하는 갈망을 대신 채우려는 것처럼.
그 과정에서 수많은 여자들이, 때로는 겐지의 하룻밤 상대가 되었고, 때로는 자식을 낳고도 그늘에 숨겨져야 했으며, 때로는 부인이라며 존중받는 것 같았지만 끝내 정실은 될 수 없었다. 그럼에도, 겐지는 자신이 사랑한 그 모든 여자들을, 로쿠죠노 미야스도코로에게서 물려받은 아름다운 저택, 육조원에 모아들였다. 봄의 저택에는 무라사키노우에를, 여름의 저택에는 하나치루사토를, 가을 저택에는 미야스도코로의 딸인 아키코노무를, 겨울 저택에는 아카시노가타를 두고, 그 밖에도 인연이 닿았던 수많은 여자들을 그 저택으로 불러들였다. 자신의 저택에 불국토를 이상화한다면서, 결국 하렘을 만들어버리고 만 그 머릿속은 책을 읽고 읽고 또 읽어 논문을 쓰도록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지만.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그 여자들도 히카루 겐지를 사모했다고. 사모하고, 명성을 듣고 동경하고, 처음 시작은 억지로 안긴 관계라 해도 결국은 그의 능숙한 상냥함에 매료되었을 거라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히카루 겐지의 이미지라는 것은 대체로 그랬다.
하지만…
“경멸… 받아 마땅한 사람이에요. 그는.”
나는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자마자 깨달았다.
한때는 사랑이나 동경이나 매료가 그 관계에 끼어들어 있었을지 모르지만, 그런 것은 사랑이 아니었다고.
육조원의 원 주인이었던 로쿠죠노 미야스도코로는 겐지 때문에 명예를 잃었다. 그는 겐지의 부인인 아오이노우에에 대한 질투로 생령이 되어 아오이를 끝내 죽이고 말았다. 겐지의 형인 스자쿠가 덴노가 되자, 그는 재궁이 된 딸을 따라 이세 신궁에서 지낸다. 훗날 사실은 겐지의 아들인 레제가 덴노가 되자, 미야스도코로는 딸과 함께 돌아오지만 그의 목숨은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다. 그는 겐지에게, 자신의 저택인 육조원을 물려주고, 홀로 남을 미혼의 딸을 부탁했다. 딸의 후견인이 되어주고, 절대 딸에게는 손을 대지 말아달라고 당부하면서.
그래서 히카루 겐지는 약속을 지켰던가. 재궁으로 지내느라 스무 살이 다 된 미야스도코로의 딸, 아키코노무를 중궁으로 만들고 외척이 되고자 했다. 아키코노무의 의사나, 레제 덴노가 아키코노무보다 한참 연하의 어린 소년이라는 점은 고려하지도 않았다. 레제 덴노는 겐지가 후지츠보를 겁탈하여 낳은 자식이니, 말하자면 아키코노무는 자신의 며느리가 될 사람이었지만, 겐지는 손만 대지 않았을 뿐 아키코노무에게 연심을 고백하기까지 했다.
그래놓고는 미야스도코로의 고상한 취미로 가득찼던 육조원을, 자신이 사랑했던 여자들로 가득 채웠다. 미야스도코로가, 그 질투심으로 괴로워하다 생령이 되어, 마침내 아오이노우에를 죽였던 것도 알고 있었으면서.
긍지가 높았던 여성을 최후까지 고통받게 했던 질투와 아집, 슬픔이 담긴 집. 그 육조원을 사랑과 인내로 지켜내 겐지만을 위한 불국토로 만들었던 사람이 바로 무라사키노우에였다. 하지만 말년의 히카루 겐지가, 후지츠보를 닮았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으로 조카인 온나산노미야를 정실로 맞아들이며, 겐지의 총애를 받은 부인이었던 무라사키노우에는 그저 다른 여자들 중 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 육조원 봄 저택의 주인이 아니라, 어린 시절을 보냈던 이조원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무라사키노우에가 육조원을 비우자마자, 미야스도코로의 원귀가 나타나 겐지의 인생을 파멸로 이끌어간다. 온나산노미야는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하고, 무라사키노우에는 죽어간다. 미야스도코로의 원귀는 온나산노미야가 비구니가 되어 계를 받는 그 순간에도 나타나 웃음지었다.
아마도 그 웃음은, 진저리가 나고 경멸마저 담긴 그런 웃음이었을 거다.
아델라이드 님의 웃음과 같은.
“그러고 보니 이 아가씨가.”
아델라이드 님은, 구석에서 어깨를 움츠리고 있던 바이올렛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가까이 다가가, 바이올렛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사람의… 부인인 거군요.”
“아델라이드 전하.”
바이올렛이 잔뜩 긴장한 채 예를 표했다. 아델라이드 님은 바이올렛의 뺨을 쓰다듬다가, 그를 꼭 끌어안았다.
“서룬도라스 공작부인.”
“예, 아델라이드 님.”
“어린 시절 나를 돌봐 주었던 당신이, 이제 이 어린 소녀를 그 자의 마수에서 구해낸 것을 나는 정말로 기쁘게 생각하고 있답니다.”
“그것은…”
“짐작할 수 있어요. 물론 이 소녀가 죽을 만큼 용기를 내었겠지요. 그래도, 누군가가 간절히 살아남으려 할 때 손을 내밀어 줄 수 있는 사람은 언제나 귀하답니다. 그것도 상대가 저 헬리오스 공작이라면요.”
“사실 짐작하시겠지만.”
어머니는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말씀하셨다.
“저도 슬슬 나이가 들었고, 이제 예전처럼 불같은 성질을 부리며 불의한 사내들을 죽이네 살리네 하고 다니진 못한답니다.”
“저게 성질이 죽은 거라니.”
에르도스 공작부인이 기가 막히다는 듯 중얼거렸다.
“서룬도라스 공작부인은 젊어서는 자기가 제일 똑똑한 줄 알고, 나이 들어서는 자기가 성질을 안 부리는 줄 아는군요. 뻔뻔하기도 하지.”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는데 뭐가 그리 뻔뻔하답니까. 어쨌든, 저도 이제는 기력이 떨어져서 예전처럼 그러진 못한답니다. 제 여식, 다이애나가 얽히지만 않았어도 저도 그냥 잠자코 있었을지 모르지요.”
“그래도 말입니다. 서룬도라스 공작가에서 어린 공작부인을 구출했다는 전언을 받고, 저는 정말로 안심했습니다. 공작부인이라면 그 헬리오스가 행패를 부려도, 황제 폐하께 징징거리며 자기 뜻을 이루려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실 분이시니까요.”
아델라이드 님이 어머니께 손을 내밀었다.
조안이 다시 다과를 내어 왔다. 아델라이드 님은 그간의 일을 짧게만 이야기하겠다며, 말씀을 시작하셨다.
“그는 어머니가 수도원으로 들어가셨고,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고 몇 번이나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그를 안쓰럽게 생각하면서도 그가 이전에… 전 황후 폐하의 자매 되시던 수녀원장님과 벌인 일에 대해 계속 생각하고 있었어요. 에르도스 공작부인께는 아픈 기억을 들쑤시는 일이 될 지도 모르지만, 몇 번이나 생각했습니다. 헬리오스 공작은 그분께도 이런 식으로 집요하게 접근했겠구나 하고요…”
그는 차마, 자신의 사촌에 대해 우리가 했던 것처럼 모진 말을 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마도 그는, 황태자 전하의 약혼식에 제가 수도로 온다고 하면 반드시 편지를 보낼 겁니다. 고해를 하겠다거나, 마음이 외롭거나 괴롭다거나, 혹은 이제 혼인을 하고 어른이 되었으니 인사를 드리고 싶다거나, 무슨 핑계를 대어서라도요. 그리고 제가 만나겠다고 하면 두 번 묻지 않고 찾아올 겁니다.”
“…그 정도인가요. 헬리오스 공작님은.”
바이올렛이 겁먹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델라이드 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답니다. 확신할 수 있어요. 그 사람은… 자기가 손에 넣을 수 없는 사람,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는 사람에게만 흥미가 있으니까. 내게 매달리는 것도, 내가 계승권을 가진 황족이자 수녀로,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더 집착하는 것 뿐이랍니다.”
“그리고 정확히 그 이유로, 제게는 아무 관심도 보이지 않았죠.”
레이디 블루벨이 쓴웃음을 지었다.
“뭐, 결국 파혼까지 당한 제 입장에서는 차라리 다행입니다만.”
그런 대화가 오가는 가운데, 나는 포이닉스 황태자를 흘끔흘끔 훔쳐보았다. 그는, 자신보다 경험치가 많은 여자들이 헬리오스에 대해 이야기하고, 때로는 분개하는 것에 대해, 아무 말도 보태지 않았다. 공연히 쓸데없이 아는 척을 하며 나서지 않고, 그는 다만 옆에서 중요한 대목들을 간략히 기록할 뿐이었다.
영리하고 신중하고 조신한 남자라니, 로맨스 판타지에서 종종 주인공을 끝까지 사모하다가 남주에게 넘겨주고 애달파하는 서브 남주의 속성이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적어도 그가 뭔가 해보겠다고 아무 말도 안 하고 사고를 칠 부류는 아닌 것 같아 안심이 되기도 했다. 그렇게 한참동안 여자들의 이야기가 오간 뒤, 포이닉스 황태자는 정리하듯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헬리오스가 아델라이드 누님께 편지를 보내면, 아델라이드 누님은 못 이기는 척 잠시 이야기를 나누겠다고 편지를 보내실 것이고, 그 뒤에 헬리오스가 아델라이드 누님을 노리면 그때 현장을 잡아 징치하시겠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렇습니다, 황태자 전하.”
어머니가 웃으며 물었다.
“헬리오스 공작도 황제 폐하의 자손이니, 설마 이복형제가 그런 모욕을 당하게 내버려 둘 수는 없다고 생각하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