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디 블루벨을 초대하기 전, 나는 미리 블루벨과 황후 폐하께 귀띔해 놓았다.
아직 신혼인 헬리오스 공작부인이 실종되었다는 것을.
그 사건이 일어나기 사흘 전, 서룬도라스 공작영애를 추행하려다 다리가 부러진 채 칩거중인 헬리오스 공작은, 헬리오스 공작부인의 실종 사건을 난처하기 여기며 그 사실을 숨기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실종된 헬리오스 공작부인이, 사실은 서룬도라스 공작가에 와 있다는 것을.
“하지만 정말 제게는 너무 가혹한 일을 하시는군요.”
레이디 블루벨은 쓴웃음을 지었다.
“저의 쓰디쓴 약혼기간과. 처절한 파혼에 대한 이야기를 다 들어 놓고서 얼마나 지났다고, 하필 그 헬리오스 공작과 결혼한 여자와 만나보라니.”
“정말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레이디 블루벨.”
“황후 폐하의 말씀과 서룬도라스 공작부인 명의의 초청이 아니었다면, 이런 자리에는 결코 오지 않았을 겁니다.”
“제가 아직 레이디 블루벨은 물론, 제국 사교계 전반에서 그만한 신뢰를 쌓지 못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당연하지요!”
레이디 블루벨은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다가 자신이 화를 내고 있는 게 아니라고 변명하듯, 소리내어 웃었다.
“레이디 다이애나, 당신처럼 올해 처음 사교계에 나온 아가씨가 그만한 신뢰의 상징이 되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해요. 사실은 이만한 일을 생각해내고, 사람들을 모으고, 그러기 위해 공작부인과 황후 폐하의 힘을 빌리는 것만으로도, 당신은 대단한 수완가라는 거죠.”
“그런 건가요…”
“보통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사교계에 여러 해 몸 담고 있거나… 아니면 저처럼, 황실의 시녀로 일하며 두루두루 인맥을 쌓고, 사람과 사람을 적재적소에 연결할 수 있거나. 그런 다음에나 뭔가 일이라는 것을 꾸며 볼 만 한 것이죠. 그나저나 정말로 할 건가요? 헬리오스 공작을 날개 꺾인 새로 만든다는 것은?”
“물론입니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짐작만은 했지만, 제 마차에 그 사람이 매달리는 것을 보고서야 확실히 깨달았어요. 이 썩을 놈팽이를 그냥 뒀다간, 피해자가 끝간 데 없이 늘어날 거라고.”
“…썩을 놈팽이라니.”
“너무 험한 말을 써서 죄송해요. 하지만 그것보다 더, 헬리오스 공작에게 어울리는 말을 찾질 못하겠어요.”
레이디 블루벨은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배를 잡고, 눈물을 찔끔찔끔 흘리면서 웃었다. 나중에는 내 어깨를 붙잡고 비틀거리면서도 그 웃음을 멈추지 못할 정도였다. 우리 집안의 시녀들이, 레이디 블루벨을 보고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조금 심하게 웃고 있긴 하지만, 미친 사람처럼 웃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까지 겁에 질린 표정을 할 필요는 없는데. 생각하는데, 계단 위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파혼 이후로, 처음으로 웃음을 터뜨리는 거군요.”
“아… 실례했습니다.”
레이디 블루벨은 손끝으로 눈물을 닦아내며, 내 어깨에서 손을 떼었다. 그는 곧 드레스의 구김을 펴며 바른 자세로 2층을 올려다보았다.
“서룬도라스 공작부인.”
“조금 걱정스러울 정도로 웃고 있긴했지만, 그래도 그대가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니 정말 기쁘군요. 황후 폐하께서도 계속 걱정하고 계셨는데.”
“황후 폐하와 공작부인께 심려를 끼쳐 죄송합니다.”
레이디 블루벨이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어머니가 혀를 차며 한 걸음 옆으로 비켜났다. 어머니의 뒤쪽에 조용히 서 있던 작은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바이올렛이었다.
“심려를 끼쳐도 설마 그대가 끼쳤겠습니까, 여기 모인 사람 모두에게 심려를 안겨놓은 작자가 따로 있는데.”
“그건… 그렇습니다.”
“차라도 마십시다. 여기, 미스 바이올렛과도 인사 나누시고.”
어머니가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레이디 블루벨과 함께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의, 서룬도라스 공작가 가주의 살롱에는 이미 차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어머니와 나, 바이올렛과 레이디 블루벨, 이 자리에 모일 사람은 넷인데, 찻잔은 여섯 개가 나와 있었다. 나는 혹시 내가 모르는 다른 손님이 있나 싶어 주위를 둘러 보았다. 하지만 조안은 여섯 개의 찻잔 중의 네 개만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우리를 소파로 안내했다.
“직접 만나는 건 처음이죠? 이쪽은 미스 바이올렛 에버윙. 외조부 대 까지 대대로 기사를 지낸 에버윙 가문을 외가로 두고 있어요. 지금은 다소 한미하지만 역사가 오래 된 가문이랍니다.”
“이쪽이…”
레이디 블루벨은 실제로 바이올렛을 만나보고, 입을 벌린 채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화장기가 없는 앳된 얼굴에 소박한 드레스, 아직 가슴도 제대로 부풀지 않았지만, 어린 나이부터 사정없이 코르셋을 졸라매어 발육이 늦어지는 바람에 원래의 나이보다 더 앳되어 보이는 몸까지, 바이올렛은 어디로 보아도 그냥 어린아이였다. 무척 아름답지만, 아직은 여자라기보다는 어린 소녀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그런 여자아이. 어머니께서 어느정도 의도하고 그렇게 꾸며 놓으신 것이겠지만, 화장을 지우고 어른의 화려한 드레스 대신 제 나이에 맞는 옷을 입은 바이올렛은 ‘공작부인’과도, 남자를 유혹해 손에 넣은 요부와도 거리가 멀었다.
“그러니까 이 어린 아이가… 아니, 이런 어린 아이를… 그 미친 새끼는…”
조금 전 내가 거친 말을 했다고 눈물까지 흘리며 웃던 레이디 블루벨은, 바이올렛의 얼굴을 보자마자 그의 평생에 입에 담아본 적 없을 만한 단어들을 어색하게 중얼거리며 손으로 가슴 한가운데를 짚었다.
한국에서 같았으면 가슴을 팡팡 치며 “아이고 내 팔자야”를 외칠 만한, 그야말로 홧병이 급성으로 올 만한 상황이었지만, 이쪽 세계에는 홧병이라는 말도, 답답하다고 가슴을 팡팡 치는 문화도 없는 것 같았다. 대신 조안은 작은 냄새약 통을 가져왔다. 레이디 블루벨은 암모니아 계열의 냄새가 나는 통을 코에 대고 잠시 숨을 들이마시더니, 겨우 정신을 차리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저는 헬리오스 공작이 여성에 대한 신의도 책임감도 없고, 때로는 자기 욕망을 채우기 위해 범죄도 불사하는 인간이라는 것은 정말 환멸이 날 정도로 잘 알고 있었습니다만… 설마 이런 짓까지 할 줄은 몰랐습니다. 이런 어린아이를…”
“레이디 블루벨, 미스 바이올렛은 지금 열네 살입니다. 하지만 헬리오스 공작이 그를 유괴한 건 4년 전의 일이었지요.”
“4년 전… 유괴라고요.”
원해서 약혼했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약혼기간이 내내 기만과 음행, 불성실로 가득했던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약혼기간 내내, 어린 여자아이를 납치 감금하고 자기 취향의 여자로 길러내려 했다니. 그간의 사정을 들은 레이디 블루벨은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괴로워했다.
“진작 알았으면 파혼 같은 건 이쪽에서 먼저… 아니, 황후 폐하께 간청하여 그 자를 이 나라에서 아주 몰아낼 방법을 찾아봤을 텐데…”
그때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어머니는 바이올렛에게 가까이 다가 앉으라 손짓하며 말했다.
“괴로운 일입니다만 우리가 어떻게 알아볼 수도 없는 일이었지요. 그나저나 다른 두 분이 도착하신 모양이군요.”
그리고 문이 열렸다.
내가 몰랐던 방문자들은 바로 위스테리아 후작부인과 에일윈 후작부인이었다. 위스테리아 후작부인은 우리가 바이올렛을 데리고 올 수 있도록 협력했던 분이고, 에일윈 후작부인은 어머니 말씀에 의하면, 소문을 우리 편으로 이용할 때 효과적으로 도움이 될 만한 분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뒤를 따라, 어머니도 몰랐던 손님이 한 사람 더 나타났다.
“돌아가신 황후 폐하의 드레스가 여기 있다는 말씀을 듣고 왔습니다.”
바로 전 황후의 어머니, 에르도스 공작부인이었다.
***
그 뒤의 이야기는, 그야말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사교계의 대표적인 스피커라 할 만한 에일윈 후작부인과, 전 황후의 어머니로서 사교계의 또 다른 중심이라 할 만한 에르도스 공작부인까지 가세하여, 이 자리에 모인 여성들은 전부 입을 모아 헬리오스 공작의 그동안의 행각들에 대해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조금 지나자, 그의 파렴치한 행각들이 온 사교계를 한동안 시끌시끌하게 만들어야 한다거나, 헬리오스 공작이 다시는 여자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그에게 항구적인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그 항구적인 조치라는 것은, 물론 고상한 귀부인들이 세부적인 사항까지 이야기한 것은 아니었지만, 간단히 말해 저 근면한 성범죄자의 욕망의 근원이나 다름없는, 그의 성기를 두 토막을 내 버리자는 이야기였다. 그게 없으면 더는 여자들에게 휘두를 것도 없겠지, 라고 에르도스 공작부인은 치를 떨며 중얼거렸다. 그도 그럴 만 했다. 에르도스 공작부인의 맏딸인 수녀원장은 헬리오스 공작 때문에 명예를 잃었다. 오늘 에르도스 공작부인에게 듣고 있으려니, 전 황후 폐하의 사망 원인 중에도 그 헬리오스 공작이 있지 않나 의심스러워졌다.
“정말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그렇지요, 이제 막 헬리오스 공작위를 받았을 나이부터 계속 그랬답니다. 황제 폐하께서 혹시라도 일찍 돌아가시면, 헬리오스 공작저에 와서 사셨으면 좋겠다고.”
“어머나, 세상에.”
“처음에는 황후 폐하께서도, 어머니와 이별하고 황궁에서도 내보내져, 혼자 공작 저택에서 살아야 하는 그 소년을 안쓰럽게 여기셨답니다. 하지만 이게 정도가 있지요. 걸핏하면 황후 전에 숨어들고, 가끔은 친어머니가 보고싶다면서, 어마마마께서 재워주시면 잠을 잘 잘 수 있을 것 같다며, 아직 어린 아이였으니 별 일은 없었다지만 수시로 침대에도 숨어들었으니까요. 그리고 이렇게…”
에르도스 공작부인은 바이올렛이 입고 있었던 드레스를 집어들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이렇게, 황후 폐하의 드레스들을 전부 훔쳐내어서는… 황후 폐하의 사촌이 되는 여자아이를 납치하여 입혔다는 것이… 저는 너무나 불순하고 끔찍하게 여겨져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자, 여기까지는 이야기가 잘 되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헬리오스 공작에게 그런 조치를 취할 수 있죠?”
그 질문이 나오자, 좌중은 조용해졌다.
영웅적인 계획이야 누구나 세울 수 있지만, 그걸 실천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게다가 차라리 헬리오스 공작의 목을 따오는 거라면 모를까, 성기를 따 오려면 우선 그 전에 다른 불명예를 잔뜩 지고 시작해야 하는 법이다. 이건 그야말로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다.
“…헬리오스 공작부인이 나선다면, 방법이 좀 있지 않을까요.”
“지금 이 어린애에게, 다시 그 악귀같은 놈의 침대로 돌아가라는 말씀이십니까? 물론 아내가 남편의 침대에 눕는 일이야 이상할 게 없겠지만, 그래도 사람이 해서 될 일이 있고 안될 일이 있지요.”
“그 일이라면 제가 하겠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근심스러워 하던 와중에, 두 사람의 불청객이 추가로 모습을 드러냈다.
나의 약혼 예정자이자, 황후 폐하께서 보내셔서 왔다는 포이닉스 황태자와, 그의 호위를 받으며 비밀리에 이곳에 도착한 마리아 아델라이드 님이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