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올렛이 마침내 그간의 이야기를 다 털어놓았을 때, 위스테리아 후작은 고통스러운 얼굴로 딸의 손을 부여잡고 있었다. 후작 부인 역시, 죄책감과 고통이 뒤범벅된 표정으로 의붓딸을 바라보았다.
“만약… 만약에 내가…”
“후작부인.”
바이올렛이 후작부인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 그는 고개를 저었다.
“모든 사정을 알고 계셨을 원장 수녀님께서도, 공작님이 저를 데려가는 것을 막지 못하셨어요. 그리고 공작님은 저를 저택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하게 했지요. 그런 상황에서 무슨 수로 저를 찾으실 수 있었겠어요. 원장 수녀님께서 연통이라도 넣지 않는 한, 저를 찾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셨어요.”
“하지만 좀 더 일찍 마음을 먹었다면, 일찍 너를 데려왔다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테지.”
후작부인은 한숨을 쉬었다. 후작은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어머니가 그를 노려보았다. 아무 말 하지 말고,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게 내버려두라는 듯이.
어쨌든 나는, 이 상황을 짐작하고 있었다. 이 이야기가 “겐지 이야기” 속 세계의 로맨스판타지 버전이라면, 당연히 바이올렛도 무라사키노우에의 사연을 따라갈 테니까.
하지만.
하지만 이건 너무 끔찍하다.
상황을 관조하는 사람이 쓰는 잔혹하다, 는 말로는 다 표현하지 못하는, 그 상황을 실제로 겪은 사람과, 그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듣는 사람이 느끼는 말. 끔찍하고 소름이 끼치고, 죽여버리고 싶을 만큼 분노가 치민다는 말들이 가슴 속에서 울렁거렸다.
내가 읽었던 “겐지 이야기”에서는, 열네 살이 된 무라사키가 겐지에게 강제로 당했고, 한동안 겐지를 두려워했지만, 그래도 사흘 째 날의 혼례 축하 떡을 함께 나누어 먹고 그의 부인이 되었다고 묘사되었다. 그것만으로도, 사실은 무라사키노우에의 절망과 체념이 느껴졌다. 그 빛나고 영광스러운 히카루 겐지와 혼인한 것에 대한 기쁨이나 기대, 설렘이 아니라. 오빠처럼 여기고 믿었던 사람이 자신에게 그런 폭력을 휘두른 것에 대한 실망과 두려움이 더 컸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문학작품 속의 이야기였다. 두 사람의 초야는 주인공인 겐지가, 후지츠보를 닮았다는 이유로 데려와 자신의 이상적인 여성으로 키운 무라사키를 부인으로 삼고, 이후 가장 총애하였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한 과정일 뿐이었다.
현실에서의 괴로움은 적나라하고 비참하다. 바이올렛은, 이대로 헬리오스 공작의 저택에 갇힌 채, 그의 옷깃에 달린 일개 코르사주 한 개처럼 살아갈 수는 없다는 마음으로, 그에게 결혼을 요구했다.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을 요구한 게 아니라는 것을, 나는 알았다. 그리고 나는, 아직 혼인도 하지 않은 일개 영애가 나서기 적당한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 앞에서 입을 열었다.
“저는 헬리오스 공작의 행각에 대해, 고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사람들 앞에서요.”
“그게 무슨 소리요, 다이애나 영애.”
위스테리아 후작은 얼굴이 파랗게 질린 채 나를 노려보았다. 공작 영애이고 머지 않아 황태자비가 될 것이라고는 하나, 그야말로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애가 겁도 없이 헛소리를 한다고 생각하는 게 틀림없었다.
“헬리오스 공작은 내 딸의 남편인데, 지금 그 헬리오스 공작을 고발하자니! 공작영애는 곱게만 자라서,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는 것과 같은 일이라는 말도 못 들어보았나!”
“후작 각하, 지금 저는 헬리오스 공작이 후작 각하의 따님께 저지른 일에 대해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어린 시절에 유괴당하고, 4년동안 납치 감금되어 살다가, 마침내 그런 일까지 당한, 아직 사교계에 나올 나이도 안 된, 열 네 살 밖에 안 된 어린 소녀가 겪은 일에 대해서요.”
“그 일은 분명 헬리오스 공작의 잘못이지. 내 딸을 찾지 못해 안절부절 못하던 날들을 생각하면 지금 당장 결투를 신청해도 시원치 않을 거요. 하지만 어쩌란 말인가! 내 딸이 이미 그 놈과 결혼하여 공작부인이 되어 버렸는데.”
“결혼, 이라고요.”
“그렇지 않아도, 몇 년 만에 다시 만난 딸이 그런 결혼을 했다는 게 참담하고, 제대로 사교계에 데뷔하고, 폐하께서 승인하시는 가운데 혼례를 치른 게 아니라, 이 위스테리아 후작의 딸이 도둑 결혼을 하고 사후에 승인을 받았다는 것도 남부끄러워 죽겠는데! 여기에 더해 내 딸을 과부로 만들기라도 하란 말인가!”
아아, 정말.
꼭 ‘그것’같잖아.
딸이 강간을 당한 피해자가 되었는데, 마치 흠집 난 상품이라도 되는 것 같이 구는 것.
여학생이 강간을 당했는데, 판사라는 작자가 가해자와 피해자를 결혼시킨 것이 마치 현명한 판결이자 미담이라도 되는 것처럼 굴던, 구시대적인 생각 그 자체.
아무리 로맨스판타지의 배경 모델이 18~19세기라고 해도, 이런 말을 면전에서 듣고 있자니 정신적으로 대미지가 세게 오는 기분이다.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각하께서는 공작부인을, 저 헬리오스 공작의 손에서 구해 낼 생각은 없으시고요?”
“그게 무슨 소리요, 이제와서 이혼이라도 시키라고? 헬리오스 공작 손에서 자라 그와 결혼한 내 딸이 이혼을 하면, 이제와서 누가 결혼이라도 해 줄 것 같나? 저 어린 아이를 그대로 수녀원으로 보내라는 말밖에 더 돼?”
“하다못해 결혼을 하고, 헬리오스 공작이 공작부인에게 충실하기라도 하면 모르겠어요. 아니, 공작부인을 그대로 내버려 두기라도 해도 다행이죠. 하지만 저는, 포이닉스 황태자 전하께 들었답니다.”
“황태자 전하께서… 무슨 말씀을.”
“헬리오스 공작의 무도회에 저와 어머니가 참석했을 때, 황태자 전하께서는 만약을 대비하여, 저와 어머니께는 미리 알리지 않고 전하의 측근들을 무도회에 보내셨다고 해요.”
나는 포이닉스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아주 조금 각색해서, 딸을 걱정하는 척 하면서도 이왕 딸이 결혼을 했고, 그 결혼 상대자는 공작이니 딸의 문제에 대해서는 어디까지나 사위가 된 헬리오스 공작의 말을 따를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이 기개라고는 약에 쓸 것도 없는 위스테리아 후작에게 들려주었다.
“헬리오스 공작의 측근들이, 공작부인을 노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게 무슨.”
“헬리오스 공작은 이 결혼을 무효로 만들기 위해, 공작부인을 다른 남자들에게 떠넘기려 했다는 뜻이죠.”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시나요? 정말로? 그 헬리오스 공작인데?”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어머니를 돌아보았다. 어머니가 한숨을 쉬었다.
“그 이야기 자체는 나도 오늘 처음 듣는 것이지만, 사실 많은 귀부인들은 헬리오스 공작부인이, 출신도 알 수 없는 어린 여자가 운좋게 헬리오스 공작과 결혼한 거라고 수군거리고 있었습니다. 두 분도 알고 계시겠지요.”
“예, 그건…”
“하지만 그럼에도, 헬리오스 공작가의 무도회에서, 그 자리에 모인 귀부인들은 모두 헬리오스 공작부인을 우리들의 무리에 끼워주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지요. 왜 그랬다고 생각하십니까.”
위스테리아 후작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아직 어린 내 말이라면 그는 당연히 무시할 것이다. 하지만 서룬도라스 공작부인의 말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는 차마,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바이올렛을 들여다보았다.
“어떻게…”
“여자들이 늘 착하고 올바른 선택을 하진 않지요. 내 마음에 안 들고, 나한테 해코지를 하거나, 내 자식에게 몹쓸 짓을 하는 놈들에 대해서는 인정사정없이 물어뜯어버리기도 하고요. 하지만 딱히 나한테 해 끼친 것도 없는데, 어린 여자아이가 흉악한 사내들의 먹잇감이 되는 꼴을 내버려 둔다면 두고두고 입맛이 쓸 거랍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이 상황에 못을 박듯이 힘주어 말했다.
“사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나는 그 헬리오스 공작에게 딱히 악감정은 갖고 있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 불한당이, 황태자 전하를 알현하고 돌아가느라 달리 샤프롱을 동반하지 않았던 내 딸의 마차에 들러붙었죠. 황태자 전하와 약혼할 이 훌륭한 처녀의 명예를 더럽히기 위해. 나는 그 사실만으로도, 서룬도라스 공작가의 명예를 걸고 지고하신 황제 폐하께 공작의 악행을 고발할 생각입니다.”
“하, 하지만…”
위스테리아 후작의 입술이 달싹였다. 입 모양으로 보아, ‘지금 내 딸의 신세를 더 망치자는 거냐’는 말이 여기까지 올라오는 모양이었다. 그러자 어머니가,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지금 그쪽의 ‘사위’가 내 딸의 신세를 망칠 뻔 했는데, 무슨 할말이 더 있어서.”
“아니, 아닙니다. 하지만… 그 일은 분명 공작부인이 사죄를 드렸고…”
“헬리오스 공작이 사죄를 한 것도 아닌데, 그게 지금 무슨 소용입니까?”
“부인, 부인께는 일말의 자비심도 없으신 겁니까? 따님을 걱정하시는 마음은 알겠습니다만, 이 어린 아이가 제 남편의 잘못을 사죄하는데…”
“그게 이상하다는 겁니다! 왜 어린 시절에 유괴당하고, 4년동안 납치 감금되어 살다가 강간까지 당한 사람이, 헬리오스 공작 놈의 잘못까지 대신 사죄하고 다녀야 하느냔 말입니다. 후작 각하께서는, 이 일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시진 않습니까?”
“…”
“위스테리아 후작 각하께서도 마음을 정하시지요. 그 불한당이, 후작 각하의 사위입니까, 아니면 따님을 납치한 원수입니까?”
어머니는 정말로, 권력과 연륜을 이용해 효과적으로 위스테리아 후작을 몰아세웠다. 그는 거의 덫에 빠진 짐승처럼 덜덜 떨며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그때 바이올렛이 입을 열었다.
“공작부인, 이 일은 위스테리아 후작가와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헬리오스 공작부인.”
“바이올렛, 이라고 불러 주세요.”
고작 열네 살인, 어린 공작부인이 고개를 들었다. 그는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들어, 어머니를 똑바로 바라보았다가, 깊이 머리를 숙였다.
“저는 평판을 망쳐도 상관없어요. 수녀원에 들어가도 상관없어요. 솔직히 말해서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사는 것이 더 행복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저는 더 이상, 오빠에게… 공작님에게 휘돌리면서, 그 사람의 장난감처럼 되어서, 그 사람이 생각하는 다른 사람의 대신이 되어서,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요. 저는 싸우고 싶어요. 하지만 혼자서는 싸울 방법이 없었어요.”
“바이올렛… 뭐라고 불러야 하지.”
“저는 바이올렛 에버윙입니다. 기사 가문의 손녀인…”
어린 소녀는, 울먹이면서도 나름 중심을 잡고, 죽을 만큼의 용기를 내어 강단있게 말했다.
“저는 계속… 아버지를 기다렸어요. 아버지를 만나고 싶었어요. 아버지를 만난다면, 오빠의 손에서 저를 구해 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아버지가 저를 헬리오스 공작에게 떠넘기려 한다면, 저는 더 이상 그 아버지를 기다리지 않을 거예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