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여덟 살에, 할머니의 병이 위중해지면서 수도원으로 옮겨갔어요.”

엄마는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자신을 데려가지 않았다.

고작 여덟 살 난 어린 아이에게 의지할 곳은, 병든 할머니 뿐이었다.

공작부인 바이올렛 헬리오스, 후작영애 바이올렛 위스테리아, 기사의 딸 바이올렛 에버윙의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곳의 수녀원장님은 돌아가신 전 황후 폐하의 언니 되시는 분이라고 들었어요.”

잠깐, 누구라고?

돌아가신 전 황후란, 포이닉스 황태자의 어머니이고. 그 언니인 수녀원장은 헬리오스와의 잘못된 사랑에 빠져 명예를 잃었다는 그 분이다.

“원장님은 저와 할머니에게 무척 잘 해 주셨는데, 때때로 헬리오스 공작님이 신앙을 상담하기 위해 수녀원에 오셨습니다. 공작님은 무척 젊고 잘생기고, 하늘에서 내려온 태양신의 아들처럼 보이는 분이었어요. 그런 공작님이 제게 잘 해 주셔서, 저는 내심 으쓱거리고 있었답니다.”

정말, 갈수록 태산이었다.

이놈의 헬리오스는, 그러니까 수녀원장과 밀회를 하면서, 여덟 살, 그러니까 초등학교 1학년밖에 안 된 그 어린 아이에게 눈독을 들였다는 이야기였다.

“헬리오스 공작님은 할머니께서 편찮으시다는 것을 알고, 수녀원에 오실 때 마다 약이나 선물을 가져다 주셨어요. 할머니는 공작님을 신뢰하고, 공작님이 황제 폐하의 아드님이라는 것을 아시고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셨어요.”

아아…

세상에 믿을 놈이 없지, 헬리오스 따위를 믿다니.

그러나 바이올렛의 할머니는 병이 든 상태라 상대에 대해 판단하기 어려운 상태였고, 그때만 해도 헬리오스는 겨우 사교계에 데뷔한, 그래서 그 악명을 온 제국에 떨치기 전이었으며, 무엇보다도 명망높은 수녀원장님이 헬리오스와 가까이 지내고 있었으니, 할머니가 판단을 잘못 하는 바람에 이 모든 일이 생겼다고 말할 수는 없다. 어디까지 잘못은, 전적으로, 어린 고아와 병든 노인을 속인 헬리오스 공작에게 있는 것이다.

“그리고 부탁하셨죠. 제가 위스테리아 후작님의 딸이니, 할머니가 돌아가시면 반드시 그 아버지에게 연락을 해 달라고… 그리고 제가 열 살이 되던 해에, 할머니는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할머니는 제게, 헬리오스 공작님께서 아버지를 찾아 주실 거라고 말씀하셨지만…”
“그리고 안 한 거군요…”
“공작님은, 연락하셨다고 했어요. 하지만 위스테리아 후작부인은 물론 후작님조차도, 저를 딸로 인정하지 않았다고…”
“말도 안 된다!”

위스테리아 후작이 언성을 높였다. 그는 바이올렛의 손을 덥석 잡으며 소리쳤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느냐, 내가 너를 얼마나 찾았는데!”
“…그 헬리오스 공작이잖아요. 그럴 수도 있죠.”
“부인!!!! 부인이야말로, 헬리오스 공작에게 연락을 받고도 내게 아무 말 안 한 게 아니오!”
“지금 내 탓을 하는 거예요? 초경도 치르지 않은 어린아이에게 눈독을 들여서, 제 아버지에게 데려다주지도 않고 얼른 제 저택으로 데려가버린 작자를 두고!”
“그러니까 당신이 진작에 저 아이를 데려왔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 아니요!”
“적반하장도 분수가 있지!”

위스테리아 후작부인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소리쳤다.

아아, 여기에 양념 버무리던 포기김치만 있으면 딱 아침드라마인데. 그리고 후작부인의 말마따나, 잘못한 놈은 따로 있는데 끝까지 후작부인 탓을 하다니. 대체 얼마나 뻔뻔한 거야.

여튼 위스테리아 후작부인이 후작에게 어퍼컷이라도 날릴 것 같은 이 일촉즉발의 상황을 정리한 것은, 나의 어머니인 서룬도라스 공작부인이었다.

“설마 두 분, 고작해야 이혼 소송의 증인으로 세우기 위해 나와 만나자고 하신 것은 아니시겠지요.”
“죄송합니다, 공작부인. 하지만 지금 이 여자가 제게 주먹을 들이대는 걸 보셨잖습니까.”
“때리지는 않았지요.”
“허…”
“내게 필요한 게 정확히 뭡니까. 중재? 이혼 소송? 그런 거라면 당신 누님인 에르도스 공작부인께 청해도 되는 일이지요. 나보다 나이도 많고 명망도 높은 분이시지 않습니까.”
“그건…”
“하지만 그럴 수 없겠지요. 후작 각하의 소중한 따님은, 에르도스 공작부인의 입장에서는 원수나 다름없는 헬리오스 공작과 혼인했고. 무엇보다도 그 따님을 잃어버린 일에, 공작부인의 맏 따님인 수녀원장님이 무관하지 않으니까 말입니다.”

위스테리아 후작이 머리를 숙였다.

“…그렇습니다.”

어머니는 부채를 접으며, 마치 딸들이나 시녀들을 꾸짖을 때처럼 엄격하게 말했다.

“소중한 따님의 이야기부터 들어보십시다. 부부싸움은 손님들 돌아간 다음에 하시고요.”

***

그 뒤는 익히 나도 짐작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헬리오스는 열 살 밖에 안 된 바이올렛을 공작저로 데려가, 안주인의 방에서 살게 했다.

아직 공작부인이 없으니까, 너는 내 여동생같은 아이니까, 하는 말로 달래었다.

“오빠는… 예, 공작님은 오빠라고 부르라고 했습니다. 여덟 살 밖에 차이가 안 나니까, 오빠와 여동생처럼 지내면 된다고요. , 비록 아버지가 인지를 해 주시진 않았지만 너도 후작가문의 딸이니 그에 부끄럽지 않게 대우해 주겠다고도 했지요. 그 말대로… 오빠는 제게 정말 잘 해 주셨습니다.”

최고의 가정교사를 붙여 주고, 훌륭한 시녀들을 붙여 주었다. 그가 좋아하는 악기를 능숙하게 연주하고, 그가 좋아하는 책을 읽고, 동등하게 대화를 나눌 만큼의 지성을 쌓아 주었다. 가장 훌륭한 향과 가장 훌륭한 와인을 고르고, 가장 아름다운 보석과 귀한 세공품들을 주저없이 골라낼 수 있는 안목도 길러주었다.

그리고 아직 어린 소녀인 바이올렛에게, 어른의 드레스를 입혔다.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그러나 누군가가 분명히 입었던 흔적이 있는 드레스를.

“저는, 두려웠어요.”

물론 이 시대에는, 옷은 귀한 것이었고 때때로 대를 물려 입기도 했다. 웨딩드레스처럼, 평생 한두 번 밖에 입을 일이 없는 곳이라면 더욱 그랬다.

하지만 유복하기 그지없는, 그것도 화려함의 절정을 보여준다는 헬리오스 공작가에서, 굳이 어린 소녀에게 어른의 드레스를 입혀야 할 이유는 없었다.

“때때로 이 드레스는 누구의 것이었을까 가끔 생각했지요.”

하지만 그때마다, 헬리오스는 바이올렛을 달랬다. 그가 권하는 일을 바이올렛이 주저할 때에는 할머니를 언급했다.

네 할머니는 내게, 아버지를 찾아주라고 부탁하셨다. 네 아버지가 지금은 거부하지만, 네가 이렇게 아름다운 아가씨로 자라고 있는 것을 안다면 반드시 너를 만나러 오실 거다. 그때까지 내 집에서, 사교계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을 완벽한 숙녀로 자라나면 되는 거다, 하고.

그리고 그때가 되면, 너를 나의 신부로 맞겠다는 말도.

“물론 저도, 나이는 어리지만 하녀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었어요. 오빠에게는… 황제 폐하께서 정하신 약혼자가 따로 있다는 것도요.”

몇 번인가 바이올렛은, 헬리오스에게 물었다.

언젠가는 그 약혼자와 결혼하셔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하지만 헬리오스는 그때마다 말했다. 여동생이나 어린아이를 대하는 듯한 말투가 아니라, 그야말로 귀부인을 대하는 듯한 정중한 말투로. 나는 당신과, 이번에야말로, 맺어지고 말겠다고.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몰랐어요.”

바이올렛은 울음이 섞인 목소리로, 나직하게 말했다.

“아니, 알고 있었는지도 몰라요. 밤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는 오빠. 오빠의 옷에 남아 있는 지분의 흔적들과, 오빠의 방에서 발견한 수많은, 서로 다른 디자인의 양말 대님(가터)까지. 오빠는 나를 사랑한다고 말했지만, 언제나 수많은 여자들을 만나고 다닌다는 것도. 그래도, 오빠는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내가 어른이 될 때 까지 기다리는 중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이번에야말로 당신과 맺어지고 말겠다는 말은, 바이올렛을 향한 말이 아니다.

처음에 그 말을 들었을 때는 그 의미를 몰랐던 바이올렛은, 이제 그 의미를 어렴풋이 깨닫기 시작했다. 앳되고 어린 소녀에게는 너무나 어른스럽고 조숙해 보이던, 그러나 집요할 정도로 목을 가리고, 소매 끝까지 수많은 단추를 채워야 하는, 강박적이도록 정숙한 드레스에 대해서도, 그 주인은 대체 누구였는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분이 사랑하는 것은 제가 아니었지요.”

고통스럽게, 열네 살 밖에 안 된 소녀가 중얼거렸다.

“그 분이 누구를 사모하셨는지는 모르지만, 그게 제가 아니라는 건 알아요. 아마도 제게 계속 입힌 그 드레스의 주인이셨겠죠.”

그리고 그 일이 마침내 닥쳐왔다.

바이올렛이 열네 살이 되던 생일날, 헬리오스는 바이올렛에게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화려한, 새하얀 비단에 수많은 진주가 달린 드레스를 입혔다.

그것은 사교계에 처음 이름을 알리는 영애들이 입는 데뷔턴트 드레스였고, 혼례에 입는 웨딩 드레스이기도 했다. 어린아이 키 높이만큼 길게 뻗어오른 하얀 깃털은 화려했지만, 세월이 묻은 듯이 살짝 바래 있었다. 그 드레스 위에, 대관식에나 쓸 법한 화려한 트레인을 더하고, 붉은 새시(장식끈)을 걸었다. 왕관만 없었지, 마치 왕비나 황태자비가 혼인할 때 입는 예장처럼 보였다.

“저는… 두려웠어요.”

인형놀이를 하듯 그 옷을 입히고, 헬리오스는 시녀들을 물렸다. 마침내 침실에 둘만 남자, 그는 웃으며 말했다.

내가 이런 사람인 줄 몰랐느냐고.

폭력적이고 짐승같은 밤이 지나고, 헬리오스는 해가 뜨기 전에 바이올렛의 침실을 떠났다. 그리고 다시 해가 지자, 그는 바이올렛의 침대로 돌아왔다.

“오빠가… 공작님이 다시 돌아오는 것이 두려웠어요.”

사방에서 지옥처럼 피냄새가 났다. 바이올렛은 자신이 죽어가는 사냥감이 된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가 나를 떠나버릴까봐, 그것도 두려웠어요. 공작님이 만나고 다닌 다른 여자들처럼, 그렇게 내팽개쳐 버릴까봐. 그래요. 저도 그날 밤에야 마침내 알게 되었지요. 공작님은 저에게서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을 보고 있다는 걸. 나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는 걸. 나를 사랑한다면… 그런 식으로는 하지 않았겠지요. 제 친아버지를 찾아주고, 후작가의 일원인 제게 제대로 구혼해서 아내로 맞이했겠지요. 그런 식으로, 그렇게 무자비하게 구는 것이 아니라.”

그리고 다음 해가 뜨기 전, 바이올렛은 헬리오스를 붙잡았다.

“저는, 할머니가 말씀하신 제 아버지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어요.”

헬리오스는 귀찮아 했지만, 결국 바이올렛의 앞에 마주 앉았다.

“이대로 공작님의 어린 정부로 살 수는 없다고 했어요. 제대로 혼인을 해 주든가, 아니면 할머니와 약속한대로 아버지, 위스테리아 후작에게 돌려보내 달라고 말했어요. 당신은 황제 폐하의 아드님이고 공작 각하니까, 후작님을 모시고 내가 그분의 딸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지 않느냐고, 눈을 똑바로 뜨고 말했어요.”

바이올렛은 죽기살기로 용기를 끌어모아, 마침내 할 말을 했다.

“공작님은 내 얼굴을 한참 들여다봤어요. 마치, 자신의 기억 속 누군가와 닮았는지 가늠해보는 듯한 태도였지요. 그리고 결국, 그는 그러겠다고 말했어요.”

그가 레이디 블루벨에게 파혼을 선언했다는 이야기는, 며칠 뒤에야 들었어요. 바이올렛은 울음조차 나오지 않는 듯한 메마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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