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사흘 뒤, 위스테리아 후작가의 무도회가 있었다.
본래 위스테리아 후작가에서는 헬리오스 공작부인이 된 바이올렛을 위해 이 무도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위스테리아 후작은, 후작가의 방계로 알려진 공작부인, 바이올렛에 대한 중대한 발표를 하기로 되어 있었다.
아마도 그것은, 공작부인이 사실은 위스테리아 후작의 딸이라는 이야기를 에둘러 말하려는 것이겠지. 위스테리아 후작가의 입장에서도, 사생아라지만 사실은 황제의 가장 사랑받는 아들로 알려진 헬리오스 공작과의 인맥을 더 과시할 필요는 있을 것이다. 즉 이 무도회의 주인공은 바이올렛이 아니라, 헬리오스 공작이었다.
“그 이야기 들었어요?”
하지만 미안하게도, 오늘의 주인공은 무도회에 참석하지 못했다.
“헬리오스 공작이, 다리가 부러졌다고 해요.”
대신 어린 공작부인만이, 잔뜩 굳은 얼굴로 위스테리아 후작 부처와 함께 있었다. 바이올렛에게는 안 된 일이지만, 뭐, 자업자득이라 할 수 있겠다.
“어머나, 세상에. 그 잘생긴 얼굴은 안 다쳤다나요?”
“신께서 도우셔서 얼굴은 무사하답니다. 하지만 이만저만한 망신이 아니었다고 해요.”
“망신이라면… 설마?”
“그렇죠, 그 버릇이 어디 가겠어요… 길을 가다가 또 어느 아가씨에게 추파를 던지고, 마차에 기대어 유혹의 말을 속삭였는데…”
“사실 어지간한 의지력으로 헬리오스 공작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기는 힘들죠. 그런데요?”
“그 아가씨가 공작을 준엄하게 꾸짖고 마차에서 밀어낸 뒤 마부에게 그냥 말을 몰라서 해서, 그만 창문에 매달린 채 질질 끌려가다가 도랑에 빠졌다니 뭐예요?”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사람들은 오늘의 주최자인 위스테리아 후작이나, 오늘의 주빈인 공작부인이 아닌, 헬리오스 공작의 재난에 대해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그 하늘이 내린 미남이자 이 나라 최고의 귀공자가 도랑에 빠져 다리가 부러졌다니, 어지간히 흥미진진한 이야기였던 모양이다.
“그 아가씨도 대단하네요. 어지간한 사람은 상대가 공작이다 보니, 후환이 두려워서라도 그렇게 단호하게 굴지는 못했을 텐데…”
“그게, 그럴 만 하더랍니다.”
“누군데요?”
“서룬도라스 공작가의 막내 영애요. 다이애나 서룬도라스 영애.”
그리고 그 바람에, 나는 본의아니게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과연 서룬도라스 공작부인께서 따님들을 엄하게 가르치셨다더니…”
“하지만 그렇게 성격이 드센 아가씨가, 과연 좋은 부인이 될 수 있을까요?”
“사람이 단호해야 할 때는 단호해야지요. 거기서 단호하게 굴지 않으면, 눈 깜짝할 사이에 헬리오스 공작이 밀고 들어와 그대로 마차에서 속옷 끈까지 다 풀어버렸을 텐데.”
“하긴, 그렇죠. 그 사람은 입으로는 사랑을 속삭이면서 손으로는 순식간에 상대방을 무장해제 시키는 것으로 유명하니까요. 아기고양이같은 어린 영애 정도야, 눈 깜짝할 사이에 홀랑 잡아먹고도 남았을 사람이죠.”
하지만 정말 사교계란 흉악한 곳이지. 이 사람들은 내가 헬리오스의 꾐에 넘어가지 않았다고 칭송하면서도, 헬리오스의 꾐에 넘어가 인생을 망치지 않은 것을 내심 아까워하는 눈치였다.
대체. 인간들이란.
“과연, 황태자비 전하가 되실 만한 분이다, 그렇게 생각해야죠. 내 딸이 그런 상황이었으면 서룬도라스 영애처럼 훌륭하게 대처할 수 있었을까, 그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어린 아가씨가 그렇게 깔끔하게 대처하다니, 황태자 전하께서 잡혀 사시는 게 아닌가 몰라요.”
내가 잘못한 일은 없었지만, 그래도 커튼 너머에서 이런 이야기가 들려오는 것이 신경은 쓰였다. 나는 어머니의 눈치를 살폈다. 서룬도라스 공작부인은 그런 이야기 따위는 들어 줄 가치도 없다는 듯, 태연한 표정으로 차를 마셨다.
“…괜찮으세요, 어머니.”
“괜찮다마다.”
어머니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더니 안쓰러운 표정으로 건너편을 바라보며 다정하게 말을 걸었다.
“부군이 중상을 입어서, 걱정이 많이 되시지요.”
그랬다. 지금 이 테이블에는… 헬리오스 공작부인 바이올렛이 와 있었다. 아마도 그의 친아버지일 위스테리아 후작과, 미묘한 표정의 후작부인과 함께.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인. 저야말로 제 남편이… 공작 영애께 큰 무례를 저질러서…”
아무리 당차다고 해도, 이제 열네 살.
어린 공작부인은 당장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안쓰러울 정도로, 이 난감한 상황을 견디는 듯한 모습이었다. 후작부인은 냉담했고, 위스테리아 후작은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후작부인이 겨우 마음을 돌려 남편이 밖에서 낳은 딸을 받아들이기로 했더니, 그 딸이라는 아이가 혼인하자마자 대단하고 잘나신 사위가 이런 사고를 저지르고 망신을 저질러 단단히 마음이 틀어진 듯 했다.
역시, “겐지 이야기”의 무라사키노우에처럼, 위스테리아 후작이 바이올렛의 생부였구나.
나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는데, 바이올렛이 나를 향해 머리를 숙이며 울음을 터뜨렸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다이애나 영애는 제게 그렇게 잘 해 주셨는데…”
“공작부인…”
“지난 번 무도회에서, 정말 저 혼자서 어쩔 줄 몰라 했고… 또 다른 부인들께서 불러 주셨어도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을 때 다이애나 영애가 저를 도와 주셨는데… 헬리오스 공작님이 이런 짓을 저질러서 정말 죄송해요. 정말 어떻게 죄송하다고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나는 쩔쩔 매다가, 다가가 바이올렛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후작부인은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고, 어머니는 나와 바이올렛은 내버려둔 채, 위스테리아 후작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후작 부처께서는 어떤 일을 의논하고자 하시는지.”
“아, 그것이…”
위스테리아 후작은 진땀을 흘리며 바이올렛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러자 후작부인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바이올렛은 저희 가문의 방계가 아닙니다. 실은 제 남편의 딸이지요.”
“그런가요.”
“제 남편이 젊어서 기사의 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입니다.”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위스테리아 후작이 ‘그러니까 진작에 우리 딸로 받아들였으면 이런 일도 없지 않았겠느냐’고 구시렁거리자, 후작부인은 부채로 후작의 손등을 쿡 찌르며 자기 할 말을 했다.
“과거, 제 남편은 제게 저 아이를 제 자식으로 입적할 것을 요구했답니다. 사실 저 아이가 제 아이들보다 어리기라도 했으면, 저도 고려해 봤을 지도 몰라요. 하지만 제가 자식을 늦게 보는 바람에, 저 아이가 제 아이들보다 나이가 많지 않겠어요?”
“부인! 아들이라면 모를까, 어차피 딸인데 그게 뭐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이것 보세요, 엄연히 제게도 딸들이 있는데, 이이는 저 바이올렛만을 싸고 도는 것을. 지금 명망높으신 서룬도라스 공작부인께 저간의 사정을 말씀드리고 앞으로의 중재를 부탁드리려는데도, 아직도 제정신을 못 차리고 있잖아요?”
그건 그렇다.
지금 상황이 상황인데, 위스테리아 후작은 좋게 말해 눈치라는 게 없었고 솔직하게 말해 뻔뻔한 새끼였다.
아이를 못 낳아 괴로워했을 시절의 부인을 두고 바람이나 피우다 기사의 딸과의 사이에서 소생을 본 것을 미안해하지도 않았단 말이지. 바이올렛의 처지를 생각하면 어떻게든 아버지 슬하에서 자라는 게 더 나았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후작부인의 입장을 생각하면 이게 또 애매해진다. 그런데다 다 자란, 헬리오스 공작과 혼인한 딸을 뒤늦게 가문에 입적했는데, 그 헬리오스 공작이 이런 추문이나 일으키고 있는 상황에서.
“위스테리아 후작 각하, 그건 각하께서 크게 실수하신 것 같습니다.”
“아니, 공작부인. 부인께서는 그저 같은 부인들끼리의 사정만 생각하시고, 이 가엾은 아이는 생각하지 않으시는데…”
“외도해서 낳은 자식이라 해도 가문에 들여 딸로 키우려 하는 것은 훌륭한 일입니다. 하지만 들으셨잖습니까. 후작 가의 자제분들보다 나이가 많다고요. 아들이면 집안을 물려받지만 딸은 어차피 시집갈 것이니 상관없다고 생각하셨겠지요. 그러나 한 귀족 가문에서 맏딸은, 그 이름으로 불립니다. 레이디 바이올렛, 하고요. 차녀 이후는, 그 가문의 이름으로 불리지요. 우리 다이애나도, 제 언니들이 전부 시집가기 전까지는 레이디 서룬도라스일 뿐이었습니다.”
“…”
“딸들을 둔 어머니의 입장에서도, 맏딸의 혼인은 개혼이라고 해서 특별히 중요하게 생각하고 준비하지요. 큰언니가 시집을 잘 가야, 그 동생들도 그만한 격을 맞추어 결혼한다는 이야기도 있답니다. 우리 집안만 해도, 황후 폐하를 시작으로 다들 훌륭한 상대를 맞추었지요. 바꾸어 말해서, 어지간해서는 맏이보다 동생이 더 나은 자리로 시집가는 일은 쉽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
“그런데 맏이가, 호적에는 입적했을지언정 서녀다… 후작 각하께서는, 다른 따님들의 앞날은 전혀 생각하시지 않으셨군요. 부인께서 불쾌하게 여기신 것도, 따님인 헬리오스 공작부인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가 아니라, 다른 자녀분들의 앞날을 생각했기 때문이랍니다.”
“그건…”
“그래도 부인을 원망하시겠습니까?”
위스테리아 후작은 머뭇거리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가 정말 궁금하기라도 했는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면, 이럴 때는 제가 어떻게 했어야 합니까?”
“보통 그럴 때는, 아버님이나 숙부님이 생존해 계시면 그 밑으로 입적을 하지요. 늦둥이 막내딸로요. 지금은 이미 그러기에는 늦었겠지만요.”
어머니가 판결을 내리듯 말하자, 위스테리아 후작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어쨌든 바이올렛 헬리오스는 친아버지를 만났으니 그거 하나는 다행이었다.
위스테리아 후작의 반응을 보니, 바이올렛을 찾기 위해 꽤 노력을 한 것 같은 것도.
그리고 위스테리아 후작부인도, 남편이 어색하게나마 그간의 일에 대해 사과를 하자, 조금 마음이 풀린 듯한 얼굴을 하고 나와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사실은 저도, 그 여자가 살아있는 동안에야 저 아이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습니다만… 어머니f를 여읜데다 외할머니까지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는 저도 저 아이가 안쓰럽고 가여웠지요. 잘못이야 저 사람이 잘못이지, 어디 아이의 잘못입니까. 미리 사람을 보내 놓았다가 외할머니가 세상을 떠나면 바로 데려오라고, 내 딸로 입적은 못 하겠지만 우리 집안의 조카나 방계 친척으로 소개하겠다고 이야기하던 중이었어요. 하지만 저 아이가 사라졌고, 우리 부부는 지난 4년동안 저 아이의 소식을 수소문했습니다.”
“그리고 그 잃어버린 딸이, 어느날 헬리오스 공작부인이 되어 돌아온 것이고요.”
위스테리아 후작이 변명처럼 덧붙였다. 그러다가 고개를 숙이며 한숨을 쉬었다.
“저는…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어떻게 된 일인지 궁금하다면, 공작부인의 말씀을 들어 봐야 하지 않을까요.”
내가 끼어들었다. 어머니는 숙녀답지 못한 행동이라 생각하셨는지 조용히 눈살을 찌푸리셨지만, 내 품에서 울고 있던 바이올렛이 입을 열었다.
“제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저는 고작 여덟 살이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