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포이닉스는 조금 당황하더니, 키득거리며 웃었다. 나는 얼굴이 새빨개졌고, 그는 정말로 이 상황이 유쾌하고 즐거워서 견딜 수 없는 것 같았다.

“아, 다이애나 영애. 놀랐어요?”
“노, 놀라고 말고요! 그리고…”
“잠깐 이리 와 봐요. 나쁜 짓을 하려는 게 아니에요.”
“저 아직 이야기 할 게 남았거든요!”
“키스 정도는 해도 돼요. 난 당신 약혼자인걸요.”
“약혼하기로 약속한 거지, 아직 공식적으로 약혼한 건 아니니까요.”

그가 웃음지으며 내 어깨를 손으로 붙잡았다. 나는 두 손을 들어 그를 밀어냈다.

“황후 폐하께 말씀드릴거예요!”
“아마, 지금 영애의 모습을 보시면 귀엽고 풋풋하다고 하시지 않을까요.”

아, 정말. 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가.

남은 지금 이, 로맨스판타지 풍 겐지 이야기 세계에서 어떻게든 헬리오스의 마수에 걸려들지 않고, 애먼 추문에 휘말리는 일 없이 무사히 살아남기 위해 생존 드라마를 찍고 있는데. 지는 혼자서 풋풋한 첫사랑 로맨스를 찍고 있어?

아주 조금만 더 있으면, 황태자궁 후원에서 나 잡아봐라도 하겠다!

“당신이 마음에 들어요, 당신하고 약혼한 게 행운이 될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알겠으니까 우리 좀 천천히 해요.”
“황태자와 키스하는 거, 소녀들의 꿈 아니었나요.”

우와, 이런 재수없는 말을 입에 침도 안 바르고 하다니. 뻔뻔한지고.

하지만 속에 든 마음을 그대로 이야기했다간, 될 일도 안 될 것이다. 나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샐쭉 토라진 듯 몸을 돌리며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어차피 약혼할 사람이니까, 저한테는 그렇게 급한 일도 아니거든요!”
“저런, 제가 이미 잡힌 물고기라는 이야기 같네요.”
“두 분 폐하와 제 부모님들이, 우리를 이미 같은 어항에 넣었으니까요. 그리고 저는, 우리가 같이 살 어항이 예쁘고 평화롭기를 바라요. 물을 흐리고 다니는 메기가 훼방을 하는 일은 없어야 하고요.”
“헬리오스 공작이, 그 메기라는 이야기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설마, 하고 생각했지만.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다른 남자들을 시켜 공작부인을 노리게 했다는 말씀을 들으니, 그 생각이 더 확고해졌어요. 그에게 있어 공작부인은 적당한 핑계거리고, 기회만 닿는다면 자신의 계승권을 확보하거나, 적어도 자신의 혈통으로 계승권을 이어가게 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테지요. 그러니, 말씀드린 대로 마리아 아델라이드 공주님께 호위를 붙여 주세요. 만에 하나라도, 헬리오스가 그 분을 노리지 않도록.”
“만약 그분께 손을 댄다면 폐하께서도 가만히 계시지는 않겠지만…”
“그러나 공주님이 임신이라도 하신다면 이야기가 아주 복잡해지겠죠.”
“그리고 만약 내가 옥좌에 오르지 못하거나, 후사가 없다면 말이죠. 이런, 이 문제는 영애께서도 같이 노력해 주셔야겠는데요?”
“지금 용기와 지혜를 긁어모아서 노력하고 있잖아요?”

내가 짜증스럽게 대꾸하자, 포이닉스는 그제야 몸을 뒤로 뺐다. 그는 혈기왕성한… 아니, 욕구불만인 청소년이었고, 약혼자와 단 둘이 있는 시간동안 뭐라도 신사적이지 못한 접근을 해 보고 싶었겠지만… 그리고 여러 매체에서 활달하고 적극적인 인물로 그려졌던 열 여섯 살의 ‘오보로즈키요’라면 어쩌면 키스 정도는 자연스럽게 나누었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오보로즈키요, 아니, 다이애나 영애의 알맹이는, 포이닉스의 계모보다도 나이가 많은 바로 나다. 열 일곱 살 난 왕자님이라고 생각하면 나쁘지 않았지만, 내 나이 대비 젖비린내 나는 소년과 약혼을 하고 그 다음까지 가려면 아무래도 마음의 준비가 많이, 아주 많이 필요할 것 같았다.

그리고 다행히도 포이닉스도, 시대가 시대이고 환경이 환경이라 자꾸 헛소리를 하는 것 뿐이지, 사실은 영리하고 사려깊은 왕자임에는 틀림없어서.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내가 지금은 그다지 유혹에 넘어갈 것 같지 않으며, 사실 사랑놀음보다 더 긴급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납득하자, 곧 침착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우리는 다시 의자에 앉아, 문자 그대로 이마를 맞대고 이 문제에 대해 의논했다.

“…그리고 그분이 우리의 약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오시면, 괜찮으시면 저희 서룬도라스 공작 가문에서 모시고 싶습니다. 저희 어머니께서, 예전에 마리아 아델라이드 공주님의 양육을 맡으셨다고 합니다.”
“공작부인께서요? 정말 잘 되었네요. 안심이 됩니다.”
“무엇보다도 공작가의 사병들이, 아델라이드 공주님을 24시간 밀착 경호할 거예요. 헬리오스 공작님이 접근하지 못하도록요.”

포이닉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승낙이었다.

“영애, 그대는 정말 흥미로운 사람이에요.”

돌아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포이닉스 황태자가 다가와 내 뺨 가까이에서 낮게 속삭였다.

“나는 어지간하면,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고 이 다음에는 무슨 행동을 할 것인지, 계속 예측하며 살아왔어요. 하지만 당신은… 당신이 하는 생각은 예측하기 쉽지 않네요.”
“그렇게 어려운 생각을 하는 건 아니었어요. 저는 그저…”

나는, 이제부터 절대적인 협력을 이끌어내야 할 상대를 향해 있는 힘껏 호의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는… 그저 헬리오스 공작의 난행이, 그저 난행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황태자 전하께 직접적인 공격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분이에요.”
“거기까지 생각할 수 있다는 게 대단한 점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계속 미묘한 데서 기분이 나빠지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저 황태자 전하가, 나를 자꾸 대견하게 여기는 게 여기까지 느껴져서.

“훌륭해요, 정말 칭찬해 주고 싶어요.”

아, 손 치워. 손 치우라고. 고생해서 셋팅한 내 머리에 손 대지 마.

21세기 한국 같았으면 수능도 안 봤을 미성년자가, 너희 엄마보다 나이 많은 누님에게 어디 감히 건방지게 쓰담쓰담이야!!! 아니, 그 이전에! 남의 동의 없이 그 사람 몸에 손을 대지 말라고!!!! 치워!!!!!!

***

황태자 궁을 나서며, 나는 반쯤은 녹초가 되어 있었다.

내가 생각하는 일들, 앞으로 해 나가야 하는 일들에 대해 황태자와 의논한 것 까지는 좋았다. 다만 이 황태자 포이닉스가 자꾸만 내게서 빈틈을 찾고 있다는 게 문제였다.

게다가 이 녀석, 쓸데없이 자신감만 높아서는.

자기를 싫어하는 여자는 없을 거라고 확신이라도 하는 듯한 태도였단 말이지.

그런 점에서는 사실, 헬리오스 공작, 아니, 히카루 겐지와 사실 크게 다를 것은 없어 보인다. 이쯤 되면, 황제에게 뭔가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뭐, 물론… 그만큼 자신이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일단 미래의 황제가 될 사람, 황태자이고, 나름 잘생기고 싹싹하고 똑똑하다. 하는 짓이 영 짜증나는 게 아니라, 어느정도는 귀엽게 보이기도 하는 걸 보면, 얘가 분위기 파악을 못 하긴 해도 선을 넘는 정도는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아마도 16세 소녀였다면, 그런 황태자를 보고 두근거릴 수도 있었겠지만.

“나는 아니지…”

마차 밖 풍경을 내다보며, 나는 중얼거렸다.

그때였다. 마차가 갑자기 멈추었다. 마부가 뭔가 실랑이를 부리는 듯한 소리가 났다. 나를 따라온 시녀가 마차 밖을 내다보는데, 갑자기 마차의 창문으로 한 남자가 다가와 안을 들여다보았다.

헬리오스 공작이었다. 나는 얼른 부채를 펴서 얼굴 절반을 가리며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서룬도라스 공작가의 마차가 지나가기에.”

그는 마치 자신과 내가 오래 전부터 잘 아는 사이라도 되는 것처럼 친근한 태도를 보이며, 창가에 팔을 얹었다.

“이번에 사교계에 데뷔하셨다는 공작 영애께 인사라도 드리려고 했습니다만.”
“보시다시피 적절한 샤프롱을 동반하지 않아서, 소개를 받고 인사를 나눌 상황은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는 갈 길이 바쁘니, 다음 번에 정식으로 인사 나누도록 하죠.”
“뭐죠, 설마 나를 모른다고 주장하고 싶은 건가요?”
“예, 저는 그쪽을 모르고, 여기는 무도회도 사교 행사장도 아니며, 아직 혼인도 안 한 어린 아가씨 옆에 샤프롱도 없는 상황에서 제가 낯선 신사분과 무슨 이야기를 나눠야 할지 모르겠군요.”

그 말대로, 나는 지난 번 무도회에서 그를 소개받지 않았다. 사실 제정신인 어머니라면, 혼기의 딸을 저 난봉꾼에게 굳이 소개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그는 만만한 귀족의 딸들을 하나하나, 마치 미소녀게임 속의 캐릭터를 공략하듯 하나하나 공략하고 이별하기를 반복했다. 그가 내게 먼저 적극적으로 다가오지 못한 것은, 내가 서룬도라스 공작가의 딸이고, 그날 나의 샤프롱이 내 어머니, 서룬도라스 공작부인이었으며, 내가 혼자서 생각에 잠겨있던 공간도, 연만한 귀부인들이 모여 이야기하는 쪽이었기 때문에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접근할 방법이 없어서였다.

“무엇보다도 그쪽은 제가 서룬도라스 가의 딸이라는 것을 알고 계시면서도 이런 무례를 저지르시다니, 정말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그쪽이 누구인지 알 생각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으니,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이 시점에서 헬리오스 공작을 두고 ‘모른다’고 뻔뻔하게 밀고 나가도 상관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헬리오스 공작은 집요했다.

“빈틈이 없네요. 공작부인께서 그렇게 처신하라고 가르치셨던가요?”

나는 그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마차를 몰라서 명령했다.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헬리오스 공작은 마차 옆에 딱 붙어 선 채 따라 걸었다.

“속도를 내! 저 이상한 사람을 떨어뜨려 버려!”
“하지만, 아가씨… 저 분은!!!!”
“네가 알든 말든 나는 모르는 사람이야! 어서 달려!”

나는 당장이라도 기절할 것 같은 비명을 질렀다. 길가를 가던 사람들이 우리 마차를 쳐다보고 수군거리고 있었다. 공작 가문의 아가씨가, 저 악명높은 헬리오스 공작과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소문이 난다면 내 목표는 말짱 꽝이 되고 말 거다. 이럴 때는, 정말로 저 불한당에게 놀라 도망이라도 친다는 설정만이 살 길이었다. 마차가 속력을 냈다. 마침내 헬리오스 공작이 우리 마차에서 떨어지며 바닥을 뒹굴었다. 크게 다친 것 같진 않았지만, 사실 그래도 상관은 없다고 생각했다. 황제 폐하의 사생아인 공작이 중상을 입는다면 그것도 문제겠지만, 명색이 서룬도라스 공작가가 그 정도 수습도 못 할 정도는 아니라는 데 걸어야겠지. 집에 도착할 무렵에는 아마도, 헬리오스 공작이 서룬도라스 공작가의 마차에 다가가 추파를 던지다가 망신을 당했다는 소문이 퍼질 것이다.

황태자와 약혼할 예정인 공작 영애의 평판으로는 결코 나쁜 일이 아닐 거라고 나는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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