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곤해 보이는군요, 영애.”
그렇게 한참동안, 황태자는 레이스 소매의 유행과 수녀원의 재정에서 시작하여, 현대적인 용어로 요약하면 소비진작과 경제성장과 낙수효과, 정도로 요약할 수 있는 이야기를 혼자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말하자면 황태자의 경제학 개론인지 지론인지 개똥철학인지, 인 것이다.
황실에서 최고의 교육만을 받고 자랐겠지만, 그래도 아직 열 일곱 살 밖에 안 된 소년이어서인 것인지. 그게 아니면 황실에서 경제학을 가르치는 작자들 역시 다들 금수저라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이 세계의 묵시적인 배경 자체가 한 18세기 유럽 정도를 상정하고 있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이야기는 논리정연하기는 하되, 실제로 고된 노동을 하는 사람들, 이 세계의 하층민들에 대한 고려가 놀라울 정도로 배제되어 있었다.
대체 셋 중 뭐가 문제인 거야.
아니, 사실은 세 가지 다 문제겠지만.
“혹시 내 이야기가 너무 길고 지루했나요?”
물론 경제에 대해 아는 게 없는 영애라면 지루해서 하품이 날 만한 이야기일 수도 있었지만, 황태자비가 될 것을 염두에 두고 자란 사람이라면 지금 황태자가 하는 말 정도는 충분히 알아듣고도 남을 것이다. 다만 나는 21세기에서 온 사람이고, 듣고 있으면 말이 되는 것처럼 들리기는 하나 어디까지나 책상물림들의 탁상공론같은 소리를 두시간 가까이 듣고 있자니 입이 근질거려서 돌아버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진짜, 노동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이 없잖아.
하지만 나는 일단 그런 생각 따위 딱 접어두고, 교수님을 모시고 회식자리에 가 앉은 대학원생다운 태도로 사근사근하게 대답했다.
“아뇨, 전하. 그런 것은 아니에요. 다만…”
“다만…?”
“사람을 너무 혹사하면 안되는 게 아닐까, 그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특히 기술자들을요. 화려하고 사람 손이 많이 가는 것들이 유행한다면 그들이 돈을 많이 벌 수는 있겠지만, 기술을 가진 사람의 숫자는 한정되어 있는데 수요가 너무 많아진다면, 그 사람들은 너무 혹사당하지 않을까요. 그러다 죽거나 병들거나 일을 그만 둘 수도 있고요.”
“영애가 마음이 다정한 사람이어서 기뻐요.”
황태자는 눈치도 없이 활짝 웃었다.
“그렇지 않아도 어마마마께서… 아, 그렇죠. 황후 폐하는 영애에게는 언니가 되시지만요. 비록 저를 낳아 주시지는 않았지만, 제게는 존경하는 어머님이시랍니다. 그 황후 폐하께서 전에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무슨 말씀을 하셨는데요?”
“닉스, 너는 너무 말이 많단다. 여자들은 그렇게 말이 많은 남자를 좋아하지 않아, 라고요.”
그는 웃었고, 나는 웃는 척을 했다. 그러니까 간단히 말해서, 얘는 다른 귀부인들 앞에서도 이렇게 경제가 어떻고 정치가 어떻고 하고 눈치없이 떠들었다는 이야기다.
딱, 머리는 좋고 사람이 나쁜 건 아닌데 눈치 더럽게 없는 남자애들이 하는 짓이다.
“사실 재미있는 이야기는 아닐 거예요. 하지만 장차 황제가 될 사람은 해야 하는 생각이고요. 재미있지 않나요, 같은 상황을 보며 나는 돈의 움직임에 대해 생각하고, 영애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자선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요.”
아, 이 녀석. 정말 내 말을 한 마디도 못 알아듣고 있다. 이건 자선이 아니라 노동자의 권리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는 건데.
하지만 뭐, 여긴 민주주의 사회가 아니라 이런 치렁치렁한 노동집약적 드레스를 입고 다니는 로맨스 판타지의 세계다. 정실 부인이 낳은 아들이 가문을 잇고, 머리가 좋든 나쁘든 성품이 어떻든 귀족의 딸은 무슨무슨 영애라고 불리며, 다른 사람의 노동으로 만들어진 것들을 SPA 브랜드에서 1+1로 파는 티셔츠처럼 하루에서 몇 번씩 입고 벗고 하는 게 정당화되는. 여기서 “여자를 밝히는 것으로 이름난 당신의 이복형이 옥좌를 노리고 있다”는 정도의 이야기에서 그치지 않고, 또 가난하고 기술이 있는 사람들이 혹사당하는 것을 걱정하는 선에서 그치지 않고, 인간에게는 천부인권이 있고 노동의 권리가 있으며 노동자는 정당한 임금을 받고 보호받아야 한다는는 이야기까지 했다간, 저 순진하고 아방하며, 책은 나름 열심히 읽은 것 같지만 경험치는 영 낮은 저 황태자는 놀라서 입을 딱 벌릴 테지.
그때였다.
“우리가 함께 하면 제법 괜찮은 일들을 할 수 있을 지도 몰라요.”
포이닉스 황태자가 그런 같잖은 소리를 하며, 손을 뻗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마치 귀여운 강아지를 쓰다듬듯이.
…지금 대체 이게 무슨 짓이야.
포이닉스는 상상도 못 할 일이지만, 현실에서의 나는 사실 황후보다도 나이가 더 많았다.
아무리 회귀 빙의 환생 콤보로, “겐지 이야기”를 닮은 로맨스판타지의 세계에서 갓 사교계에 데뷔한 열 여섯 살 소녀가 되었다고 해도, 이제 열 일곱 살인 남자애라니, 띠동갑도 넘는데다 현실에서는 이제 겨우 고등학교나 들어갔을 나이의 남자애다. 그냥 포이닉스 황태자라고만 생각했을 때는 그게 딱 다가오질 않았는데,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고 유치한 개똥철학을 듣고 있으려니, 이건 아니다 싶다. 이런 어린 남자애와 약혼을 하고 티타임을 몇 번 가진 뒤 결혼을 한다니, 이건 아무래도 범죄가 아닐까.
자꾸만 시리어스하게 흘러가는 생각을 멈춰 보려, 나는 그의 말꼬리를 적당히 잡으며 정말로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그런데 닉스, 라고요?”
“예, 황후 폐하께서 저를 부르시는 이름이랍니다. 원래는 제 이름, 포이닉스에서 따 온 닉스이지만.”
“예, 포이닉스의 닉스이지만…”
“밤의 여신, 의 이름이기도 하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스 신화의 여신 닉스, 카오스에서 온 밤의 여신.
“고대에는 가장 강력한 신 중 한 분이었다고도 하는…”
“맞아요. 그래서 돌아가신 형님께서는 좀 신경쓰이지 않느냐, 아무리 위대한 여신이라지만 황자에게 여자 이름을 붙이다니 좋지 않다고 하셨지만, 저는 좋았어요. 진짜 제 어마마마가 생긴 것 같아서.”
“어머님의 정이 그리우셨던 거군요.”
“형님께서 돌아가신 뒤에는…”
포이닉스는 입가를 슬쩍 당기며 웃음지었다.
“어마마마께서는 저를 그렇게 부르시면서 헬리오스 이야기를 하시기도 했어요.”
“하긴, 헬리오스의 이름도 태양신의 이름이지요.”
“예, 어마마마께서는 폐하께서, 공식 정부가 낳은 사생아에게 그런 위대한 신의 이름을 붙인 것은 온당치 못한 일이라고 하셨지요. 거추장스러운 이복형에게, 거창한 이름이 붙어 있는 거니까요.”
“그래서 전하를, 신의 이름으로 부르시는 거군요.”
그럴 것이다, 아마도.
이제와서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적자를 낳는다 한들, 계승권을 두고 분란만 일어날 뿐이라면.
차라리 자신의 아이를 낳지 않고, 동생을 장차 둘째 황자와 혼인시키고, 그 둘째 황자의 온전한 후견인 노릇을 하는 게 낫다. 황후께서는 그렇게 생각하셨을 거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가 수줍게 웃었다.
“다이애나 영애, 저는 영애와 이야기가 잘 통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가요?”
“사실 저는, 영애께서 말씀하신 헬리오스 공작에 대한 이야기에 무척 흥미가 갑니다.”
포이닉스는 내 얼굴을 바라보며 상큼하게 웃었다.
상큼한 웃음이라…
그래, 뭐. 헬리오스와는 다른 타입이지만 포이닉스도 나름 미소년이다. 내 원래 세계에서의 나이를 생각하지만 않는다면, 공작가의 여섯 번째 딸과 아름다운 황태자 전하의 결혼은 누가 봐도 완벽한 결합이긴 하겠지. 결혼은 나중 문제이고, 일단은 포이닉스 황태자를 내 편으로, 아니,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는 일이 급하지.
“헬리오스 공작이 공작부인과 결혼했으니, 일단 당분간은 다른 데 눈을 돌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아니에요, 전하. 그날 그 무도회에 전하도 오셨어야 했는데.”
“영애가 갈 줄 알았다면 저도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갔을 겁니다.”
“그날도, 공작부인을 벽화처럼 세워놓고 혼자서, 수많은 여자들과 어울렸다고요. 아직 신혼인 공작부인을 그렇게 내버려두고. 오죽하면, 저희 어머니를 비롯하여 그 귀부인들께서 공작부인을 자리로 초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누셨겠어요.”
“아아, 그 분들… 긍지높은 귀부인들께서 출신이 불분명한 어린 공작부인을 받아들이셨을 정도니, 그 분위기가 짐작이 가는군요. 하지만 저는 다른 이야기도 들었습니다만.”
“무슨 이야기를요?”
포이닉스가 자신의, 새하얀 설화석고같은 이마 위로 흘러내린 칠흑처럼 검은 머리카락 한 가닥을 만지작거리며 웃었다.
그리고 한 가지, 엉뚱한 징크스 같은 거지만 안심이 되는 부분이 있었다.
포이닉스는 흑발이었다.
자고로 한국 순정만화와 로맨스판타지에서, 흑발과 금발이 싸우면 매우 높은 확률로 흑발이 이기는 법이다.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인 것 같지만, 그래도 나는 포이닉스에게 좀 더 가능성이 있다는 증거처럼 보여서 조금 안심했다.
“저렇게 혼자 내버려두다가는 공작부인이 위험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한 영애께서, 서룬도라스 공작부인께 청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요.”
“세상에, 그런 이야기는 어디서 들으신 거예요.”
“내 약혼녀가 그렇게 의기 넘치는 사람이어서 기뻤어요. 뭐, 자극을 좋아하는 헬리오스라면 자기 아내를 다른 남자들이 손대게 하는 일도 사주하고 남을 사람이었는데.”
“설마…”
“제게도 일을 거들어주는 친구들이 있답니다. 사실은 공작부인을 노리는 자들이 있었다고 해요.”
“…그런데 지켜만 보고 있었다니, 신사답지 못해요.”
“지켜야 할 게 많은 사람이니까요. 자칫 보호하려 하다가 황태자의 측근이 공작부인에게 손을 대려 했다는 말이 나올 것 같아 몸을 사리고 있었다지요.”
내가 입을 비죽거리자, 그가 손가락을 뻗어 내 입술을 툭 건드리며 속삭였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를 올려다보자, 그는 과장될 정도로 정중한 태도로 내게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당신이 헬리오스 공작부인을 구한 거죠.”
“그런 것 같네요.”
“상을 드릴까요?”
잠깐, 뭐지, 이 녀석.
열 일곱 살 밖에 안 된 애가, 무슨 리디광공같은 소리를 하고 있어. 떽!
나는 어깨를 움츠렸다. 하지만 포이닉스는, 손끝으로 내 턱을 들어올리며 조심스럽게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누가 봐도 분명한, 키스를 하자는 표시였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지!!!!
여기서 십 년쯤 더 지난, 잘 자라서 훈훈하게 익어가는 남자라면 모를까, 아직 스무살도 안 된 남자애와 키스라니, 이건 제정신인 어른이 할 짓이 아니야!!!!!
그런데다 이런 꼬꼬마가 유혹 같은 것을 하게 내버려 두는 것도 21세기의 내 윤리로는 말이 되지 않았다. 나는 얼른 그의 손가락을 밀어내며 소리쳤다.
“그, 그, 그런 거라면 일단!!!!”
“…?”
“일단, 마리아 아델라이드 공주님께 호위를 붙여 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