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내 말은, 이건 사람의 손이 너무 많이 가는 게 아닐까 해서.”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거예요.”
드레스 까지야 어쩔 수 없다고 쳐도, 기계도 아니고 사람 손으로 레이스를 짠다는 게 말이나 디는 일이어야지. 내가 살던 세계에서, 내가 적당히 입는 옷에 달린 레이스란, 천 위에서 한번에 구멍을 뚫어 기계로 감치고 주름을 잡은 “레이스 비슷한 장식”이었고, 자수라는 것도 컴퓨터에 입력해 놓으면 자수 재봉틀이 그대로 수놓는 것이었지만, 그런 것조차도 손바닥 만큼만 들어가 있으면 가격이 확 오르곤 했다.
그런데 여기서는, 무도회 때 입는 드레스는 물론이고 잠옷에조차도 사람 손으로 뜬 태팅 레이스를 내 키의 세 배는 될 만큼 쓰고 있다니.
물론 세탁을 하면 망가지니까, 세탁할 때 레이스 컬러는 떼어놓고 따로 세탁한다고는 하지만, 아무리 유행이라도 이건 돈지랄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있잖아, 내가 곧 황태자비가 될 사람인데. 좀 더 검약하는 자세를 보이는 게 모두에게 모범이 되지 않을까?”
“황태자비전하께서 초라한 모습을 하고 계시면, 다들 옷을 못 입는다, 감각이 세련되지 못하다고 무시하고 말 거예요. 높은 지위에 오르실수록 그 지위에 어울리는 화려한 모습을 해 주셔야, 모시는 사람들도 어깨를 펼 수 있죠!”
“내가 어디서 굴러먹다 왔는지 모를 말뼈다귀 같은 사람이라면, 초라한 모습을 하고 있을 때 사람들이 격을 모른다고 무시할 수 있겠지만, 나는 서룬도라스 공작가의 사람이고 황후 폐하의 동생이야. 이 나라에서 대체 그 누가, 내가 옷을 못 입는다고 무시할 수 있지?”
하녀는 내가 어디 아프다고 생각했고, 달려온 시녀와 유모도 기가 막혔는지 고개를 저었다. 어머니는 내가 훌륭한 여성의 길에 대한 뭔가 고리타분한 책이라도 읽은 모양이라고 웃었다. 나의 아버지인 서룬도라스 공작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뜻밖에도 목소리를 깔고, 무시무시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말했다.
“지위와 신분이 높을수록, 검소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 백성들과 귀족들에게 모범이 될 수 있다는 뜻에서 드린 말씀입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소리는 하지 마라. 네가 진짜라면, 너는 애초에 그 레이스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관심도 갖지 않을 테니까.”
‘진짜’라는 말에 가슴이 뜨끔했다. 마치 내가, 처음부터 이 세계 사람인 것이 아니라, 겐지 이야기로 논문을 쓰고, 학교 앞에서 그만 범죄의 피해자가 되어 목숨을 잃거나, 혹은 중환자실에 누운 채 이 세계에 떨어진 사람이라는 것을 들킨 건가 싶어서.
“하지만, 아버지…”
“너는 그, ‘완두콩 공주’ 이야기도 모르는 것이냐.”
“예…?!”
물론 “완두콩 공주” 이야기라면 안다.
옛날 옛날에 어떤 왕자가 공주와 결혼하기를 원했다. 여기까지라면 그냥 이웃나라 공주 중 조건 맞는 사람과 결혼하면 될 일이었지만, 그는 공주 중의 공주, 진정한 공주와 결혼하고 싶었다. 왕자는 여러 공주를 만나 보았지만, 완벽한 공주는 없었다.
어느 폭풍우가 치던 밤, 왕자의 성에 한 공주가 찾아왔다. 그는 비바람에 드레스가 젖어 엉망이 된 모습이었지만, 자신이 진짜 공주라고 주장했다. 왕비는 이 공주가 진짜 공주인지 알아볼 방법이 있다며, 공주가 묵을 방의 침대에 완두콩 한 알을 올려놓고, 그 위에 여러 겹의 두꺼운 이불을 깔았다. 다음날 아침, 왕비가 공주에게 간밤에 잘 잤는지 묻자, 공주는 침대에 딱딱한 바윗덩어리 같은 것이 있어서 한 숨도 자지 못했다며 까다롭게 굴었다.
보통은 비바람이 치는데 갑자기 나타난 낯선 손님을, 그저 재워 주기만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할 텐데. 남의 집에 와서 침대 투정이나 하다니 쟤는 뭐 하는 사람인가 싶은 이야기인데, 왕자는 이렇게 예민한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공주라며 그 공주와 결혼했다는 이야기다. 정말 나이가 들어 다시 읽어도 이해가 가지 않는 이야기였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입고 쓰고 걸치는 모든 것을, 흠결 없는 에메랄드처럼 완벽한 것들, 귀하고 훌륭한 것들만을 사용해 온 네가, 이제와서 갑자기 레이스를 사람이 한땀한땀 뜨는 것을 두고 걱정을 하고 있다니. 사냥터의 노루들이 웃을 일이로구나. 그런 건 너 같은 신분의 아가씨가 할 말이 아니다. 오히려 그 완두콩 공주처럼, 아주 작은 결함이라도 있는 물건을 내밀면, 큰 모욕이라도 당한 듯이 깜짝 놀라는 쪽이 어울리겠지.”
“아니,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어요. 하지만 저는 그 공주가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데요…”
“내 말을 못 알아듣고 있구나. 그 공주가 훌륭한 인격자라거나, 성녀라거나, 백성을 생각하는 군주라서 그 왕자가 진정한 공주로 인정한 게 아니지 않느냐!”
“…”
“황실이나 공작가에서 태어나,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 까지 최상류층으로 살아온 사람은, 그렇지 않은 것을 대했을 때 반드시 예민하게 알아챈다는 이야기다.”
“…”
“너는 태어날 때부터 서룬도라스 공작 영애였지. 비록 막내딸이라 언니들이 모두 시집갈 때 까지는 네 이름이 아니라 서룬도라스 영애로 불렸다고 하나, 네 뒤에 누가 있는지, 어떤 가문이 있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허나.”
“아버지.”
“나는 다르다.”
내 아버지, 서룬도라스 공작의 입가가 경련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자신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것,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었기에 극복하기 어려웠을 한계. 때로는 발목을 잡다 못해 목숨을 앗아가기까지 하는 것. 그것이, 21세기에 태어난 나에게는 여성이라는 성별이었고, 그에게는 공작가의 적장자가 아닌, 방계 중에서도 가문의 일원이라 부르기 민망할 정도로 먼 방계 출신이었다는 것이었다.
“하급 귀족으로 인생을 마칠 뻔 했던 방계였던 내가, 서룬도라스 공작가에 데릴사위로 들어온 이후 겪어야 했던 사정들을 너는 모른다. 모를 것이다. 내가 왜 이렇게 예민하게 구는지에 대해서도.”
아니, 짐작할 수 있었다.
귀족이라고 하나 영지도 변변히 없고, 그나마의 작위도 형님에게 주어질 테니 선택지라고는 군인과 성직자밖에 남지 않았던, 그러니 머리만은 비상하게 좋았던 그가, 서룬도라스 공작 가문의 영애였던 어머니에게 선택받은 이후로, 그는 정말 필사적으로 살아왔을 것이다. 공작위에 어울리지 않는 촌뜨기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을 선택한 공작 가문에 누가 되지 않기 위해서.
그런 그의 입장에서, 지금 내가 하는 모든 말들이 철부지의 헛소리에 가깝게 들린다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닙니다, 아버지.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소매 길이 때문에 언쟁을 벌이다가 이 세계에서 해야 할 일들을 제대로 못 하게 된다면 그게 더 곤란했다. 나는 절반 쯤은 상황을 무마하기 위해, 절반 쯤은 아버지에 대한 안쓰러운 마음으로 머리를 조아렸다.
“알았다고?”
“저는… 황후 폐하께서도 때때로 검약을 말씀하시기에…”
“네가 황후가 된 뒤에는 해도 될지 모르지. 허나 지금은 아니다.”
“예…”
내가 순순히 수긍하자, 그는 길게 말하지 않았다. 어쨌든 황태자비 정도가 아니라, 나중에 황후의 자리까지 올라가야 이 소매 길이 같은 것도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모양이다.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사치와 낭비의 상징같은 마리 앙투아네트도, 검약을 강조하며 머리에 감자꽃을 꽂고 나오던 시절이 있었다고 한다. 하긴, 황후나 황태자비가 검소하게 살자고 말해봤자, 이 세계의 사람들에게는 딱 그 정도로만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높긴 했다.
그건 그렇고, 여기서 진짜 이상한 건 저 “완두콩 공주” 이야기였다.
“완두콩 공주”는, 안데르센이 쓴 이야기였다. 이 세계에 안데르센이 있는 게 아니라면, 그 이야기는 대체 어디서 온 걸까.
***
“그런 일이 있었나요?”
포이닉스 황태자는 흥미롭다는 듯, 내 쪽으로 몸을 돌린 채 이야기를 들었다.
물론 그간의 이야기를 전부 다 한 것은 아니다. 나와 그는 아직 비밀 이야기들을 털어놓을 만큼 친한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들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전부 다 털어놓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나는 그가 흥미있을 만한 이야기들, 이를테면 헬리오스에 대한 험담이라든가, 마리아 아델라이드 공주님에 대한 이야기 같은 것들을, 너무 깊게 들어가지 않고 딱 적당히 이야기했다. 소위 의혹을 흘릴 만큼만 말한다는 것 말이다.
이곳 사교계에 익숙해질 만큼 오래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내가 이런 대화 스킬을 익힐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대학원이라는 곳은 복마전이었다. 요령이 좋지 못하면 살아남기 힘든 곳이었다. 학회에서는 모시고 간 교수님들끼리의 알력다툼이 늘 이어졌고, 그때마다 우리는 마리 앙투아네트와 뒤 바리 부인을 모시고 다니는 시녀들이 된 것처럼 전전긍긍했다. 몇 년을 그 생활을 했는데, 사람들에게 숙이고 다니는 법이라든가, 조심조심 남의 뒷담화를 하는 스킬 같은 것이 단련되지 않았을 리 없다.
무엇보다도 SNS가, 내게 좋은 것을 많이 가르쳐 놓았다. 사람이 무심한 듯 시크하게 과시를 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인맥 자랑은 어떻게 해야 덜 추해 보이는지, 그리고 남을 조리돌림 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같은 것 말이다. 사교계에서 부채를 흔들며 수많은 커플들의 중매쟁이 노릇을 하고,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순식간에 잇고 끊으며 돌아다니는, 저 아트로포스 같은 노부인들의 현장 경험에서 온 스킬을 따라잡는 것은 무리였지만, 적어도 내 나이 또래의 영애들보다는 훨씬 더 이런 스킬들을 구사할 수 있는 것도 다 대학원 생활과 SNS 덕분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화면 너머로 보이는 사교계란 예쁘고 화려하지만, 사실은 정말 스트레스 받는 곳일 지도 모르겠구나…
생각하는데, 포이닉스 황태자가 활짝 웃었다.
“다이애나 영애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전에 하지 못했던 생각들을 많이 하게 되네요.”
“예를 들면요?”
“그 레이스 소맷단이라든가.”
아차.
그다지 유해하지 않은 이야기를 하다 보니, 그 레이스 이야기까지 나오고 말았다.
아버지가 알면 분명히 안 좋아할 만한 이야깃거리인데.
“사실 저는 검술연습을 할 때, 레이스 같은 것은 종종 찢어먹곤 해요. 무기에 걸리고, 대결을 하다가 걸리적거려서 북 찢어버리는 일도 있고, 또…”
“아…”
“하지만 그게 그만큼 공이 들어간 물건인 걸 알았으니, 이것저것 고려해 볼 필요가 있겠네요. 그런 레이스는 어디서 만드는 건가요?”
“글쎄요… 이야기를 듣기로는 황실에 납품되는 최고급 레이스들은 수녀원에서도 만든다고 해요.”
“아아, 그렇군요. 그러면 오히려 레이스를 덜 사용하면 수녀원의 재정에 악영향을 끼칠 수도 있는 거겠네…”
잠깐, 저거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그런데…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쪽이, 수녀원에는 도움이 되겠군요. 뭔가 우리의 약혼과 결혼을 맞이하여 새로운 걸 유행시켜 보는 것도 방법이겠어요. 당신의 드레스 트레인을 전부, 손으로 뜬 레이스로 만든다거나 해서…”
…대체 물건 좀 아껴 쓰자는 이야기가 왜 저렇게 흘러가는 건데?
나는 문득 화가 치밀었다.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인 인간들이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