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오보로즈키요.

달빛이 희미하던 봄날 밤, 그 으스름 달빛 아래 겐지가 만났던 여성.

그는 우대신의 따님이자, 겐지의 이복형인 스자쿠 동궁의 후궁이 될 예정이었던, 우대신이 장차 중궁으로 만들기 위해 공을 들였던 여섯째 딸이었다. 그리고 “겐지 이야기”를 닮은 로맨스 판타지 속 세계로 빙의해 버린, 지금의 내 역할이다.

처음 “겐지 이야기”를 읽을 때, 오보로즈키요는 여러 면에서 조금 특이한 인물이라고 생각했었다. “겐지 이야기”속 여성 캐릭터로도, 고전 소설 속 인물 치고도.

사실 겐지의 이복형이자, 홍휘전 여어가 낳은 아들인 스자쿠가 동궁이 되었을 때, 좌대신과 우대신은 서로 자신의 딸을 후궁에 밀어넣어, 장차 스자쿠 덴노의 중궁으로 만들려 했다. 처음에는 우대신이 불리한 듯 보였다. 우대신의 여섯째 딸은 아직 어렸지만, 좌대신과 그 부인인 내친왕 사이에서 태어난 외동딸 아오이노우에는 스자쿠와 나이가 맞았고, 집안도, 그 아름다움도, 학식과 기품도 빼어난 소녀였다. 하지만 히카루 겐지가 관례를 치르며 상황이 달라졌다.

겐지에게 관을 씌워 주는 역할을 맡은 좌대신은, 기리츠보 덴노의 소망대로 겐지의 후견인이 된다. 동궁이나 황자와 같은 황족 남성의 관례 때에는 내친왕이나 대신의 딸과 같은 그에 걸맞는 여성이 동침하고, 그와 혼인하는 ‘소이부시’라는 의례를 거치는데, 좌대신은 딸인 아오이에게 겐지의 소이부시 시중을 들게 한다. 이후 좌대신은 겐지의 장인으로서, 아직 어린 히카루 겐지를 지지해 주었다.
그리고 이 일 이후로, 우대신의 여섯째 딸이 장차 스자쿠 동궁과 혼인하여 황후가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로 여겨졌다. 스자쿠의 모친인 홍휘전 여어 역시, 자신의 동생이 동궁비가 되고, 후사를 낳아 황후가 된다면 친정 가문에도, 자신에게도 더할 나위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동궁비 후보였던 아오이노우에와 혼인했던 겐지가, 이번에는 홍휘전 여어의 동생이자 우대신의 여섯째 딸인 또 다른 동궁비 후보와 사통하고 말았던 것이다.

…하지만 겐지가 으스름 달빛 아래 만났던 우대신의 여섯째 따님, 오보로즈키요는 결국 입궁을 하게 된다.

처음에 우대신은, 이렇게 소문이 나 버리고 여섯째 딸이 스자쿠의 비빈이 될 수 없게 되자, 겐지에게 내 딸과 결혼하라고 권했다. 그 일이 있기 얼마 전, 아오이노우에도 세상을 떠났으니, 스자쿠 덴노의 비빈은 아니라 해도 겐지의 정실로 간다면 딸에게도 나쁜 자리는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겐지는 거절했다. 한편 스자쿠도 입궁을 권하여, 오보로즈키요는 입궁하여 스자쿠를 모시게 되었다.

물론 겐지와의 일이 있었기에, 오보로즈키요는 여어나 갱의가 아니라 상시였지만, 스자쿠는 오보로즈키요를 총애했다. 하지만 오보로즈키요는 스자쿠 덴노의 총애를 받으면서도, 겐지와도 여전히 사통을 계속했다. 스자쿠 덴노 역시, 자신의 비빈이 되기 전 이미 겐지와 사통하고 요란한 스캔들을 일으킨 오보로즈키요를, 총애는 하였지만 후궁으로 삼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스자쿠 덴노를 모시던 오보로즈키요는, 스자쿠가 양위하고 덴노의 자리에서 물러나자 불문에 귀의한다.

내가 처음으로 “겐지 이야기”를 읽었을 때, 오보로즈키요라는 인물은, 현대적이고 멋진 여성,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고, 당대의 덴노였던 스자쿠와 저 유명한 히카루 겐지를 양 손의 꽃처럼 쥐고 쥐락펴락하던 멋진 여성처럼 보였다. 유명한 순정만화 버전에서도, 오보로즈키요는 적극적으로 겐지를 유혹하고, 입궁한 뒤에도 사람들의 수군거림에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지낸다.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비록 나는 논문을 쓰고 번역을 하다가 갑자기 이 세계에 떨어져 서룬도라스 공작 영애 행세를 하는 입장이었지만, 나의 본체에 해당하는 다이애나 서룬도라스는 아마도 내가 읽었던 “겐지 이야기”속 오보로즈키요처럼 당당하고 뛰어난 사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헬리오스의 행각들을 되짚어 생각하다 보니, 히카루 겐지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악질적인 정치생물이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가, 계획적으로 오보로즈키요를 유혹했다면.

그래서 스자쿠 덴노가 우대신의 딸을 정실로 맞아들일 수 없도록, 고의로 방해한 거라면.

당대의 권력자인 좌대신과 우대신이, 저 스자쿠 덴노의 총애와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소중하게 길러낸 딸들. 겐지는 바로 그런 이유로 장차 동궁비가 되도록 길러진 아오이노우에와 오보로즈키요를 손에 넣었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바로 그런 행동의 결과로 스자쿠 덴노는 든든한 처가 세력을 손에 넣지 못했다.

하지만 그게 고의였다면.

만약 그랬다면…

***

“헬리오스에 대해 물어보았다면서.”

내가 차를 준비하는 것을 기다리다, 황후께서 물으셨다.

“예, 폐하.”
“너는 곧 포이닉스 황태자와 혼인할 몸이니, 혹시라도 헬리오스가 포이닉스를 위협할까 걱정하는 거냐.”
“…글쎄요.”
“그럴 리는 없을 거다. 폐하께서는 그의 계승권을 박탈해 신하로 만드셨으니. 만에 하나 포이닉스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 다음은 방계 황족들이지, 헬리오스가 아니야.”
“저는 헬리오스가 황제의 자리를 노린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그러니?”
“하지만 단순히, 자기 욕망이 흐르는 대로 여자들을 탐하고 다니는 불한당이라고만 볼 수도 없겠지요.”
“너무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단다. 그는 꽃밭에 잘못 돋아난 독초같은 자인 것이지. 꽃밭의 주인이 독초라 해도 꽃만 아름다우면 상관없지 않느냐며 내버려 두는 동안에나 득세할 수 있는.”

황후는 고개를 돌렸다. 헬리오스의 난행을 참아주는 것도 황제 폐하께서 살아계신 동안까지다. 포이닉스가 황제가 된 뒤에는, 반드시 그 싹을 잘라내야 한다는 강한 의지가 느껴졌다.

나 역시 동의한다. 시간은 우리의 편일 것이고, 그를 비호하는 황제는 영원히 살지 않는다. 햇빛처럼 찬란한 헬리오스의 권세는, 하늘의 해가 반드시 지고, 달 역시 차면 기우는 것처럼, 반드시 수그러들고 무너질 것이다. 무엇보다도, 저렇게 음행을 저지르고 다니는 작자를 굳이 황제로 옹립하기에는, 황실의 방계에도 우수한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니 헬리오스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도, 어디까지 황제 폐하의 총애에 기댈 수 있을 동안에 불과한 거다. 황후 폐하의 말씀은 맞았다. 하지만.

“폐하, 저는 헬리오스가 저를 노릴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아닙니다, 어린 처녀의 과한 근심이겠지요. 그가 제게 직접 접근한 일은 없습니다.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아무 일 없겠느냐.”
“…아무 일 없었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요.”
“…”
“제 근심이, 그저 어리석은 기우가 아닐 수도 있습니까.”
“그래.”

황후 폐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가까이 다가가, 그 앞에 한 무릎을 꿇고 앉았다. 황후의 하얀 손이 내 뺨을 쓰다듬었다.

“너는 장차 황후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아이지. 헬리오스같은 호색한이라면 아마도 네게도 눈독을 들일 테고.”
“외람되오나, 폐하. 저는 제가 부족함이 없기 때문에 그가 눈독을 들일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
“그가 야심 없이, 그저 여자들을 취하는 데만 뜻이 있는 호색한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런 말씀, 어떻게 생각하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말해보아라.”
“…조심스럽습니다.”
“하려고 시작한 말이 아니냐. 어디 한 번 해 보거라.”
“…”
“어서.”

황후의 표정이 다소 온화해졌다. 내가, 황후인 자신을 두려워한다 느낀 모양이었다. 그가 손을 뻗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는 내 막냇동생이 아니냐.”
“황공하옵니다.”
“너는 어릴 때부터 영리한 아이였지. 혼사가 정해지고 나면, 나와 너는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될 것이니, 그 전에 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여기까지 온 것이지. 그런 네가, 오후 내내 블루벨과 이야기를 나누고, 또 한참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이렇게 밤이 깊어서야 내게 털어놓는 이야기다. 필시 곡절이 있는 거겠지.”
“…폐하.”
“무슨 이야기냐.”

내가 대답하지 않고 뜸을 들이자, 황후의 표정이 천천히 굳어졌다.

“설마, 그 작자가 이미 네게…”
“그런 일은 없사옵니다. 다만…”

잠시 생각했다. 어떻게 해야 황후에게, 히카루 겐지의 이야기를 헬리오스의 이야기에 빗대어 말할 수 있을까.

꿈을 꾸었다거나 신탁을 받았다거나, 혹은 저잣거리에 도는 이야기라고 꾸며내어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최고의 자리에 오르도록 길러진 여성, 단순히 식견이 뛰어나고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잘 아는 정도가 아니라, 사교계와 권력의 흐름을 제 손바닥 안에 두고 쥐락펴락하는 그에게 있어, 그런 어설픈 변명은 설득력이 없을 것이다. 나는 입이 바싹 말라오는 것을 느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가 포이닉스 전하의 이모 되시는 수녀원장님께 몹쓸 일을 저질렀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귀부인들은 정말 그 입을 주체하지 못하는군. 그랬지.”
“외람되오나, 전 황태자비 전하이신 클로틸드 전하께서 당하신 치욕에 대해 들었습니다.”
“…블루벨이 그런 이야기를 하였다고?”
“제가 짚이는 바가 있어 물어 보았습니다. 레이디 블루벨은 제가 집요하게 캐어묻자 어쩔 수 없이 이야기한 것 뿐이니, 탓하지 말아 주세요.”
“…블루벨이, 다른 이야기도 하였니?”

황후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나는 내 머리를 자애롭게 쓰다듬던 손을 붙잡으며 머리를 숙였다.

“용서하세요, 폐하. 제가, 그간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 혹 그자가 황후 폐하께도 위해를 끼치려 한 것은 아니었을까 저어하여 물어 보았던 것 뿐입니다.”
“…실망하였니.”
“집에 도둑이 들었다고 해서 집주인이 잘못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방비를 잘 해서 도둑을 돌려보내신 거고요.”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구나. 그런데…”
“…저는 헬리오스가, 황실과 인연인 깊은 여성들을 자꾸 노리는 것이 신경쓰입니다. 그것도 주로 전 황후 폐하와 관련이 있는 사람들… 예, 어쩌면 그가 황실의 핏줄을 훔치려 하는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예요.”

그는 전 황후의 자매, 전 황태자비를 범했고, 감히 황후 궁에 숨어들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와 결혼한 바이올렛 헬리오스도 마찬가지다.그는 아마도 전 황후의 사촌일 것이다. 내가 조사한 위스테리아 후작 가문에 대한 내용과, “겐지 이야기”의 무라사키노우에의 이야기에 기반한 내 예상이 맞는다면.

“며칠 전 만나 본 어린 헬리오스 공작부인은, 에르도스 공작부인의 친척이었어요. 정확히는 에르도스 공작부인의 친정인 위스테리아 후작 가문의 사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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