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카니스 전 황태자 전하의…”
내가 중얼거렸다. 황후 폐하는 나직하게 탄식했다.
“아까운 사람이었지. 여러 면에서…”
“무예가 뛰어난 분이라는 말씀은 들었습니다만…”
“무예도 무예이지만, 성품이 호방하고 상황을 대국적으로 보며, 사람을 적재적소에 뽑아 쓸 줄 아는 사람이었지. 알카니스 황태자가 살아 있었다면 많은 것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가끔 생각한단다.”
그랬구나.
“폐하, 그래도 포이닉스 전하 역시 알카니스 전하만큼 뛰어난 분이시지 않습니까.”
“포이닉스도 그 나이 치고는 무척 뛰어나긴 하지. 그러니까 내 동생과 혼인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은 거란다.”
“어머나…”
“나는 그대나 우리 다이애나처럼 똑똑한 여자아이들을 좋아하지. 그대가 파혼당한 것은 안타깝지만, 솔직히 그대가 헬리오스에게 붙잡혀 인생을 망치지 않은 것은 기뻐.”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폐하.”
나는 알카니스 황태자를 실제로 만나 본 적이 없다. 그는 포이닉스 황태자보다 여덟 살 연상이었으니, 나와는 아홉 살이나 차이가 났다. 나의 맏언니가 열 일곱 살의 나이로 황후가 되었을 때, 그는 열 다섯 살이었다. 황후 폐하께는 고작 두 살 밖에 차이나지 않는 ‘아들’ 이었으니 불편했을 법도 한데, 황후께서는 의외로 알카니스 황태자에게 호의적이었다.
그런데 잠깐만, 알카니스 황태자는 결혼을 하지 않았던가?
딸도 하나 있었던 것 같은데? 그래서 황후께서는 스무 살도 되기 전에, 무려 손녀를 둔 할머니가 되어 버리셨을텐데 말이다.
내가 어떻게 된 일인지 생각하려 애쓰는데, 레이디 블루벨이 생긋 웃으며 먼저 말해주었다.
“아시다시피, 황태자비 후보는 한 사람이 아니니까요.”
그건 그렇다.
가문과 그 부모, 그리고 정치적 상황을 살펴 몇 명의 놀이 상대와 황태자비 후보를 정하지만, 성장하며 실제로 그 후보가 되는 아이의 역량에 따라 추려 나가, 열네 살 쯤 되면 후보를 두세 명으로 압축한다.
“저는 알카니스 전하의 비가 될 것이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고, 전하보다 마지막 한 사람까지 남았습니다만… 국왕 폐하께서는 로발칸 왕국의 클로틸드 전하를 선택하셨습니다.”
레이디 블루벨의 말대로였다. 알카니스 황태자는 우리 제국과 긴밀한 협력 관계를 맺게 된 로발칸 왕국의 공주와 혼인했었다. 일종의 결혼 동맹인 셈이다.
“저는, 그 결정에 대해서는 불만이 없었습니다. 황태자 전하의 결혼은 나라의 중요한 일이자, 때로는 외교적으로 단 한 번 쓸 수 있는 카드니까요. 애초에 황태자비 후보로 거의 최후의 두세 명 안에 들었던 여성은, 그만큼 훌륭한 신붓감이라는 말을 들으며 좋은 혼처를 찾곤 했기 때문에, 저희 레프트실드 가문에서도 그에 대해 폐하께 불만을 표한 적은 없는 것으로 압니다.”
말하자면 약혼식을 치르기 전 겪은, 첫 번째 파혼이나 다름없었지만, 레이디 블루벨은 나라의 일이라 생각하고 상황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황제는 레이디 블루벨에게 마치 알카니스의 대신인 양, 헬리오스와의 혼인을 내밀었다.
“제 아비는 그 혼담을, 폐하께서 한때 며느릿감으로 생각하셨던 저를 결코 잊지 않았다는 뜻으로 받아들였습니다만. 저는… 괴로웠습니다. 치욕적이었지요.”
“헬리오스 공작이… 폐하의 사생아라서요…?”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레이디 블루벨은 고개를 저었다.
“그 혼담에는 저라는 사람에 대한 생각은 조금도 담겨있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폐하께서는 저를 아드님의 반려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변경백 레프트실드 가문의 충성을 보장하는 담보물 같은 것이라 생각하셨고… 그리고 변경백 가문이 가장 사랑하는 아드님인 헬리오스 공작의 뒷배경이 되어 주기를 바라셨던 겁니다. 헬리오스 공작이 어떤 사람인지, 그 인품이나 여성관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은 채로요. 물론 세상의 정략결혼이라는 것은 대부분 그런 식으로 이루어집니다만, 성실한 알카니스 전하를 바라보던 제게 난봉꾼 헬리오스는 그야말로 원치 않았던 상대였습니다.”
그는 그저 설명하듯이, 별 감정을 담지 않고 침착하게 말했다. 나는 레이디 블루벨이 하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
도구가 되고 싶지 않다.
수단이 되고 싶지 않다.
황태자비가 되리라는 기대, 알카니스 황태자에 대한 마음은 단념할 수 있지만, 그 대신 ‘아무나’에게 하사되듯 주어지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적어도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상대이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런 레이디 블루벨에게 주어진 것은…
“어제 잠깐 보았을 뿐이지만… 얼굴만 예쁜 쓰레기 같았어요, 그 사람.”
“다이애나. 숙녀다운 행실과는 거리가 먼 말이구나.”
“그렇지만요, 열네 살 짜리 어린 신부를 벽화(wallflower)처럼 세워놓고, 자기는 혼자서 이 여자 저 여자에게 말을 걸며, 마치 자기가 주최한 무도회가 거대한 하렘이라도 되는 듯이 굴었다고요. 오죽하면… 제가 걱정이 되어서 계속 쳐다보았더니.”
“쳐다보았더니?”
“…어머님께서, 다른 부인들이 계신 자리로 부르셨어요.”
황후께서는 한숨을 쉬셨다. 레이디 블루벨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떤 분이셨나요, 공작부인은.”
“사실 잘 모르겠어요. 어떻게 대해야 할지 다들 모르시는 것 같았고…”
“그냥, 어떤 느낌을 받으셨나요.”
레이디 블루벨이 재차 물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이들의 사정을 너무 자세히 아는 것 같지는 않게 보이려 애쓰며 대답했다.
“…공작부인 자체는 나이에 비해 침착하고 심지가 굳은 분이었지만, 저는 그분이 피해자라고 생각했어요.”
***
“알카니스 전하께서 클로틸드 비 전하를 맞이하시기로 결정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레이디 블루벨은, 나와 함께 황후 궁의 후원을 거닐며 옛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장차 황태자비가 될 내가, 그간의 일에 대해 어느정도 알고 있어야 한다는 황후 폐하의 뜻이었다.
“황후 폐하께서는 저를 불러, 사교계에 데뷔하였으니 황후 폐하를 모시는 시녀가 되어 당분간 일에 전념하지 않겠느냐고 권해 주셨습니다.”
“공작과 약혼하신 뒤가 아니었군요.”
“예, 폐하께서는 이전부터 저를 아껴 주셨는데, 알카니스 전하의 일이 틀어진 이상 황후 궁에서 훌륭한 배필을 찾아 주시겠노라며 저를 부르셨지요. 하지만 한 달도 지나지 않아, 헬리오스 공작의 열 여덟 번째 생일이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황후 궁에 오셨던 황제 폐하께서는, 마침 차를 준비하던 제 모습을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침 헬리오스 공작과 나이도 맞으니, 둘이 혼인을 하면 좋겠다고요.”
“…대체.”
“그리고 헬리오스 공작의 열 여덟 번째 생일에, 저와의 약혼이 발표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약혼을 기뻐하지도, 저를 존중하지도 않았어요. 약혼식 날, 저는 커튼 뒤에서 그의 목소리를 들었답니다.”
“…뭐라고 그랬던 거예요.”
“하루종일 공부나 할 것 같은 재미없는 여자 따위와 재미없다, 남의 여자라면 공략하는 즐거움이라도 있을 텐데, 열 여덟 살에 약혼이라니 고리타분하고 괴롭다. 그런 이야기를 자신의 풋맨과 농담처럼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둘이 키스하더군요.”
“엇…”
“세간에는 그의 여성 편력만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성별을 가리지 않는다고 봐야겠지요.”
“…”
“그런 표정 하지 마세요, 황후 폐하께서도 아시는 일이니까요.”
“죄송해요, 제가 공연히 괴로운 기억들을 떠올리게 해서.”
“제가 괴로워 보이나요, 레이디 다이애나.”
그건 아니었다.
레이디 블루벨에게는 괴로운 일이 될 것이라 생각했지만, 지난 이야기를 하는 내내 그의 표정은 평화로웠다. 내 멋대로 하는 생각인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그는 헬리오스에게 파혼당하고, 그가 결혼을 하는 동안, 자신의 속내에 대해 누구에게도 제대로 털어놓지 못한 것을 답답하고 괴롭게 여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역시 레이디 블루벨을 통해 내게, 그간의 이야기를 들려주게 하신 것은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털어놓아야 할 사람과 그간의 사정을 알아야 할 사람을 딱 맞게 연결해 준, 최적의 인선이라고 하는 거겠지.
역시 황후 폐하시구나, 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거기까지는 그럴 수 있는 일이었어요. 세상에는 정략 결혼을 한 부부도, 또 소위 가면 부부도 적지 않았고, 저는 헬리오스 공작부인이 되어 계속, 황후 폐하의 시녀로 일하면 된다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헬리오스 공작은 계속 저와의 혼인을 미루었습니다. 궁에서 황후 폐하의 곁에 머무르는 동안에도, 그의 음행에 대한 이야기는 계속 제 귀에 들어왔어요. 어느 지방관의 아내를 겁탈했다거나, 돌아가신 전 황후 폐하의 언니가 되시는 수녀원장님이 헬리오스 공작에게 당하고 그 죄를 보속하기 위해 순례 길에 오르셨다거나.”
“잘못은 헬리오스 공작이 했는데, 보속은 수녀원장님이 하셨다니…”
“여자의 죄라는 거죠. 자기 몸을 지키지 못했다는.”
건조하고 씁쓸한 목소리였다.
“그분도 사람이셨으니, 한 순간의 유혹에 마음이 흔들리셨던 것이겠지만… 그 모든 것이 헬리오스 공작에게는 세상에 떠벌일 영웅담이 되고, 수녀원장님은 웃음거리가 되셨지요. 하지만 그 일로, 헬리오스 공작은 한동안 외국으로 추방당했습니다.”
“황제 폐하께서도 그 일의 진짜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는 아셨던 것이었군요.”
“아뇨, 수녀원장님께서 전 황후 폐하, 포이닉스 전하의 모후 되시는 분의 자매셨기 때문이에요. 벌하지 않는다면 포이닉스 전하의 명예에 누가 된다고 여기신 것이었지요. 헬리오스 공작이 돌아온 것은 그 뒤, 알카니스 전하께서 불행한 낙마 사고로 돌아가신 직후였어요.”
역시 레이디 블루벨은 히카루 겐지의 정실, 아오이노우에였다. 홍휘전 여어가 자신의 아들인 스자쿠 황태자의 비로 삼으려 했으나, 기리츠보 덴노가 히카루 겐지와 혼인시켰던 좌대신의 딸. 황태자의 자신보다 어린데다, 신하의 위치로 격하된 겐지와 혼인했다는 사실에 실망했던 사람. 혼인한 아내인 자신을 내버려두고 수많은 여자들 사이를 떠도는 겐지를 보면서도 홀로 외로워했던 긍지높은 사람, 그리고 쓸쓸히 죽어간 사람.
나는 레이디 블루벨이, 아오이노우에처럼 결혼하지 않아서, 그리고 죽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그가 황후 폐하의 시녀로서든, 혹은 다른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해서든, 이 세계에서 얻은 새로운 기회를 붙잡고 행복해지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렇다면, ‘전 태자의 아내’였던 로쿠죠노 미야스도코로는 어디로 간 걸까.
알카니스 황태자와 혼인했던 클로틸트 황태자비는, 그가 세상을 떠난 뒤 본국으로 돌아갔다. 알카니스 황태자와의 사이에는 딸이 있었다고 들었지만, 달리 들은 바가 없는 것을 보면 어머니를 따라 로발칸 왕국으로 돌아갔는지도 모른다.
다른 왕자도 아니고, 황태자의 딸까지 낳은 황태자비를 그렇게 쉽게 돌려보내는 경우도 있었나?
어쩐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물었다.
“클로틸드 비 전하께서는… 어떻게 되셨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