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갑자기 알현이라니, 뜻밖이로구나.”

나의 언니인 황후 폐하께서는, 어머니보다 더 위엄있는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걸었다. 나는 머리를 조아린 채, 황후께서 일어나라고 명하실 때 까지 기다렸다. 잠시 후, 머리 위에서 나직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약혼을 앞두더니, 제법 어른스러워졌구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언니, 하고 뛰어와서 안기기부터 하던 아이가.”
“어린 시절의 일이옵고, 사교계에 데뷔한 이상 더는 그럴 수 없지요.”
“일어나거라, 모처럼 황후 궁에 왔으니 내 말벗도 해 주고, 재미있게 놀다 가렴.”
“명 받들겠습니다.”

무도회에서 돌아오자마자, 황후 폐하께 독대를 신청한 것이 사흘 전의 일.

그리고 황후 궁에서 곧, 알현 허가가 떨어졌다.

“너 혼자서 황후 폐하를 뵙는단 말이냐. 아무리 사가에서야 자매간이라고 하지만, 그분은 이 나라의 지존이시란다.”

어머니와 함께가 아니라, 나 혼자라는 사실에 어머니는 적잖이 걱정하셨지만,

“그렇기 때문에 지금, 폐하를 알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 혼자서야.”
“어째서냐.”
“곧 약혼을 하고, 또 혼인을 하고 나면 저는 황태자비가 될 테니까요.”

…내가 설명하자, 곧 납득하셨다.

“제가 황태자비가 되고 나면, 황태자 전하는 언니의 의붓아들이니 황후 폐하와 저는 이제 언니와 동생이 아니라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되는 것이죠. 자매간에, 마음을 터놓을 기회는 지금 뿐이라고 생각해요. 저도 언니도, 어머니의 딸이니까요.”
“네가 혼인을 한다고 해서, 황후 폐하와 네가 자매간이라는 사실마저 변하지는 않는단다.”
“알고 있어요. 하지만 옛말에 권력은 아들과도 나누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성년이 되고 혼인을 한 황태자 전하는, 황제 폐하와의 권력 관계와 자신의 위치를 저울질해야 할 것이에요. 그렇게 되면 황후 폐하와의 관계가 미묘해지겠지요.”

어머니는 뜻밖이라는 듯, 내 얼굴을 한참 뜯어보셨다.

“내가 너희 자매들에게 역사와 정치에 대해서도 남의 집 아들들 못지 않게 가르치긴 하였다만, 아직 어린 네가 이렇게까지 깊이 생각하는줄은 몰랐구나.”
“황태자비가 될 사람으로 길러 내셨는걸요.”

나는 미소지었다. 어머니는 잠시 생각하다가, 내 어깨를 쓰다듬으며 한숨을 쉬셨다.

“그렇지 않아도 이 혼인으로, 네 아버지의 야심이 도가 지나쳤다고 수군거리는 이들이 적지 않단다.”
“알고 있어요. 어제는 어머니의 체면을 보아, 제 앞에서 대놓고 말하지 않았을 뿐이죠.”

황태자비가 될 수 있는 것은 인근 나라의 공주, 혹은 공작가와 일부 공신 가문의 딸들이었다. 그리고 우리 집안 외의 공작가와 공신 가문들에도 혼기의 딸들은 있었다. 당연히, 그 자리를 노리는 가문들 사이에서 말이 나왔을 거다. 왕비 자리에 이어 황태자비 자리까지 노린다고. 자매를 나란히 황실에 여읜다는 것이, 큰딸은 황제와 혼인시키고, 막내딸은 그 의붓아들인 황태자와 혼인시킨다는 것이, 얼마나 과한 욕심이냐고.

물론 내가 생각해도, 이 세계에서의 내 아버지, 서룬도라스 공작은 권력 욕심이 과하긴 했다. 결혼으로 얻은 공작위라 더 책임감을 느끼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공작 가문의 권력을 확장하기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사실 원작이 되는 “겐지 이야기”에서의 관계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겐지 이야기”의 우대신은, 맏딸을 덴노의 비로 삼고, 그가 낳은 황태자 스자쿠가 장성하자 여섯째 딸을 다시 스자쿠와 혼인시키려 했으니까.

이렇게 생각하니 더욱, 내가 논문까지 쓴 이 천년 전의 이야기라는 것이, 더욱 감당 안 되는 막장드라마처럼 느껴져서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 여섯째 딸에 해당되는 사람이, 이쪽 세계에서는 바로 나라는 것까지 생각하면, 더 할 말이 나오지 않을 일이었다.

어쨌든 내가 예상할 수 있는 앞으로의 모든 일들을 막기 위해서, 나는 황궁으로 향했다.

그것이 오늘 오전의 일이었다.

파란 하늘 아래, 새하얀 대리석으로 지어진 황후 궁은 그 자체로 한 마리 백조처럼 우아했다. 황후 궁의 시녀들은 넓은 잔디밭에 차양을 치고, 느긋한 분위기의 티타임을 준비했다.

그리고 그들 중, 유난히 돋보이는 사람이 있었다.

차분한 먹빛 머리카락과 새파란 눈동자. 바로 좌대신의 딸 아오이노우에… 가 아니라, 재무대신 레프트실드의 딸, 레이디 블루벨 레프트실드였다.

“아, 저 분이…”
“…너도 이야기를 들은 모양이구나.”
“예, 헬리오스 공작가의 무도회에 다녀왔으니까요.”

나는 나직하게 대답했다, 황후께서 고개를 끄덕이셨다.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많이 하든?”
“제가 들을 만큼은요.”

황후께서는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았다. 그 불편한 침묵 속에, 레이디 블루벨에 대한 걱정과 애정, 그리고 함부로 소문을 퍼뜨리는 이들에 대한 경멸이 느껴졌다.

“…헬리오스 공작부인을 만났어요.”
“그랬구나.”
“저보다 두 살이나 어려, 올해 열네 살이라더군요.”
“…”
“뭐 그런 놈이 다 있죠.”
“…다이애나.”
“어디 가서 함부로 그런 말을 해선 안 된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그 사람은 이전에도 수많은 여자들을 강제로 취했다고 들었는데, 열네 살 밖에 안 된 어린 아가씨를…”
“그런 것은 네가 함부로 넘겨짚어 상상할 부분은 아니야.”
“알아요, 폐하. 하지만 제가 황태자 전하와 혼인한다면, 헬리오스 공작은 그분의 이복형이니 저는 좋든 싫든 공작부인과 자주 얽히게 되겠죠. 그리고…”

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지금부터 내가 하려는 말은 황후 폐하의 심기를 단단히 거스를 수도 있었다. 아직까지는 ‘철없고, 갓 사교계에 데뷔해 세상 물정을 모르는, 똑똑하고 의협심 강하지만 아직 경험치가 많이 부족한 동생’으로 밀고 나갈 수 있다는 것만이 희망이었다.

“…두 분 폐하께서 헬리오스 공작의 ‘엽색’을 내버려 두시는 연유가 궁금하였습니다.”
“내버려 둔다? 그러기에는 이미 몇 번이나 벌을 내렸지.”
“국경에 보내고 외국에 사신으로 보내고… 고생스럽다면 고생스럽겠으나 그에게는 벌이라고 할 만한 일도 아니었지요. 그런데다 그렇게 밖으로 내보낼 때 마다, 또 다른 여자들에게 두루두루 마수를 뻗지 않았습니까. 듣기에는 가을 궁전의 시녀에게도 손을 대어 임신을 했다는 이야기가 들려 오던데요.”
“…너는 정말, 사교계 나간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한 십 년쯤은 사교계의 중심에 있었던 것처럼 말하는구나.”
“황제 폐하께서 묵인하고 계시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습니다.”
“더 말해보거라, 네가 생각하는 바를.”
“그에게 제위를 두고 황태자 전하와 경쟁할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한 대신, 여자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눈 감아주마, 그리 하신 것이 아닌가 생각하였습니다.”
“…”
“아닙니까.”
“폐하라면야 그러실 수 있지만, 나는 아니란다.”

황후께서는 한 손을 가볍게 들며 미소지었다. 레이디 블루벨이 가까이 다가왔다.

“생각해 보렴, 황태자 전하는 나의 친아들도 아니고, 나와는 어머니와 아들이라기보다는 누나와 막냇동생 정도밖에는 차이가 나지 않아. 내가 황태자 전하를 위해 굳이, 그런 일을 해 가며 인심을 잃을 이유가 있겠니.”
“그건… 그렇지만요.”
“무엇보다도 나의 소중한 블루벨을, 그런 식으로 슬프게 하도록 내버려두진 않아.”
“폐하.”

레이디 블루벨이 황후 폐하께 무릎을 굽혀 절했다. 황후께서는 그에게 한 손을 맡기며, 나를 바라보셨다.

“이전에도 어머님을 따라 황후 궁에서 지내다 갔었지만, 정식으로 한 번 인사를 하는 게 좋겠군. 내 동생, 다이애나라네. 올해 사교계에 데뷔했지.”
“레이디 다이애나.”
“레이디 블루벨. 황후 폐하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레이디 블루벨이 내게도 절하자, 나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마주 절을 했다. 황후께서는 흡족한 듯 레이디 블루벨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내 동생이 어제, 헬리오스의 무도회에 갔던 모양이야.”
“그러셨군요…”
“사교계의 귀부인들이 그대와, 또 소문의 어린 공작부인을 두고 이러쿵 저러쿵 말이 많았던 모양이지. 그대도 알다시피 내 동생은 머지않아 황실의 일원이 될 사람이다보니, 그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걱정하더군.”
“저는 괜찮습니다, 황후 폐하, 그리고 레이디 다이애나.”

레이디 블루벨은 약혼 후 4년동안 결혼을 미루어 오다가 마침내 파혼당한 사람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더없이 침착하고 평온한 모습으로 내게 말했다.

“지금까지 살아오며, 저는 지금처럼 평온했던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평온하다고요…?”
“사람들이 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들으셨겠지요. 헬리오스 공작에게 파혼당하다니, 가엾게도. 시집은 제대로 갈 수 있을까.”
“…그건.”
“황후 폐하 곁에만 머무르고 있는 제 귀에도, 세간의 소문들은 들어온답니다. 하지만 저는 정말로 괜찮아요. 헬리오스 공작과의 약혼 기간 동안이야말로, 저에게는 번뇌와 고통만이 가득한 시간이었으니까요.”
“번뇌와 고통이라고요…”
“예.”

레이디 블루벨이 엷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정말로 아름답고, 완벽한 기품을 지닌 여성이었다. 엄격하신 언니, 황후 폐하의 최측근으로 지내는 것을 보면 언행이나 학식 역시 뛰어날 것이었다. 내가 그에게 관심을 보이자, 황후께서는 레이디 블루벨에게 의자를 권하셨다.

“내 누이가 그대와 가까워진다면 나도 기쁘겠네.”

시녀들과 하녀들이 새 다과를 갖추어 왔다. 레이디 블루벨은 황후의 시녀가 아닌, 이 자리의 또 다른 손님으로 앉아, 나와 한참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궁중의 예법에 두루 밝았고, 황태자비의 역할이며, 황궁에서의 온갖 복잡한 절차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저도 준비를 많이 하였다고 했습니다만, 부끄럽습니다. 레이디 블루벨 같은 분이야말로, 황태자비의 중임에 더 어울리실 텐데.”
“저 역시도 준비해 왔으니까요. 황태자비가 될 날을.”

레이디 블루벨은 부드러운 미소로 답했다. 나는 당황하여 황후 폐하와 레이디 블루벨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근심하실 만한 일은 아니랍니다. 포이닉스 전하의 반려가 되리라는 마음으로 가르침을 받았던 것은 아니니까요.”
“그렇다면…”

나의 머릿속이 급박하게 돌아갔다.

설마 이 사람은, 히카루 겐지의 정실인 아오이노우에가 아니었던 거였나?

내 머릿속에 겐지의 여러 연인 중, 죽은 전 황태자의 부인이었던 사람, 로쿠죠노 미야스도코로가 떠올랐다. 성숙하고 학식이 높은 귀부인이었지만, 겐지에 대한 사랑과 다른 여성들에 대한 질투로, 끝내 생령이 되어 다른 여성들을 죽이고 말았던 사람. 여기 레이디 블루벨은 결코 미야스도코로같은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황태자비’가 포이닉스 황태자의 반려를 뜻하는 말이 아니라면, 남는 사람은 한 사람이다.

이미 세상 떠난 알카니스 황태자의 반려…

나는 레이디 블루벨을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입술을 달싹였다. 그는 나의 입술이 움직이는 것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저는 본래 알카니스 전하의 반려가 될 것이라는 말을 들으며 자라났어요. 그 악명 높은 헬리오스 공작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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