겐지 이야기.
천년 전, 일본 헤이안 시대의 궁녀 무라사키 시키부가 쓴,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심리 소설이자 장편 소설. 헤이안 시대의 화려하고 우아한 귀족 문화와, 인생무상이라는 불교 사상이 담긴 이야기…
…라는 것은 학자들이나 하는 이야기고, 사실 지금 겐지 이야기를 다시 읽을 때 느껴지는 건 “히카루 겐지, 이거 대체 뭐 하는 놈이야.”다. 그의 아버지는 기리츠보 덴노이니, 히카루 겐지는 덴노의 아들이다. 어머니인 기리츠보 갱의는 덴노가 가장 총애한 후궁으로, 이야기를 읽을 때는 여어나 중궁과 같은 다른 여성들에 비하면 신분이 낮다고 묘사되지만, 사실 여어는 3품 이상 당상관의 딸이 입궁했을 때 받는 품계이고, 기리츠보 갱의도 3품 대납언의 딸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다른 형제가 없어 뒷배경이 없을 뿐 입궁하여 후궁이 되는 데는 부족함이 없는 명문가 출신이었다.
한 마디로 천부적 금수저인데도, 배경이 워낙 화려하다 보니 시작부터 뭔가 불우한 황자라는 느낌을 준다. 그래놓고는 고려인 점술사의 말이라든가, 이런저런 핑계를 대어 황자가 아니라 겐지 성을 내려 신하로서 살게 한다. 하지만 히카루 겐지가 아버지의 또 다른 후궁인 후지츠보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은 다음다음 덴노가 되고, 정실인 아오이노우에와의 사이에서 낳은 유기리는 태정대신이, 스마로 유배를 갔다가 만난 아카시노키미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은 황후가 되는 등, 그는 신하로서 덴노보다 더한 영화와 권세를 누리며 살아간다.
…그리고 이것이 아마도, 지금 이 세계를 구성하는 배경 스토리인 거겠지.
그 주인공은 바로 저, 헬리오스 공작일 테고.
“…세상에 떨어질 로판이 없어서.”
생각할수록, 처음부터 알아채지 못했다는 게 기가 막혔다.
하긴, 배경이 천년 전 헤이안 시대가 아니라, 전형적인 로맨스 판타지의 단골 배경인 가상의 유럽 로코코풍 궁중이고, 히카루 겐지 아닌 헬리오스 공작이라는 이름으로, 문자 그대로 빛을 뿜어내는 듯한 화려한 금발을 휘날리며 돌아다니니 어쩔 수 없는 일인가.
그리고 배경이 이렇게 바뀐 이유도, 어쩐지 납득이 갔다.
내가 전공자라서 그렇게 된 거다.
사시누키와 가리기누, 여기에 운두가 높은 모자인 다테에보시까지 갖춘 남자들의 의상이야 그렇다고 치자. 내가 헤이안 시대에 떨어지면 기본이 열두 겹을 겹쳐 입은 쥬니히토에일 텐데. 무거워서 그런 것을 입고는 꼼짝도 못 할 것이다. 그런데다 헤이안 시대의 고귀한 사람들이라면, 기본적으로 오하구로라고 해서 이를 검게 물들이고, 히키마유라고 해서 눈썹도 밀어낸 뒤 이마 쪽에 점을 찍듯이 그렸을 테지. 아무리 절세 미남이라도 그런 모습이라면, 역시 현대인인 내 관점에서는 싫을 것 같다. 나 역시, 아버지가 좌대신이니까 덴노의 후궁이 되어라, 하고 대뜸 궁으로 보내졌을 테고. 옷이 무거워서 도망도 치지 못하는 채로 그 엽색가에게 당하고 말았을 테지.
이런 적당하게 편리한 가상의 유럽 왕실이라면야, 어떻게든 다른 방법도 찾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어쨌든, 고전 속에서야 나름 수많은 시를 짓고 우아하게 굴었다 보니 좀 나았지만, 현실에서 저런 놈을 직접 보고 있으려니 무척 짜증이 났다. 헬리오스 공작 놈보다, 어린 나이에 그와 결혼하게 된 공작부인에 대해 사람들이 더 떠들어대는 것도 그렇고.
“정말 말세야. 어떻게 된 거야. 저 색욕마인 새끼가 버젓이 몸을 굴리고 돌아다니는 세계라니.”
“다이애나?”
“아… 어머니.”
나는 얼른 입을 가리며 내 어머니, 서룬도라스 공작부인을 돌아보았다. 어머니는 고개를 살짝 갸웃하다가, 내가 조용히 미소짓자 아무것도 못 들었다는 듯 다가와 내 옆에 나란히 섰다.
“아, 저…”
“에일윈 후작부인과 이야기를 나누더구나.”
“예, 그리고 에르도스 공작부인께서 자리로 초대해 주셨는데.”
“뭐라고 대답했니?”
“어머니께서 오시면 같이 찾아뵙겠다고 말씀드렸어요.”
“잘 했다. 그리고 에일윈 후작부인에게는 좋은 점도 많지만, 기본적으로 말이 많은 사람이란다. 무슨 뜻인지 알겠니?”
“예, 특히 말 실수하지 않도록 조심하겠습니다.”
“그래, 하지만 우리가 꼭 들어야 하는 소문이 있거나, 우리가 사람들에게 소문내야 하는 일이 있다면 그보다 더 믿음직스러운 사람도 없지. 자주 애용하려무나.”
어머니는 부채 끝으로 턱을 건드리며 당당한 웃음을 지었다. 사람을 애용한다거나, 이용한다는 말이 영 거북했지만, 그가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하는지는 정확히 알아들었다.
나는 이곳에서 서룬도라스 공작부인의 막내딸이었고, 나와 어머니의 나이 차이는 다른 모녀들보다 많이 나는 편이었지만, 어머니는 이곳에 모인 누구보다도 당당하고 꼿꼿한 사람이었다. 그럴 수 밖에. 자기 나름대로는 제국 사교계를 주름잡는다는 부인들이라 해도, 제국 사교계의 정점은 황후 폐하였다. 그리고 황후 폐하는 나의 큰언니, 우리 집안의 장녀였다. 어머니는 황후가 된 언니를 필두로, 딸들을 공작부인이나 주변 나라의 왕비, 대공비로 보냈다. 그리고 나는 어머니가 16년동안 공들여 길러낸 최후의 무기, 곧 다음 보위를 이을 황태자의 반려였다.
“다이애나.”
“예, 어머니.”
“네가 태어났을 무렵에, 사람들은 그렇게 말했단다. 서룬도라스 공작부인의 아들 낳는 솜씨는 본받지 말라고. 딸만 여섯을 내리 낳으니, 아들 낳는 것 말고는 다른 재주도 없는 이들이 내가 돌아서기만 하면 그렇게 조롱을 하곤 했지.”
“…정말 너무해요.”
“뭐, 틀린 말은 아니지 않으냐. 결국 아들은 태어나지 않았으니. 네 육촌 오빠인 클라우스를 양자로 들여 공작가의 명예에 부끄럽지 않게 길렀다만, 내가 내 속으로 낳은 자식은 아니지 않니.”
“아버지께서 달리 애첩을 두시지도 않으셨고요.”
“얘야, 그건 애정이라기보다는 권력의 문제란다. 네 아버지가 데릴사위가 아니었다면, 과연 지금처럼 정숙하게 굴었겠니? 따지고 보면 내가 딸만 낳은 것도 내 탓은 아니란다. 우리 집안은 원래 손이 귀했어. 딸이라도 여섯이나 낳은 나는 많이 분발한 거란다.”
나는 농담처럼 자신의 지난 날들을 이야기하는 어머니에게 바싹 다가가 살며시 팔짱을 끼었다. 서룬도라스 공작가의 외동딸로 태어난 내 어머니, 공작부인은 젊은 시절 알아주는 여장부였고, 가문의 방계 미혼남 중 가장 똑똑하고 강한 남자와 결혼했다. 그렇게 서룬도라스 공작이 된 내 아버지는, 타고난 권력욕으로 집안의 이름을 드높이고, 어머니의 결정에 따라 여섯 딸들을 가장 높은 자리로 밀어올리는 데 힘썼다. 아마도 그는 남성 권력자가 누릴 수 있는 온갖 향략을 다 맛보고 누렸겠지만, 여자 문제만은 만들지 않았다. 그것이 어머니에 대한 애정과 자신이 누리는 권력의 원천에 대한 신의 중 어느 쪽이든 간에, 나는 서룬도라스 공작의 그런 점은 마음에 들었다.
“어머나, 에르도스 공작부인.”
“서룬도라스 공작부인, 와 주셨군요.”
어머니가 에르도스 공작부인의 자리로 가자, 공작부인을 비롯하여, 이곳의 한다 하는 여자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어머니를 환대했다. 귀부인들은 어머니의 드레스를 칭찬하고, 나를 칭찬하고, 이번 혼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아버지가 담판을 지은 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는 그런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이고, 간간히 고개를 끄덕이고, 겸손한 미소를 지으며 예의바르게 굴었다. 하지만 내 머릿속은 계속, 다른 곳으로 향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보랏빛 눈동자에 검은 머리카락을 한 소녀였다.
헬리오스 공작이 자기 입으로 ‘운명의 연인’이라 말했다는 저 어린 공작부인은, 마치 외톨이처럼 벽쪽에 혼자 서 있었다. 그를 혼자 내버려 둔 채, 헬리오스 공작은 홀로 커다란 돛을 단 배처럼 유유히 사람들 사이을 누비고 있었다.
나쁜 새끼.
나는 어금니를 깨물었다. 이가 갈릴 수 밖에 없다. 저 뒷배경 없는 어린 공작부인이야말로 히카루 겐지의 가장 총애받는 부인이자 영원한 연인이었던 무라사키노우에일 테니까.
히카루 겐지가 처음 사랑했던 것은, 아버지의 후궁이었던 후지츠보였다.
그는 거부하는 후지츠보와 억지로 동침하고, 후지츠보의 조카 뻘이 되는 어린 무라사키를 그 유모와 함께 유괴하여 자신의 저택에 둔다. 무라사키는 원래 후지츠보의 오빠인 효부쿄노미야의 딸이었는데, 정실 소생이 아닌데다 그 생모가 일찍 죽어 외가에 맡겨져 있었다. 히카루 겐지는 무라사키가 후지츠보와 닮은 것을 보고, 그 아버지인 효부쿄노미야에게는 알리지도 않은 채 저택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무라사키가 열네 살이 되던 해, 본부인인 아오이가 죽자마자 무라사키와 억지로 동침하고 부인으로 삼았다.
헬리오스 공작이 히카루 겐지라면, 저 공작부인의 사연 역시 무라사키와 비슷할 터.
그나마 히카루 겐지의 본부인인 아오이와 달리, 레이디 블루벨이 그와 결혼하지도 않고, 죽지도 않았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그런데 레이디 블루벨은, 이번 일에 대해 정말 아무 말도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귀부인들은 곧, 헬리오스 공작에게 파혼당한 레이디 블루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글쎄요, 황후 폐하께서는 당분간 레이디 블루벨에 대해 억측같은 것은 하지 말아 달라고 하셨습니다.”
“아아, 황후 폐하께서는 역시…”
“비록 파혼을 당했다고는 해도, 이건 어디까지나 상대가 나빴던 거지요. 공연히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것이 레이디 블루벨에게는 더 독이 될 거라는 말씀이셨습니다.”
“레이디 블루벨은 황후 폐하의 총애를 받는 아가씨인데다, 대대로 재상을 지낸 명문 레프트실드 가문의 따님이지요. 약혼을 했다고 해도 헬리오스 공작이 손을 댄 것도 아니니, 좋은 혼처를 찾아 상처를 잊고 결혼하면 좋겠네요.”
“그런데 남자들 생각은 또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아요.”
“무슨 말씀이신가요, 부인.”
“그렇게 여자를 밝히는 헬리오스 공작이 정말 아무 짓도 하지 않았을까요?”
“그 일이라면 헬리오스 공작과 레이디 블루벨 모두 똑같이 말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지난 번 무도회에서도 신사들이 모여 그런 이야기를 했다고 해요. 그 헬리오스 공작이 손도 대지 않았다면, 오히려 여자로서는 문제가 있는 게 아니냐 하고.”
“대체 어떤 작자들이 그런 망발을 늘어놓는답니까. 그런 부류는 신사라고 불러 주어서도 안 돼요.”
“아아, 남자들은 어쩌면 그리 천박한가… 남의 재난을 두고 그런 농담이나 주고받는다니.”
귀부인들은 차를 마시며 한탄했다.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이 세계에서 나의 위치에 대해.
나는 이 세계에서 일이 돌아가는 방식을 어느정도 알고 있다. 그러니 히카루 겐지, 아니 헬리오스 공작이라는 자연재해에 휩쓸리지 말고, 우선은 나 한 사람이라도 무사히 평온하게 살아가야 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다 될 문제도 아니겠지.
나는 여전히, 혼자 서 있는 어린 공작부인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전공자로서 이 세계에 떨어진 이상, 가급적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여자들을 저 색욕마인의 마수에서 구하고 말겠다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