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리오스 공작가의 무도회는 사람들의 이야기만큼 흥미롭지는 않았다.
아니, 객관적으로 흥미롭지 않다는 것은 아니었다. 호화로운 저택과 화려한 드레스, 어지간한 영지의 1년 수입에 맞먹는다는 보석들, 온갖 진귀한 음식과 미주. 그리고 무엇보다도 헬리오스 공작이라는 인물 자체가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은 분명했으니까. 폐하의 공식 정부이자 ‘영원한 연인’으로, 평생 다른 남자와 혼인하지 않고 살다가 병에 걸려 회복이 어렵게 되자 아들을 남기고 수도원으로 물러난 저 레이디 로즈마리의 아들. 그 어머니를 쏙 빼닮은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자신의 안식처를 찾아 수많은 사랑을 했던 헬리오스 공작이 마침내 운명적인 사랑에 빠져 공작부인을 맞아들였다는 이야기만으로도, 사람들은 열광했으니까.
아니, 헬리오스 공작가의 무도회는 흥미로웠을 터다. 문제는 바로 나였다. 사람들이 무도회에서 기대하는 역할을 단 한 가지도 수행해서는 안 되는, 바로 내가 문제였다.
황실이나 공작가문의 무도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사람들이다. 이 자리에 나오는 사람들, 이 자리에서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들, 그야말로 [콘텐츠]라고 불러야 할 만한 것들은 전부, 춤을 추고 드레스를 뽐내는 것이 아니라 이 자리에 모이는 사람들에게 있었다.
먼저 약혼자를 찾는 영애들이 있었다. 사교계에 데뷔하고 아직 약혼자가 없는 이들 젊은 여성들은, 세 시즌 안에 약혼자를 찾지 못하면 결혼할 기회를 영영 얻지 못할 것처럼 조바심내며 부지런히 무도회마다 얼굴을 내밀었다. 그런 불안은 어느정도 사실이다. 그해 사교계에 데뷔한 여성들 중 가장 화제가 된 소녀, 두 분 폐하나 황태자 전하께서 인정한 아름답고 훌륭한 재녀들은 대개 사교계가 시작되고 첫 시즌이 지나기 전에 여러 건의 청혼을 받고, 그 중에서 가장 훌륭한 남성과 약혼하며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지만, 그렇지 않은 여성들은 적어도 세 시즌 약혼자를 만들지 못하면 뭔가 하자가 있는 사람이라는 취급을 받곤 했다.
하지만 이런 무도회에, 불안해 하는 영애들과, 이제 슬슬 신붓감을 찾으라는 압력을 받고 있는 영식들만이 모이는 것은 아니다. 무도회의 또 다른 한 축은, 불륜 상대를 찾으려는 이들이었다. 가문의 뜻에 따라 나이 많은 남성과 결혼을 하고 3, 4년 정도 지난, 이미 후계자를 한둘 쯤 낳아 의무를 다했지만, 아직은 젊디 젊은 귀부인들은 ‘후원자’라는 명목으로 젊고 재능있는 남자들을 애인으로 삼고 싶어했다. 한편 미혼 여성과의 교제는 결혼을 전제로 해야 하다 보니, 부담없이 사랑 놀음만 하고 싶어 하는 젊은 남성들이 이들이 있었다. 이들은 때로는 하룻밤 불장난을 찾고, 때로는 진지하고 위험한 연애에 몸을 맡기기 위해 무도회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섞여들었다.
하지만 혼기의 처녀들도, 진정한 사랑을 꿈꾸는 젊은 유부녀들도, 무도회의 진정한 주인공은 아니었다. 이곳의 진짜 주인공들이란, 나이가 지긋한 귀부인들이었다. 그 귀부인들의 남편들이 정치를 하고, 군사를 이끌고, 외교를 하고 있을 때, 이들은 무대의 뒤에서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거나 갈라놓으며, 국사라는 큰 무대를 체스판삼아, 수많은 사람들을 폰과 비숍과 나이트 삼아 밀고 당기며 세력을 구축하고, 나라를 움직였다. 그리고 바로 지금, 적어도 오늘 이 무도회에서 저 사람들이 가장 주목하는 미혼의 영애는 바로 나였다. 사교계에 데뷔하기도 전에 황태자 전하와 혼담이 오가고, 바로 열흘 전에 조금 이르게, 사교계에 데뷔하며 황태자 전하와의 약혼 날짜까지 잡힌 바로 나, 다이애나 서룬도라스 말이다. 그들은 아마도, 사교계에 데뷔하기도 전부터 황실과의 혼담을 주고받은 나의 아버지, 서룬도라스 공작의 야심에 대해 수군거리고, 내가 어떤 추문이라도 일으키지 않을까 주목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자신이 무도회의 주인공인 양 한껏 치장하고 뽐내며 무도회에서 꽃처럼 피어나듯 춤을 추는 수많은 영애들을 그저 구경만 할 뿐, 이곳에서 아무 짓도 하지 말고, 저 귀부인들에게 인사나 잘 하며 흠잡히지 말아야 하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
그럴 거라면 아예 무도회 같은 곳은 오지 않았어도 좋았겠지만.
“안녕하세요, 레이디 다이애나.”
사교계에서 중요한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저 평판이었다.
“안녕하세요. 에르도스 공작부인.”
“어쩜, 정말 갓 피어나는 꽃도 부끄러워할 아름다움이네요. 마치 황후 폐하의 옛날 모습을 보는 것만 같아, 이 늙은이의 마음이 오랜만에 설레었답니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사교계에 데뷔하고 첫 무도회인데, 설마 혼자 온 건가요? 우리 쪽으로 와서 함께 이야기라도 나누면 어떠신지.”
“감사합니다, 부인. 지금은 잠시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아아, 공작부인께서. 무도회에는 한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는데, 사랑하는 막내따님이 사교계에 데뷔한 만큼 오랜만에 그 모습을 뵙겠군요.”
“예, 부인. 어머니께서 돌아오시면 함께 찾아 뵙고 인사드리겠습니다.”
“그래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아직 부족함이 많습니다만 모쪼록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아참, 혼담이 오가고 있다고 해서, 너무 고리타분하게 굴 필요는 없어요. 자신이 얼마나 매력적인 아가씨인지,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는지를 황태자 전하께서도 아실 필요가 있답니다.”
글쎄요, 과연 그럴까요.
나는 미소를 지으며 에르도스 공작부인께 공손히 절했다. 그럴 리가 없지.
내 아버지, 서룬도라스 공작은 내가, 나를 물어뜯을 준비로 넘쳐흐르는 저 귀부인들 사이에서 평판을 드높이고 돌아오기를 바랐다. 그 정도는 되어야 미래의 황후로서, 사교계의 여왕으로서, 이 수많은 귀부인들의 밀고 당기는 싸움을 손바닥처럼 들여다보는 데 부족함이 없다는 뜻이다.
무슨 이야기인지는 잘 알고 있다. 나의 큰언니, 지금의 황후 폐하처럼 침착하고 냉정하게 상황을 관망하며지지 않는 시합을 하라는 뜻이라는 것도. 하지만 상대는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황태자의 외할머니 되는 에르도스 공작부인이다. 그에게 있어 나는 외손자와 혼담이 오가는 상대이자, 그의 딸의 자리를 차지한 현 황후의 막냇동생이다. 내가 아무리 완벽한 모습을 보이려 애쓴들, 사교계에서 수십년을 버텨 온 그의 눈에는 흠잡을 구석 투성이일 터다.
황후 폐하는 나의 큰언니였다. 나보다 열한 살 더 많은 그는, 지금으로부터 십 년 전, 황태자의 생모인 전 황후가 세상을 떠난 다음 해에 황후가 되었다. 언니는 고작 열일곱 살이었고, 황제는 세 번째 결혼이었으며, 우리들의 아버지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사람이었다. 그때 나는 여섯 살 밖에 되지 않았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언니에 대해, 또 아버지에 대해 뭐라고 말했는지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짐작할 수 있다. 서룬도라스 공작이 권력을 위해 딸을 팔았다고 수군거렸겠지. 딸의 행복 따위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도, 언니가 길을 어긋나기를 은근히 바라고 기대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황제에게는 이미 후계자가 있었고, 언니에게는 돌파구라는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황제의 첫 번째 결혼은, 그가 황태자일 때 이웃나라의 공주를 황태자비로 맞이한 것이었다. 공주는 아들을 낳았지만 산후병으로 곧 죽고 말았고, 황제는 옥좌에 오른 뒤 두 번째 아내이자 첫 번째 황후를 맞이하려 했다. 그가 원한 사람은 그가 첫 결혼을 하기 전부터 사랑했다는 자작의 딸, 로즈마리 블랑쉬였지만, 그 혼인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황실의 먼 인척이 되는 공작가문의 딸이라면 모를까, 일개 자작의 딸이 낳은 자손이 계승권을 갖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설령 가능하다 해도, 정식으로 그 이마에 관을 얹기 전에 임신부터 해 버린 부주의한 여성이 황후가 되어 만백성의 모범이 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결국 그는 황실의 먼 친척인 에르도스 공작가의 딸을 황후로 맞아들였다.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여성을 공식 정부로 삼았다.
후계자에 대해서도 딱히 문제가 없을 정도였다. 황태자비가 낳았던 적장자인 알카니스 황태자는 무예가 뛰어났고, 일찌감치 혼인을 하여 황태자비와의 사이에서 딸을 낳았다. 그가 사냥을 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목이 부러지지만 않았어도, 만사는 순조로웠을 것이다. 하지만 알카니스가 죽었다고 해서 황실의 앞날이 어두워질 것도 아니었다. 황후가 낳은, 두 번째 적자이자 세 번째 아들인 포이닉스 황태자가 있었으니까. 포이닉스 황태자는 실력과 노력을 겸비한 인물로, 형의 빈자리를 바로 채우며 장차 이 제국을 다스릴 준비를 착실히 해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알카니스보다 세 살 아래, 포이닉스보다 다섯 살 연상인 황제의 서장자, 헬리오스 공작도 있었다.
헬리오스 공작은 이미 성인이고, 재주도 인망도 뛰어난데다, 황제가 가장 사랑한 여성인 레이디 로즈마리의 아들이었다. 정식으로 혼인하지 않았을 뿐, 그 모친인 로즈마리 블랑쉬 역시 유서깊은 귀족가의 후손이었기에, 황제는 이 아들을 자신의 사생아로 두는 대신, 여덟 살이 되자 마자 황제의 사촌, 헬리오스 공작가의 작위를 잇게 했다. 공연히 엉뚱한 욕심을 품었다가, 에르도스 공작가를 등에 업은 황태자의 세력, 혹은 서룬도라스 공작가와 황후 세력에게 목숨을 잃을까 걱정했던 것이다.
이처럼 황제는, 이미 황태자비와 황후, 그리고 자신의 장자를 앞세웠다 하더라도 이미 반석같은 후계자와 총애하는 아들이 있었다. 그러니 언니가 뒤늦게 아들을 낳는다 하더라도 달라지는 일은 없다. 이미 미래가 확고하게 결정된 상황에서, 뒤늦게 황실에 들어간 어린 황후의 자리는 크지 않았다. 사람들은 황후가 황제를 두고 불륜을 저지를 것이다, 어쩌면 의붓자식인 헬리오스 공작과 금지된 사랑에 빠질 지도 모른다고 지레 기대했지만, 언니는 그 시험을 묵묵히 이겨냈다. 그리고 이제, 장차 이 나라를 다스릴 포이닉스 황태자의 반려로서, 우리 가문의 딸을 받아들이게 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니까 나는, 언니의 희생을 딛고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젊었을 때는 잘생겼다는 말도 있고, 실제로 포이닉스 황태자와 헬리오스 공작의 얼굴을 보면 틀림없이 그랬을 것 같긴 하지만, 지금은 통풍을 앓는 늙은이인 황제를 곁에서 모시며 청춘을 다 보내 온 언니는, 그 대가로 대를 이어 황후를 배출한 가문이라는 영광을 쟁취해낸 것이다.
‘하지만 그런 희생에, 의미라는 것이 있을까…’
나는 문득, 아버지가 아셨다간 불같이 화를 내실 법한 불경한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직후, 나는 요란한 나팔 소리와 함께 고개를 들었다. 공작가의 시종장이 목소리를 가다듬어 외쳤다.
“헬리오스 공작 부처이십니다.”
그리고 곧, 이름 그대로 태양신의 광휘 이상으로 아름답다는 소문이 자자한 헬리오스 공작과, 아름다운 자수정빛 눈동자를 지닌 어린 공작부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나는 깨달아버린 것이었다.
이 세계는,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어떤 세계와 정말 많이 닮아 있다는 것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