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에는 실로 여러가지 부류의 아저씨들이 나오다. 오지콤의 사랑의 대상인 아름답고 처연하고 젖은 낙엽같은 가상의 아저씨들이 아니라, 배가 나오고 술을 즐기고 방귀를 뿡뿡 뀌고 욕설을 하는 현실의 아저씨들, 소위 개저씨들. (아, 말하고 보니 한국 대통령이잖아.) 이들은 브렉시트 찬성에 투표하지 않나, 게이인데 열렬한 보수당 지지자이지 않나, 내 이웃에 살고 있는 외국 출신 가족에게는 인종차별이 베이스에 깔려 있지 않나, 읽고 있으면 기막힌 이야기들이 이어진다. 중노년의 나이에 아시아에 종종 여행을 가서 현지의 젊은 동양인 여성과 만남을 주선받거나 결혼을 하거나, 혹은 그렇게 만난 여자와 연락을 하고 지나다가 만년에 암에 걸리자 이 여성을 불러들여 돌봄을 받은 주제에 유산은 조카들에게만 남기는 내 눈 앞에 있으면 눈살을 찌푸리게 될 것 같은 아저씨도 있다. 이 책은 바로 이런 아저씨들에 대한 애정과 이해, 그리고 이들의 국가 복지에 대한 믿음과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이다. 물론 나는 이 책에 그다지 동의하지 않는다. 남성 작가가 이 책을 썼다면 아마 욕을 했겠지. 그리고 여성 작가이고 이민자인 작가의 글을 보면서, 문득문득 생각한다. 일본 여성 수필가들이 쓰는 수필 속에서, 눈살 찌푸릴 만한 짓을 하는 아저씨들이 종종 귀엽고 딱하게 그려지는 그 감각에 대해. 그동안 브래디 미카코의 책을 읽으면서 이 사람이 일본 출신이라는 생각은 거의 안 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이 부분에서 그 생각이 들었다.
문화인류학자 폴 윌리스는 1972년부터 노동 계급 소년들에 대해 조사했고, 1977년『해머타운의 녀석들–학교에의 반항, 노동에의 순응』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브래디 미카코의 남편과 그의 친구들 – 이 책에 나오는 아저씨들 – 은 바로 이 세대의 소년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브렉시트 찬성에 투표했다. 그로 인해 대학을 나온 아들에게 무시당하거나 젊은 아내와 냉전을 벌이기도 하고, 투표해놓고 보니 영국이 EU를 탈퇴하면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의 국경이 문제가 된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아일랜드계도 있다. 자기는 탈퇴 찬성에 투표한 주제에 정작 찬성표가 더 많자 망했다고 생각하지만 영국의 미래에 대한 거시적인 걱정이 아닌, 가정에서의 불화가 더 큰일이다. 그런 그들에 대해 브래디 미카코는, 이들은 EU에서 탈퇴하면 EU에 내는 돈을 공공의료서비스인 NHS로 돌릴 수 있다는 말을 믿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작가는 그게 용납이 될 지 몰라도, 한국에서 투표하고 살고 있는 나는 용납이 안 되는 것이다. 당장 내가 아는 어르신(우리 부모님과 그 친구분들 포함)들도 “문재인이 나라를 망친다잖아.” “민주당이 북한에 퍼주는 돈만 없어도 우리 나라는 선진국이 될 텐데.”하면서 투표를 하셨고, 그 결과가 요즘 뉴스에서 나오는 기가 막힌 이야기들이니 말이다. 사실 그분들은 복지를 망가뜨리고 나라를 망신시키고 손주들 학교에서 먹는 밥을 빼앗는 데 투표하신 거라고 생각하는데, 내가 그런 말을 하면 “우리는 몰랐다. 모르는 게 죄냐.”고 말한다. 읽는 내내 이 아저씨들이 하는 말들이 머릿속에서 겹쳐져서 멀미가 났다.
국가가 안전망이 되던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은 좋겠군. 전후세대인 내 부모님 세대는 지금의 내 나이 때 고도성장기를 지나고 있었고, 여기 이 영국 아저씨들은 ‘요람에서 무덤까지’의 복지사회에 청년기를 지나왔다. 어쩌면 훗날 누군가도 지금 내 세대, 70년대 말 80년대 초에 태어난 이들이 꿀을 빨았다고 말하겠지만, 그때 가서 남의 이야기에 귀가 팔랑거린 끝에 가장 보수반동적이고 어리석은 선택을 하진 않아야겠지. 그래놓고는 가족에게 따돌림당한 남자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살아갈 수 있다”는 결의를 보이겠다며 하필 한자로(우웩, 이 오리엔탈리즘) 문신을 새겨서(대체 왜) 가족에게 보여주겠다고 나오는데, 평화를 새긴다며 平和가 아니라 中和를 새기고 있는 꼴이 웃기긴 했다. 딱하진 않고, 비웃겼다. 대체 님이 문신을 새기는 게 가족들이나 영국이 걱정하는 앞날과 무슨 상관이람. 자기가 무릎씩이나 꿇었으니까 알아달라며 큰소리를 치는 개저씨들을 보는 것 같네. 아, 개저씨들이었지. 그냥 이런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느끼는 건, 하찮음이었다.
아저씨들이 이 세상의 사탄 취급을 받기 전부터 나는 그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저씨가 신의 적대자인 사탄이 될 정도로 대단한 존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냥 한 명의 사람이며, 우리와 비슷한 인간이다.
사실 그들은 대단한 존재도 아니고, 악인도 아니며, 보수당의 긴축으로 공공 서비스가 삭감되자 공동체 의식으로 주변을 돌보며 좋은 이웃이 되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이웃에 살고 있는 중국인 가족을 10대 소년들이 공격하려 하자 자경단을 조직한다. 이민자들이 들어오는 건 싫지만 이미 들어와 사는 이웃에 대해서는 존중해야 한다는 논리다. 실업보험을 받아 지내는 동안 동네 도서관에서 지역사회의 역사를 연구하고, 그 도서관이 커뮤니티 센터 안의 작은 서가로 축소되자 반대하는 시위에 참여했다가, 커뮤티니 센터 안에서 부족한 일손을 도와 아이들이 책을 빌리는 것을 도와주거나 책을 읽어주는 사람도 있다. 멍청한 백인들 다운 한심한 말들과 인종 차별적인 발언들, 젊은 아시아 여성 선호 같은 역겨운 짓들도 나오지만 말이다. (물론 아시아에 환장을 하다 못해 곤도 마리에의 정리술에 감동하며 “일본인은 정리를 시작하기 전에 바닥에 앉아 집에 기도를 드린다지? 그걸 처음 보았을 때 어찌나 감동적이던지 눈물을 흘릴 뻔했다고.”같은 소리가 나올 때는, 이 이야기를 라이브로 들어야 했던 일본 출신의 작가에게 진심으로 애도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대체 ときめき가 어떻게 sparkling joy가 되느냐고요.)
『해머타운의 녀석들』에서 “반항적이고 권위에 저항하면서도 사회 계급의 틀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고 스스로 ‘육체노동’으로 살아가기를 택하여 기존의 계급 제도를 재생산한다”라고 지적된 영국의 노동 계급 아저씨들이 이 계급 재생산의 길을 드디어 끊으려 하고 있다. 나보다 출세하라면서 계급 재생산의 길을 끊어내려 한 아버지들은 이전에도 많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최근 그들이 하는 말에는 “이제 우리가 하는 일은 없어질 것이다”라는 궁지에 몰릴 대로 몰린 현실감이 있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그저, 고리타분하고 배나온 아저씨들의 생태 보고서만은 아니다. 이 이야기에는 과거 노동자-중류-상류계급으로 나뉘었던 영국의 사회가 기술의 발전과 신자유주의와 함께 어떻게 또 다른 형태로 분화되었는지, 전통적 노동 계급과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새로이 부각된 신흥 서비스 노동자나 새로운 부유층 노동자는 어떻게 다른지, 전통적인 노동 계급은 앞으로 어떻게 변화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다. 이미 영국은 계급 간 이동성(낮은 계급에서 더 높은 계급으로 올라가는 기회가 열려 있는)을 주장하는 정도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고, 모든 사람에게 기본적인 기회를 주어, 그들의 재능이 사회에서 쓰일 길을 열 방법을 고민해야 하는 격차 사회가 되어 있다.
한편으로는 백인 노동계급 남성 청소년들의 성적 부진 문제에 대해서도 조금 생각을 하게 된 부분이 있다. 작가의 전작이나, 혹은 “차브”를 읽으면서 백인 남성들의 성적 부진이나 극우화에 대한 대목을 읽을 때마다, 성별이나 피부색을 떠나서 가난이 문제라는 건가, 생각하다가도 “유복하지 않은 환경이라도 인도인, 파키스탄인, 아프리카계, 캐리비안계 가정의 어린이들은 백인 노동 계급보다 좋은 성적을 낸다.”는 걸 보면, 가난이 전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도 아닐 텐데. 아시아 여성의 입장에서야 다수파이고 백인이고 남성인 주제에 뭐 하는 거야,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하지만 현실에서 “지금 영국에서는 10대의 약 40퍼센트가 고등교육 과정에 진학하지만, 노동 계급 백인 남성만 놓고 보면 이 수치는 10퍼센트 정도 떨어진다. 또 GCSE(의무교육 종료 시 치르는 전국 일제고사)에서도 노동 계급 백인 학생, 특히 남학생의 성적은 최하위로 고등교육을 받을 만한 실력을 갖추지 못한 아이들이 많다.”는 상황에서, 이걸 그들의 어리광으로만 볼 수도 없긴 할 거다. 문제는 무력감이라는 것이, 작가의 설명이다. 미래에 대한 야심이 없고 교육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는, 희망도 없고 배울 마음도 없는 무기력함은 가난한 지역의 백인 남자아이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감정인 듯 하다. 가난한 여성, 비백인 청소년의 성적이 충분히 잘 나오지 않았을 때에도 그렇게 걱정을 했는지 묻고 싶어지고, 반발감이 들기도 하지만, 작가가, 그리고 영국 사회가 느끼는 근심이 무엇인지 조금 짐작은 할 수 있었다.
예전에는 자기 의지로 책을 읽고 교양을 쌓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더 스미스의 모리시는 가난한 노동 계급 청년들에게 오스카 와일드를 소개했고, 덱시스 미드나이트 러너스14의 앨범을 듣고, 로런스 스턴15을 읽는 청년들도 있었다. 더 잼에 이르러서는 앨범 재킷에 퍼시 비시 셸리16의 시를 인용하고 그것을 멋지다고 여겼다.
PS) 한편 그가 인용한, 프로페서 그린의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가난한 노동계층 출신으로 노력하여 케임브리지 대학에 진학한 루이스의 사례는 읽고 있다 보면 마음이 아프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알았던 소년과 그를 지켜주고 공부에 집중하게 해 준 어머니의 노력으로 소년은 대학에 진학하지만, 이곳에 적응하기 위해 억양을 바꾸고, 깔끔한 옷을 입고, 고풍스러운 옥스브리지 학생다운 모습이 되기 위해 중상류계급을 안쓰러울 정도로 흉내내다 보니 두 세계 사이에 끼어 우스꽝스러워진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나는 또 어떤 것에 편견을 두고, 또 어떤 모습을 차별적으로 선택하고 있는지가 여집합처럼 드러나기는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