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나라의 수학자”을 보며 생각했다. 이건 최인훈의 “광장”의 21세기적인, 해피엔딩 버전이라고.
- “광장”에서 철학도인 명준은 개개인의 밀실만이 있고 광장은 없는 남한에 실망해 월북하지만, 북한에는 개인은 없고 오직 전체주의적인 광장만이 있는 것에 실망한다.
-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에서 북한의 수학자 리학성은 북한에서는 자신의 수학으로 무기나 만드는 현실에 실망해 남한으로 오지만 여기서 수학은 입시와 출세의 수단인 것에 실망한다.
- “광장”에서 명준은 사상의 갈등에 휘말리고, 명준이 사랑한 은혜와 은혜가 임신한 딸은 이념 갈등의 절정인 한국전쟁 중 세상을 떠난다.
-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의 리학성은 수학이 그가 연구하는 수학이 암호 해독 등 무기가 될 수 있다는 이유로 국정원의 감시를 받고, 남한에서 수학과 상관없이 닭 잡고 막노동 하며 살아간다. 그는 북한에서 결핵으로 아내를 잃었고, 남한에 데려온 아들은 체제에 적응하지 못한 채 괴로워하다가, 3년 전 리학성이 리만 가설 증명의 초고를 완성한 날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려고 임진강을 건너다가 사살당했다. 이후 그는 명문고등학교의 수위가 되고, 계속 국정원의 감시를 받는다.
- “광장”에서 명준은 포로 수용소에서 남북한에서 서로 자기 쪽을 선택하라 하지만 중립국으로 가기를 선언하고, 인도로 가는 배에 오른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로서, 빨갱이도 반동분자도 없는 세상, 그에게는 남한도 북한도 이념도 없는 세계인 죽음을 선택하며 자살한다.
-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의 리학성은 리만 가설을 증명하자 남한 국정원과 북한 보위부, 미국에서도 관심을 집중하는 상황에 놓인다. 옛날에 북에서 알던 학자가, 리학성을 데리고 돌아가면 보위부에서 용서해 준다고 그랬다며 접근하기도 한다. 그러나 리학성은 자신을 감시하던 국정원 직원의 도움으로, 한국 여권을 든 채 독일로 떠나고, 비로소 정치나 이념에서 벗어나 수학에만 전념할 수 있는 오버폴바흐 연구소에 정착한다.
리학성이 일하는 입시명문 사립고등학교는, 그에게는 수학의 아름다움은 잊어버린 채 모두가 입시에 매달려 있는 “이상한 나라”이자 아직 “중립국”으로 넘어가기 전 명준이 머무르던 포로 수용소와도 같다. 명준이 머무르던 수용소는 사실, 일종의 중음이라고 생각하면, 리학성의 수위실 역시 그렇다. 포로 수용소에서 명준은 과거를 곱씹고 죽은 은혜와 은혜가 임신했던 ‘딸’을 생각하고, 끝내 죽음을 택한다. 그리고 리학성은 아들이 좋아하던 딸기우유, 아들이 기르던 거북이에 집착하면서도, 아들이 죽던 날 초고를 완성했던 리만 가설 증명을 가다듬어 논문을 발표한다. 어린 시절 가난했던 그는 성공하기 위해 수학을 했지만, 수학은 그에게 있어 폴 에르디시와의 만남, 그때 어린 소년으로 나란히 폴 에르디시의 귀여움을 받았던 남한의 오 교수와의 인연, 그리고 험난하던 삶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게 했던 아름다움이었다. 그리고 이 이상한 나라에서 여전히 연필을 깎고, 낡은 카세트로 바흐를 듣던 그는, 여섯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사회적 배려대상자 전형으로 이 학교에 들어온 지우를 만난다.
“답이 없는 문제를 풀고, 그게 맞는지 확인을 하고 증명을 하는 게 수학자가 하는 일이야.”
“저는 수학자가 아니라 수포자예요, 수학 포기자!”
대한민국 1%가 모인 입시명문 기숙학교인 동훈고등학교는 지우에게도 이상한 나라다. 아직 1학년이지만 그의 친구들은 주말마다 대치동의 1박 2일 스파르타 학원에 다니며 진도를 다 뺐고, 수학교사 근호는 입학한지 200일도 안 된 아이들에게 고등학교 3년치 진도를 다 나가 놓고는, 일반 학교에서는 1등급도 받을 수 있는 지우를 두고 수학을 따라가지 못하는 열등생으로 낙인찍는다. 지우는 친구들과 사다리를 타서 소주가 포함된 배달음식을 받아오다가 그만 “인민군”이라 불리는 북한 출신의 수위 아저씨, 리학성에게 걸린다. 그 바람에 한달간 기숙사에서 쫓겨나게 된 지우에게 ‘친구’는 돈을 내민다. 보는 사람이 모멸감을 느끼게 하는 그 장면은, 지우의 동급생이나 담임이자 수학교사인 근호에게 있어 지우는 자신들이 무시해도 좋은 사람, 가난한 아이, 돌아갈 집이 마땅치 않고, 기댈 부모가 마땅치 않으며, 억울한 일을 당해도 어디가서 말 한 마디 하지 못하는, ‘짓밟아도 되는 존재’로 여겨짐을 보여준다.
기숙사에서 쫓겨났지만 지우에게는 갈 곳이 없다. 그는 한달동안 과학관 B103에 숨어 지내려 하다가 리학성에게 들키고, 지우는 북한 말투를 쓰는 이 수위 아저씨가 서울공대 출신 대치동 일타강사도 틀리는 수학 경시대회 문제를 식도 안 쓰고 풀어버린 것을 보고 놀란다. 자신이 리만을 연구하는 수학자라는 사실을 숨기고 싶어하는 리학성은 지우를 밀어내려 하지만, 그가 아버지 없이 가난하게 자랐고 교사들도 무시하는 사배자라는 것을 알고, 수위실 구석에서 지우를 재워주고, 딸기우유를 수강료 삼아 과학관 B103에서 수학을 가르치기로 한다. 그는 일부러 잘못된 문제를 내주고, 틀린 답에서는 옳은 답이 나오지 않으며, 답을 맞히는 것보다 찾는 과정이 더 중요하다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이보라, 수학을 잘하려면 제일 중요한 게 뭔지 아네?”
지우는 리학성의 곁에서 바흐를 듣고, 리만이 루트 2와 친해지고 싶어서, 살을 부대끼고 친해져야 이해가 되고, 이해가 되어야 사랑할 수 있어서 sqrt(2)를 손으로 계산한 이야기를 듣는다. 공식에 맞춰 계산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생각을 하고 공들여서 꼼꼼히, 문제가 안 풀리면 내일 아침 다시 풀어보는 용기를 갖고 수학을 계속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귀가의 날, 으리으리한 차들이 학교로 들어오고, 사배자로 들어온 다른 친구는 학교를 그만두고 일반고로 전학을 가고, 지우가 반의 평균을 깎아먹는다고 생각하는 근호는 “수준 안 맞는 사배자”인 지우를 어떻게든 학교에서 몰아내려 한다. 그럼에도 지우는 끝없이 수학문제를 풀며 한 달을 버틴다.
한편 지우의 친구인 보람은 외할아버지가 첼로 음악회를 후원할 만큼 부유한 집 딸이지만, 부모가 이혼했다고 사배자 전형으로 입학한 친구다. 그는 지우의 뒤를 따라갔다가 지우의 비밀을 알게 되고, 리학성에게서 Pi를 피아노로 연주하는 법을 배운다. 지우는 보람과 함께 수학의 아름다움을 귀로 느끼고, 오일러 공식의 아름다움을 본다. 하지만 보람의 엄마는 보람이 가난한 지우와 어울리는 것을 싫어하고, 근호가 소개해 준 소수정예 수학 학원인 오일러 수학 연구소에 보람을 등록시킨다.
교내 수학 경시대회인 피타고라스 어워드가 다가온다. 지우는 근호가 수업시간에 풀이하던 문제에서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지만, 근호는 자신이 낸 문제를 감히 지적하는 지우에게 분노하며 “출제자가 콩을 팥이라고 하면 팥이다”라고 우긴다. 근호는 계속 지우에게 학교에서 나갈 것을 종용하고, 지우는 나가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지우는 이제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사배자 출신인 자신이 이 학교에 있는 것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이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받아야 한다. 시험 전날 지우는 스마트폰으로 논문을 보는 학성을 위해 논문을 출력해 주고, 다음 날 보람은 시험문제가 ‘오일러 수학 연구소’ 학원에 다니는 아이들에게 이미 유출이 되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증명하라, 옳은지 그른지.”
북한 수학자 리학성이 리만 가설을 증명했다는 뉴스가 나온다. 뉴스에는 과거 리학성이 국제 수학 올림피아드에서 만났던 오 교수가 나와, 이 업적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리만 가설은 암호학과 깊은 연관이 있다 보니, 북한 보위부는 남한에서 리학성을 납치했다고 주장하고, 미국도 리학성의 신변에 관심을 보인다. 과거 학문과 자유를 찾아서 남한에 왔던 리학성에게 수학을 연구할 기회를 주지않고 내몰았던, 그 아들의 죽음에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을 국정원은, 이제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며 리학성에게 TV에 나와 자기 발로 귀순한 것임을 직접 밝혀달라고 요구한다. 리학성은 평생 자신을 괴롭혔던 이념의 문제에서 도망치려 한다.
하지만 근호가, 자신이 고액의 소수정예 학원을 부잣집 아이들에게 소개하고, 이곳을 통해 학교 시험지를 유출했던 사실이 들통날 위기에 처하자, 그는 시험 전날 복사실에 들어갔던 것을 꼬투리잡아 지우에게 시험지 유출 건을 뒤집어 씌우려 한다. 그는 너 따위가 성적이 이만큼 오를 리가 없다, 복사실에 들어갔던 CCTV가 증거라며, 형법이니 전과자니 감옥을 들먹여 지우를 협박하고, 지우는 마침내 피타고라스 어워드 시상식 날 전학 원서에 도장을 찍는다. 그리고 학교를 떠나려는 지우를 보람이 잡아온다.
피타고라스 어워드에서 연설을 하던 오 교수의 앞에, 보람의 연락을 받고 돌아온 리학성이 나타난다. 그는 한국인이 리만 가설을 증명한 업적을 이야기하는 오 교수 앞에 만년필을 들어보이고, 오 교수는 이 사람이 리학성이라며 그에게 연단을 양보한다. 리학성은 지우가 자신의 지도를 받고 있었고, 그가 복사실에 간 것은 시험문제 때문이 아니라 논문을 출력해 왔기 때문임을 밝히며, 이제 근호를 향해 묻는다.
“선생이 제자를 도둑으로 모는 여기가 학교 맞습네까?”
지우를 곤경에서 구해내고, 리학성은 자신과 연락하고 지내는 국정원 직원인 기철의 도움을 받아 프랑크푸르트로 떠난다. 리학성이 떠난 과학관 B103에서 지우는 혼자 수학문제를 풀고, 기철은 지우에게 리학성의 논문 초고와 에르디시의 만년필을 전해준다.
광장의 21세기 해피엔딩 버전같은 이 영화를 보며, 앞부분에서 어린 리학성에게 폴 에르디시가 “엡실론!”하며 만년필을 건네주는 장면에서는 조금 웃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제일 비현실적인 부분은, 김일성대학에서 수학을 가르친 공화국 최고의 수학 천재가 귀순을 했는데 고등학교 수위가 되어 있는 것이나, 한국인이 리만 가설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제일 비현실적인 부분은 역시, 3년 전 아들을 잃은 리학성이 태워버리려던 논문 초고를 보관하고 있던 국정원 직원 기철이, 자기 커리어조차 포기하고 리학성을 미국도, 북한도 아닌 수학에 몰두할 수 있는 독일의 연구소로 빼돌리는 장면이다. 진심으로 그 장면에서, 설마 저 기철이라는 사람, 과거에 “나는 리만 가설 풀고 필즈상 받을거야!!!” 같은 청운의 꿈을 품고 수학과에 들어갔다가 아아 진로선택 망했어요 그러나 리만가설은 언제나 나의 청춘의 꿈이었어 하는 그런 설정이라도 있는 게 아니었나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국정원 직원이, 학자의 학문의 자유를 위해 자기 커리어를 버릴 리가 있냐. 영화라도 말도 안 되는 일이지. (한국 국정원에 대해 그다지 신뢰하지 못하고 있음)
그리고 3년이 지나, 지우는 수학과에 진학한다. 그는 “이상한 나라”인 자본주의의 첨병같은 사립고등학교를 버텨내 졸업하고, 자신의 발목을 잡던 가난을 넘어, 대학에 진학했다. 오버폴바흐가 수학자들의 마음의 고향같은 곳인데, 지우 덕분에 우리 모두 여기 올 수 있었다는 교수의 말로 볼 때, 어쩌면 그는 대학 수학경시대회나 뭔가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증명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마침내 리학성을 찾아 오버폴바흐 연구소에 도착했을 때, 리학성의 하얀 톤의 연구실은 천국처럼 보인다. “중립국”을 찾아 떠나다가 죽음을 택한 명준과 달리, 그들은 수학 속에서 삶을 택했고, 이제 그들을 필요로 하는 곳에 도달했다. 이념과 사상과 가난과 차별이 발목을 잡지 않는, 오직 수학만이 존재하는 아름다운 낙원에서, 이제는 3년 전보다 키가 더 자란, 죽은 아들을 떠올리게 하는 소년은 딸기우유를 들고 리학성을 마주보고, 수학을 이야기한다. 바로 그들만의 낙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