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남편이 퇴직했습니다

오늘, 남편이 퇴직했습니다 – 박경옥, 나무옆의자

남편은 27년간 회사인간으로 살았다. 퇴직 전에는 비서와 기사까지 있는 관리직이었다. (이제는 까마득해 전생에 그런 일이 있었나? 믿기지 않는다) 그런 자리에 익숙하면 남에게 시키는 안 좋은 습관이 붙는다. 말만 하면 뚝딱 KTX승차권, 출장 비행기표가 준비되는 줄 알았다.

저자의 남편은 지점장으로 은퇴했다. 아무리 실적이 좋아도 2년 뒤에는 퇴직하는 자리인 것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대부분은 언제 나가야 한다는 마음의 준비도 없이 어느날 갑자기 회사에서 밀려나는데. 저만하면마음의 준비만은 할 수 있었을 텐데. 생각하다가 문득, 정년퇴직도 명예퇴직 제도도 있고 앞날을 준비할 시간만은 충분했지만 준비되지 않은 채로 은퇴하시던 몇몇 상사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 책 자체는 지금의 나에게 그렇게 유용한 책인 것도 아니고, 몇몇 대목(성추행하는 남자들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라면서도 집에서 그 남자들을 사랑으로 보듬지 않아서 남자가 밖에 나가서 그런다는 식의, 연세 많으신 여자 어르신들이 남자가 잘못한 일에도 여자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태도라든가)들은 거슬리기도 했지만, 읽으며 생각할 부분들은 적지 않았다. 언젠가는 나도 은퇴를 하게 될 것이므로.

파이어족이라든가, 조기 은퇴라든가, 은퇴 후 여유로운 생활 같은 낙관적인 이야기들은 많다. 다행히 나와 배우자는 은퇴 시기를 어느정도 예측할 수 있는데다 현금이 일시금으로 많이 들어오진 않겠지만 연금을 받을 테고. (그러나 나는 국가가 보장하는 연금에 꼬박꼬박 돈은 붓는 주제에 그걸 받을 수 있을 거라고 100% 확신하진 않고, 신입사원이 들어오면 단기자금으로 적금붓고 중기자금으로 펀드를 들라고 잔소리하는 사람임) 하지만 은퇴 이후 바로 연금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보니 그 사이의 먹고 살 궁리도 해야 하는데, 아직 시간이 많이 남긴 했지만 지금부터 준비해야 하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하며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남편 퇴직 후 1년간 수입이 없었는데도 현실을 인정하기 싫었다. 현실을 인정하면 달라져야만 한다는 게 부담스러웠다. 예전처럼 살고 싶다는 마음이 들러붙어 있었다. 하지만 2년 후 퇴직금 우물이 마르자 은퇴남편증후군마저 사치스러운 지경이 됐다. 먼저 의식주를 줄였다. 흠집이 난 과일을 고르고, 음식을 적게 먹고, 작은 집으로 이사했다. 그래도 생활비는 턱없이 부족했다.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위치 묘사로 보면 어지간한 월급쟁이가 선뜻 들어가기 어려운 집, 대치동에서도 살아봤다는 이야기, 은행 지점장도 지냈었다는 이야기가 이어진다. 소비수준을 유지했더니 2년만에 퇴직금이 바닥을 보이고, 해외 법인장을 지냈던 지인은 생활비를 줄이지 못해 집을 팔았다는 이야기를 읽고 있으니, 정기적인 수입의 중요성과 함께 전에 앤 패디먼의 수필에서 그가 할머니 시절에 나온 여성의 부덕에 대한 책을 읽다가 기막혀하던(남편이 사업에 실패하자 그의 자부심 강한 귀여운 아내는 집을 줄여 이사하고 가구에는 목면으로 된 덮개를 덮지만 가족들도 하인들도 모두 행복했더라는 이야기를 읽고 앤 패디먼이 매우 황당해한다) 대목이 문득 떠올랐다. 한편으로는 막연히 언젠가 퇴직한다는 생각만 하다가, 퇴직 후에는 이전의 자리도 명함도 없다는 자각을 못 하는 상황이 얼마나 위험한가 싶기도 했다. 나에게는 아직 먼 일이라 생각했지만, 퇴직 후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생각하게 되었다.

남편처럼 아이템도 콘텐츠도 없이 사무실을 내고 싶다는 모래성을 쌓는다. 모래성을 쌓다가 허물어지면 무엇도 할 수 없다는 절망이 온다. 숨이 막히는 듯한 터널증후군을 한동안 겪는다. 이런 과정을 겪고 나면 돈(핏줄)이 마르는 핵겨울이 온다.

읽다가 묘한 기분이 든 건 이 대목이었다. 아이템도 콘텐츠도 없는 사람이 사무실을 내고 싶다니 무슨 생각인가 싶다가, 언젠가 은퇴하여 전업작가가 되고 집 근처에 작은 오피스텔을 얻어 작업실을 마련하고 싶다는 꿈도 이런 모래성인가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가끔 여행을 다니면서 계속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하고, 건강만 받쳐주면 60대가 되어도 소설 쓰는 데는 지장이 없겠지만, 이 꿈은 어디부터 어디까지 가능한 꿈일까. 그 꿈을 이루려면 지금부터 뭘 준비해야 하는 걸까, 하는.

이 책은 퇴직에 대비해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 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진 않는다. 그보다는 마음의 준비가 덜 된 상태로 퇴직을 맞이하였을 때 벌어지는 일들을 이야기한다. 내 상사들이 종종 말하는, 교사나 공무원들이 퇴직하면 사기를 그렇게 잘 당한다는 이야기를 생각한다. 이미 퇴직을 했는데도 전처럼 남을 가르치고 남에게 으스댈 수 있다고 착각하다가, 자신을 특별한 듯 대해주는 사람에게 속아 그나마 먹고 살 대책도 날려버린다는 것이다. 이 책에는 바로 그, 특별함을 기대하지 않고 살아가기를 말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특별 대접을 받기를 원하지만 잔여구좌에도 들어가지 못해요. 특별한 대접을 받으려는 그 마음을 이용하는 사람이 많죠.”

내가 퇴직할 때의 상황은 지금과는 또 다르겠지만, 앞으로의 일에 대해 조금 생각해 봐야겠다. 일을 어디까지 벌이고 어디까지 수습을 해야 할 것인지.


게시됨

카테고리

,

작성자

Translat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