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은 생각을 담는 그릇이며, 생각을 다듬는 도구다. 훔볼트는 언어를 두고 에르곤(ergon,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에네르게이아(energeia, 이루는 힘)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리고 세상에는 이 도구를 아주 엉망으로 쓰고 있다. 말끝마다 시발거리고, 밈이 없으면 생각하지 못하고, 그런데다 목소리는 크고 무례한 농담을 일삼는다. 과거에는 하다못해 TV 뉴스의 아나운서들이라도 정제된 말을 사용했지만, 요즘 종편의 아나운서들을 보면 그런 걸 기대하기는 글러먹었고, 무엇보다도 지금의 청년들이 보는 것은 정제된 언어를 사용하는 아나운서의 말이 아니라, 목소리만 크게 외치며 헛소리를 늘어놓는 유튜버들의 말이다. 자극적인 소재 하나 잡아서 밈으로 범벅이 된 제목을 붙여놓고, 딕션은 부정확하고, 말은 거칠고, 유행어를 하나 만들어서 구독자들의 뇌리에 꽂아넣으면 다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물론 당연하지만 모든 유튜버가 그런 상태인 것은 아니다. 전문 지식을 갖추고 차분하게 말하는 사람들, 해롭지 않지만 참신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지금 지적하는 사람들이 그런 걸 보겠냐, 아니면 카메라 끄면 동네 양아치일 것 같은 사람이 큰 목소리로 헛소리하는 걸 보겠냐.) 유튜버를 보면서, 말이 거칠어지다 못해 생각까지 외주를 준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리고 무지와 몰상식의 문제를 지적하면 꼭 가난해서 못 배운 걸 어떻게 하느냐, 이거야말로 가난 혐오가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지금 가난해서 중학교도 못 가던 시절 사람들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다. 중학교가 의무교육에 들어간 게 언제 적 이야기인데.
그리고 여기, 네온비 작가가 스토리를 쓰고 김인정 작가가 그림을 그린 웹툰이 있다. 이 조합만으로도 일단 읽어볼 만 하다. 그런데다 이건 전국 모든 남중생(중학생쯤 되면 아직 주입식 교육으로라도 바로잡을 기회가 있지 않을까. 그 이후의 사람은 본인의 강력한 의지 없이는 뭘 바로잡기가 매우 어려워 보인다.)들에게 읽고 독후감 쓰게 해야 할 웹툰이다. 짧고 거칠어 생각을 다 담지도 못하는 말만 쓰다가 종국에는 성년이 지나서도 생각하는 법도 잊어버린 놈들이 너무 많은데, 이 웹툰은 그런 놈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의 가장 순한 버전이니까.
“양아치의 스피치”의 주인공 이솔은 김인정 작가의 만화 남주답게 잘생겼다. 고상함과는 거리가 멀고 늘 가성비를 따지지만, 화목한 가정의 차남이다. 친구들과 사이도 좋고, 친화력도 강하다. 그동안 고백도 많이 받았고, 잘 생긴 얼굴 덕분에 편하게 산 부분도 많다. 이만큼만 해도 나름 상위 10% 안에 드는 남학생이겠지만, 그에게는 결정적인 문제가 있다. 밈이나 욕설, 비속어 없이는 대화가 안 된다는 것이다. 사실 솔의 대사를 막상 입으로 읽어보면 평균적인 남학생의 말투보다 얌전한 편이지만, 이걸 대사로 써서 텍스트로 나열해 놓으니 파괴적이다.
그런 솔이 옆반의 단정한 여학생인 송이도에게 반한다. 미술관에서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사촌인 지한과 미술 작품에 대해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이도는 갑자기 나타나 자신에게 고백해 오는 이도에게 불가능해 보이는 미션을 제시한다.
“일주일 안에 네가 밈, 유행어, 은어, 신조어, 비속어, 비문 없이 15분 이상 나랑 대화할 수 있다면 사귈게.”
무슨 말이든 동조하는 듯이 대답하는 전략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착각한 솔은 바로 다음날 다시 고백을 하다가, 그 영상이 학교 페이스북에 올라가며 전교적 망신, 아니 전국적 개망신을 당하게 된다. 하지만 솔은 그 실패를 바탕으로 이제 대책다운 대책을 세우기 시작한다. (사실 이렇게, 자신의 문제를 지적받았을 때 그에 반발하는 게 아니라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그걸 개선해 보려고 한다는 점에서 솔은 상위 10%도 아니고 1%에 가깝다. 현실에서는 지적을 받았을 때 선비질이다, 왜 나를 가르치려 드느냐, 꼰대질 하지 말라며 반발이나 안 해도 다행이다)
그리고 솔과 이도의 친구들이 이 고백 내기와 함께 한다. 솔의 친구로, 교수 아들이자 아버지에게 반항하는 수빈은 이도의 그 말도, 바르고 고운 말을 쓰자는 교사의 말에도 반발한다. 그는 2016년 성인 문해력이 OECD 20개국 중 19위라는 통계를 언급하며, “왜 우리만 무식하다고 졸라 패는대? 지들은 바른말 고운말만 써?”하고 묻는다. 그에게 있어 비속어는 아버지에 대한 반항이기도 하다. 반면 솔이 일주일만에 성공할 리 없다고 믿는 지한은, 밈이나 유행어를 쓴다고 해서 불편한 게 없지 않느냐는 이도의 말에 이렇게 대답한다.
“안 불편한 게 아니라 모르는 거야. 뭐가 불편한지도 모르는 거라고. (중략) 우리는 평생 비슷한 나이대의 사람들하고만 어울리면서 살 수 없어. 보편적 사회인이 되려면 모두와 통하는 말을 해야 하고, 그건 장기적으로 나에게 이롭기 때문이야.”
지한에게서는 자신에게 맞는 방식을 찾아야 한다는, 이도의 또 다른 친구인 조안나에게서는 비언어적 표현을 살려 보라는 조언을 얻어낸 솔은, 더 나은 말을 할 방법을 이도와 의논하기도 하고, 옛날에 서점을 경영하셨던 이도의 할아버지와 함께 영화 “시라노”를 본 뒤 “사람은 기록하는 대로 생각하고, 생각하는 대로 마음이 움직인다”는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솔의 형이자 같은 학교 3학년인 이한은, 말을 못하는 사람들의 세 가지 유형을 알려주며 자신이 어디에 속하는지 생각해 봐라, 그리고 책을 읽으라고 조언한다. 그리고 서점 앞에서, 형이 말한 대로 책을 읽으며 모르는 단어를 하나하나 검색해 보던 솔은 마침내 깨닫는다.
“(말에) 관심이 없어서 문제 인식도 못하면 이렇게 점점 글을 읽기가 힘들어지는 거고, 그게 반복되는 책을 읽을 수 없는 사람이 되겠지. 지금 나처럼….”
애초에 이도가 솔에게 원한 것은 아나운서같은 완벽한 스피치가 아니다. 이도가 원한 것은 자신의 생각을 정돈하여 자신의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었고, 솔은 노력한다. 노트를 펼치고 친구들에 대해, 가족에 대해, 이도의 친구들에 대해 생각나는 대로 적어본다. 그에게 있어 글쓰기란 생각을 정돈하는 것을 넘어, 이전까지 자신이 익숙하게 인식했던 세계를 낯설게 보고, 처음으로 사유의 대상으로 집어넣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솔은 자신을 썩 좋아하지 않던 지한을 돕고, 어른다운 어른이 아니면 어른 대접하지 않겠다는 지한에게 좀 더 세상을 부드럽게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고, 서로 이해하게 된다. 지한 역시 솔의 노트를 보고 그가 정말로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뒤 그를 인정한다. 서로 섞일 것 같지 않던 세계는 솔의 노력을 통해, 그리고 노력하는 솔을 보고 역시 변화하는 이도와 친구들에 의해 마침내 접점을 갖게 된다.
일주일이라는 시간 제한, 20화라는 짧은 포맷으로 이 웹툰은 다소 고전적이지만 영원한 청춘의 테마인, 지금까지의 자신에서 벗어나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발버둥치는 소년의 모습을 통해 “지금의 망가진 언어”와 “망가진 사유”에서 벗어나 자신의 생각을 자신의 말로 표현하기 위한 여정을 보여준다. 그에 꼭 필요한 정보가 쉬운 말로 순하게, 그러나 빠짐없이 들어가 있어 웰메이드 학습만화같은 느낌이 드는 대목도 있지만, 이야기는 결코 지루하지 않고, 처음에는 고백에 성공할 가능성이 전혀 없어 보이던 솔이 뒤로 갈 수록 점점 나아지는 모습을 볼 때 마다 마음으로 응원하게 되기도 한다. 이 만화의 문제점을 딱 하나 꼽자면, 현실에는 (생긴 것은 둘째치고) 자신의 문제를 지적했을 때 그걸 해결하기 위해 주변 사람들의 조언을 두루두루 구하고,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계속 생각하고 발버둥치며 마침내 자신이 그린 상에 가까워지는 사람 자체를 찾기가 어렵다는 것 뿐이다. (사실 이것만으로도 솔은 그 기준으로는 최상위권에 속한다.)
PS) 이 이야기가 청춘 드라마 같은 것으로 만들어져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자극을 주었으면 좋겠다 싶으면서도, 막상 솔이 읊어대는 대사들은 입말로 옮기면 현실 남학생들 대비 그렇게 심한 느낌이 들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이런건 텍스트로 봐야 충격적이지…… 지금 장관조차 없는 상황에서 이런걸 바라도 될 지는 모르겠지만 교육부에서 돈을 내서 전국 중학생들에게 책으로 한 권씩 안겨 주었으면 좋겠다. ㅠㅠㅠㅠㅠㅠ